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그곳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은 가족들에게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고 가족은 점차 부서져 나간다. 상훈(양익준)은 그 증오를 먹고 자란 짐승이다. 분노와 증오를 되새김질하며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욕을 던진다. 욕을 빌리지 않고서야 진심을 표현할 수도 없는 상훈은 폭력이 잉태한 사생아처럼 살아간다. 오로지 주먹질을 통해서 삶의 시효를 연장해나갈 뿐 스스로의 삶을 위한 배려 따윈 없다. 증오와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기보단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독을 품는다. 배다른 혈육에게 마음을 쓰면서도 스스로를 저주하듯 살아간다.
상훈에게 있어서 폭력이란 유일하게 삶을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그의 삶 자체가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다. 목을 조르고 손목을 긋고 싶은 혈연의 증거다. 손목의 핏줄을 잘라서 모두 쏟아버리고 싶은 혈연이라는 원한이 그의 몸 속을 돌고 돈다. <똥파리>는 모든 이의 혐오를 살만한 존재의 외피를 넘어 내면을 추적하고 관찰하는 영화다. 그 안엔 어떠한 위로나 염원이 없다. 그저 최대한 진심에 접근해갈 뿐이다. 상훈의 진심을 추적하는 과정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뿌리를 추적해가는 것과 같다.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수컷들은 응어리진 증오와 분노를 자신의 보금자리에 배출한다. 집안에서 폭군처럼 굴며 주변에 자리한 구성원의 모든 것을 흔들고 부순다. 그 폭력의 중심에서 자라난 또 다른 수컷들은 그 삶을 증오하는 방식으로 또 한번 폭력을 재생산하고 잠재적인 잉태를 부른다. 결국 맞는 자도, 때린 자도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된다. 그의 삶이 걸쳐있는 영역 전체가 너덜너덜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방식을 통해 삶은 지속된다. 연희(김꽃비)는 유일하게 상훈이 휘두르는 폭력을 온전히 체감하면서도 그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다. 상훈이 연희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연희와 상훈은 서로에게 있어서 출구와 같다. 아버지와 남동생 영재(이환)와 함께 살아가는 연희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고립된 신세다. 상훈은 해소되지 못하는 폭력의 징후에 감금되어 지독한 증오를 통해 삶을 지탱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빈정거리는 욕설로 이뤄지는 대사는 때때로 농담과 같은 언어적 유희가 되어 관객의 웃음을 야기시키지만 이를 담보로 거리감을 좁힌 관객을 곧바로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 방치해버린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끼고 뺨을 얻어맞은 채 눈을 부릅뜰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뺨을 얻어맞은 쪽도 하나같이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 폭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공유해야 한다. 그 과정은 실로 절망적이다. 때때로 어떤 가능성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다. 단지 그 안에서 가장 지독한 폭력을 구사하던 대상이 몰락하는 방식이 발견될 뿐이다. 폭력을 구사하던 육신의 주체가 만신창이가 되어 사라질 뿐, 폭력은 계승되고 유지된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영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똥파리>는 희망적인 영화다. 절망을 관통하기 때문에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이 가능할 때 <똥파리>는 완전한 100%의 절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단지 전세대의 폭력을 증오하는 것으로, 혹은 부정하는 방식으로서 단절하는 것으로선 그 부조리를 끊을 수 없다.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그 폭력의 기저를 살피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 자신이 부정하던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락시켜선 안 된다. <똥파리>를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로 둔갑시키는 이 세태를 고민해야 한다. 가난을 비극으로 치환하고 가정을 폭력의 도가니로 변질시키는 건 그저 아버지가 무능해서가 아니다. 증오를 통해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저 증오를 배출하는 혐오의 덩어리로 몰락할 뿐이다. 실상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영화 밖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조리 속에서 가족은 살아간다. 그 안에 ‘똥파리’들이 자라나자신만의 폭력을 합리화한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 실상 자신이 폭력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걸 알았을 때 세상은 변한다. 스스로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멱살을 잡힌 채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멀쩡하게 일어서서 눈감지 못하는 쪽도 하나같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어느 곳보다도 현실적인 풍경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이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는 사이 점차 부서지고 파편화되는 가족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낯익은 풍경이다. 지독한 폭력에 노출된 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부조리의 자궁에서 또 다른 증오를 잉태한 채 자라고 엉킨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광경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절망을 관통하고 멈춰선 채 응시한다. 통증을 각성시키고 폭력을 환기시킴으로써 파묻어 부정하던 폐부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유도한다. 따뜻한 위안이기 보단 거친 윽박을 지른다. 당황스럽겠지만 객석에서 일어날 때 즈음엔 진통과 함께 밀려드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구상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은 결국 영화 밖에 있다. 똥파리는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똥 무더기다. 혐오의 대상이 사라져도 혐오의 세계는 남는다. 그걸 걷어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영화가 아닌 관객이다. 바로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