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에로스에 대한 다섯 개의 시선.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누드 이미지를 내건 티저포스터는 <오감도>가 구사할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모종의 기대감과 동떨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 <오감도>는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옴니버스이자 기획에 따른 기대감을 배반하는 결과물이다. 창의적인 해석력도, 과감한 묘사력도 선보이지 못한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에 가깝고,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에피소드를 통과할수록 티끌과 같은 권태가 쌓여나간다. 또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처럼 축적된 권태의 무게를 견디는 것도 만만치 않은 고행이다.
수출만이 살 길이다. (베트남에서) 이겨서 돌아오라. 대통령 각하 만세. 새마을 운동. 어느 시대를 추억하는 용어들이 이처럼 삭막한 건 그 시절의 낭만이 철저히 억압됐기 때문이다. 통금과 단속이 난무하던 1970년대 유신의 시대에서 낭만은 잡초가 아니고서야 싹을 피우지도, 뿌리를 내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고 70>은 그 어두운 70년대에 음지에서 잡초처럼 자라났던 대한민국의 1세대 밴드들, 더 나아가 시끄러운 밤을 열망했던 그 시절 청춘을 위한 일종의 위령제다.
<고고70>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허구, 즉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픽션이다. 야간통행금지로 밤이 조용하던 시절, 밤이 ‘좀 더 시끄러웠으면 좋겠다’는 병욱이 기획한 호텔 지하에서의 밤샘영업공연은 70년대 고고 열풍을 일으킨 실제적 사건이었고, 그 실제적 사건을 주도한 ‘데블스’ 역시 실제로 그 시절에 존재하던 밴드였다. 전작인 <사생결단>에서 치열한 취재를 통해 부산 뒷골목에서 암암리에 이뤄지는 마약거래의 실상을 영화에 그려낸 최호 감독은 <고고70>에서도 시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 늦은 밤 고고클럽에 모인 청춘남녀가 밴드의 사운드에 맞춰 고고 댄스에 열중하는 광경은 그 시절의 풍속도가 된다. 시대에 갇힌 낭만의 유일한 출구는 어두운 밤에 울려 퍼지는 통금의 사이렌에 갇힌 지하실로 통한다. 갇혀버린 청춘남녀의 낭만이 지하에 자리잡은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열기를 더할 때 70년대는 가장 뜨거운 시절로 재현된다.
하지만 역시 암울한 시대에서 쿨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퇴폐의 온상으로 규정 당한 고고클럽은 폐쇄되고 ‘몰지각한 땐스광은 처벌’하겠다는 엄포가 내려진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도 더욱 심해진다. 종래엔 퇴폐의 아이콘인 밴드멤버들 또한 형사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한다. 밤은 다시 조용해진다. 멤버의 죽음을 통해 구체화된 불화로 해체의 수순을 밟았던 어제의 영웅들이 고초의 현장에서 다시 대면한다. 무대 위에서 열정을 노래하고 낭만을 외치던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피멍을 새긴다. 경제 부흥이란 마초적 슬로건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낭만을 노래하는 청춘은 뭇매를 맞고 비틀거린다. 썩어빠진 정신을 차리게 만들겠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그 매질은 낭만에 잠재된 자유의지를 꺾기 위한 방편이다.
결국 이 영화는 그 모든 거짓된 논리에 구속되어 청춘을 상실한 70년대의 행진가다. <고고70>의 하이라이트이자 영화에서 발생한 카타르시스의 배출구 역할을 하는 마지막 콘서트 씬은 가히 폭발적이다. 총 10대의 카메라와 국내 굴지의 촬영감독들을 동원했다는 이 문제적 장면은 생생한 음의 질감을 형체로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평할만한 성과다. 무엇보다도 조승우와 함께 데블스의 멤버를 연기하는 이들이 실제 밴드와 뮤지컬 배우로서 경력을 자랑하는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란 점은 이 영화의 무대가 뿜어내는 에너지의 구심점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다소 연출적인 흐름이 덜컹거리는 지점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고고70>은 나름대로 음악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시대를 사유하고 낭만의 혈기를 추스르는데 성공한다. 하수상하던 시절에도 낭만은 그렇게 잡초처럼 자라났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한번 더 물어야 한다.
요즘의 낭만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가? 시끄러운 밤을 되찾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노래하는가? 최루탄을 씻어내는 영화 속 소방호스의 물세례와 달리 지난밤 물대포에 맞선 청춘과 노래는 함께 했을까? 오늘날 유통되는 낭만은 과연 진심을 소비하고 있는가? 원어도 모르고 외쳤던 그 당시 ‘쏘울’은 투박하지만 자유를 갈망했다. 오늘날 매끄럽게 포장된 노래들은 진정 '소울'을 담고 있나? 지금 자유로운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음악을 소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