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은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이 집필한 16권 분량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중화권 톱스타로 떠오른 장국영과 왕조현을 앞세운 이 작품은 무협과 느와르를 필두로 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흥행작이었으며 올드팬들에게는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고전적인 아이콘이다. 새롭게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은 이런 전설적인 인기에 영합한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전작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메이크된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내러티브에 있다. 왕조현이 연기한 소천과 장국영이 연기한 영채신의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룬 전작과 달리 새로운 <천녀유혼>은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천과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로맨스 이전에 고천락이 연기하는 퇴마사 연적하와 소천의 내밀한 사연을 프롤로그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캐릭터들의 비중이나 형태도 변모했다. 소천과 영채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연이 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이루는 삼각구도의 관계로 변모한 것. 또한 과거 연적하와 동료였으나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립하게 된 하설풍뢰(번소황)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도 새롭다. 이처럼 전작에 비해 보다 복잡해진 캐릭터 관계도는 내러티브의 전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적하와 소천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리메이크작에서 영채신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극의 전개에 있어서 영채신은 여전히 주요한 캐릭터다. 다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보장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변화했음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리메이크작에서 일종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리메이크 판본은 영채신과 소천의 로맨스보다도 소천과 연적하의 사연이 감정적 중추를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런 선택은 두 사람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원판의 감정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하지만 역으로 리메이크 판본의 선택은 영채신과 소천의 감정선을 중화시키고, 소천과 연적하 사이의 감정선마저 소품처럼 몰락시킨다. 감정적인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으나 그 감정에 긴밀함을 불어넣는 재주까지 마련하는데 실패한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들의 매력, 더 나아가서 배우 스스로가 어필하는 매력의 결핍 덕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판본은 원전에 비해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인상이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오가던 왕조현과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순정적인 장국영에 비해서 유역비와 여소군은 평범하다. 이는 온전히 배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에 관한 묘사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행동 반경의 제약 탓이기도 하다. 캐릭터 관계가 확장됐다는 건 극의 중추를 이루던 캐릭터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그만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잃어버렸다는 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맹점이다. 상황은 보다 분주해졌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건 감상의 집중력도 약해짐을 의미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의 묘사력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그 열악함이 발생시키던 재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소품으로 제작된 시체들이 기어 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인 긴장감이 있었으며 영화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위트를 발생시킨다. 슬랩스틱의 요소와 함께 고전적인 무협물로서의 매력이 존재했다. 그 열악함이 B급 취향의 흥미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천녀유혼>은 오늘날의 발전된 CG기술을 통해 보다 매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되레 그것이 이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이 되레 원작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퇴화시킨 셈이다. 무협물로서 액션의 묘사는 보다 디테일해졌지만 날것처럼 등장하던 소품들의 귀기 어린 기운들은 사라졌으며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신비감도 되레 증발한 것 같다. 거친 단면들을 말끔하게 밀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천녀유혼>을 평범한 작품으로 인식시킨다. 깔끔할수록 보기는 좋지만 때때로 그것이 심심할 수 있다는 것,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증명하는 건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아닐까. 장국영에 대한 향수는 덤이다.
베를린에서 공개된 <매란방>의 러닝타임이 147분으로 알고 있다. 어제 내가 본 건 118분이었는데 중국에서 상영된 건 어떤 버전인가? 중국에서 상영한 것도 베를린 버전과 같은 147분짜리였다.
혹시 118분 버전은 봤나? 편집에 어디까지 관여한 건가?
공교롭게도 아직 보진 못했다. 사실 영화사 측으로부터 한국 사정에 맞춰서 러닝타임을 줄인다는 말은 미리 들었다. 배급사에서 나름대로의 사전에 맞춰서 부탁한 것이라 생각하니 반감을 갖거나 크게 염두에 두진 않았다. 일단 러닝타임을 줄였다고 하니 조정된 부분이 어떤 부분일 거란 예감은 든다. 그리고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다른 나라의 사정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요청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다만 수입사의 판단이 옳은 방향이길 바랄 뿐이다.
예전에 펑 샤오강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펑 샤오강 감독은 아시아에서 제작되는 블록버스터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항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펑 샤오강 감독이 그때 어떤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하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감독마다 조금씩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국도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자신의 나라가 지닌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를 영화에 담아내고 이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국 영화 중에서도 훌륭한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영향을 준다. 실질적으로 지금 전세계적으로 미국 문화 자체가 우세한 위치에 놓인 건 확실하다. 만약 한국이나 중국 감독이 자기 나라의 역사적인 전쟁을 영화로 찍었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 대부분을 이해시키긴 힘들 거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경우는 다들 서양문화를 이해하는 만큼 쉽게 받아들인다. 만약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인도감독이 인도영화처럼 찍었다면 세계시장에서 지금처럼 인정받기 힘들었을 거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 속의 중요한 부분들을 우리가 영화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매란방>에서 일본군 장교가 경극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그런 맥락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중국이 위대하다는 의도로 접근한 대사는 아니다. 실제로 매란방은 일본으로 서너 번씩 건너가 공연을 했고, 이를 통해 일본 친구들을 알게 됐다.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일본군은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할 수도 있었지만 문화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했다. 영화에서 일본과 중국의 갈등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5분 정도의 분량을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는데 만약 그 장면이 남아있다면 이런 부분을 좀 더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가 경극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건 <패왕별희>와 같은 중국영화의 영향력 덕분이기도 하다. 혹시 중국 내에서는 경극을 소재로 한 다른 장르나 매체가 제작되고 있나.
아직도 중국 내에서 많은 관객들이 경극을 좋아하고 보기 때문에 여전히 공연이 이뤄진다. 특히 북쪽지방 사람들은 더더욱 경극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해서 다른 컨텐츠를 만들기 보단 여전히 경극 자체가 존재하고 있다. 경극은 높은 경지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이므로 영원히 존재하길 바라지만 지금 현재로선 완전히 대중적인 예술이라 말하긴 힘든 측면이 있다. 물론 예전엔 아주 대중적인 예술이었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경극은 현실주의적인 예술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어떤 동작이나 도구를 사용하는 형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동작이나 표정으로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경극이 서양에 끼친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유명한 감독, 배우, 평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들 가운데 경극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찰리 채플린과 매란방은 굉장히 많은 교류를 하는 친구관계였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가령 예를 들어서 컵을 들고 물을 마신다면 실제로 컵은 없지만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동작만 하지 않나. 사실 이런 것들이 매란방과의 교류를 통해서 얻은 영향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한다. 그리고 러시아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은 매란방이 연기하는 장면을 실제로 찍었었고 여전히 그 영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매란방은 단지 중국에 국한되는 인물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세계의 대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행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매란방이 세계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당신의 작품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바가 있을 거다. 15년 전 상영됐던 <패왕별희>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그 영화를 통해 경극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있을 거다. 자신의 작품이 타국인들에게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의식해본 적 있나? 혹은 반대로 자신이 타문화의 영향력을 얻었다고 할만한 경험은 없나?
실제로 내가 다른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줬는지 스스로 잘 느끼긴 어렵다. 나는 문화혁명을 겪은 세대였고, 문화혁명으로 당시에 노동자가 됐다. 사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나를 영화 대가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문화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건 우리가 가진 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더더욱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고. 물론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서양의 문화를 그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다. 우리 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서양문화 속에서도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싶진 않다.
<매란방>은 예술가에 대한 일대기를 담은 영화다. 예술가라 할 수 있는 당신이 그 이야기를 선택한 것에 대한 계기가 있을 텐데.
<매란방>은 예술가가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얻게 되는 어려움과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영화다. 자신을 버리고 관객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배우다. 유일하게 서방국가에서 경극을 보여줬던 배우이기도 했다. 일본 침략기엔 자신을 버리고 다시 배우로서 살아가고자 결심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종이 족쇄를 차는 백부의 모습은 그 시대의 예술인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다양한 매체와 접하지 못하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 예술가로서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작품이다.
<매란방>은 크게 세 맥락으로 구성된 영화다. 사실 세 번의 사건 속에서 매란방보단 그 주변부를 차지하는 인물에게서 얻어지는 극적인 감정이 크다. 궁극적인 의도가 궁금하다. 그리고 혹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구상해보진 않았나?
실제로 매란방이란 인물에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되는 세 부분을 단락으로 나눠서 각자 세 명의 인물을 거치는 방식으로 묘사했다. 처음에 스승님과의 대결에서 매란방이 비록 승리자가 됐지만 사실 승리 이후에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걸 느낀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조차도 그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전쟁과 같은 어떤 외부의 압력에 의해 무대에서 자신의 예술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건 어떤 예술가에게라도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결과적으로 매란방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세 단락을 통해 매란방이란 인물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약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 매란방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패왕별희>와 <매란방>은 당신이 만든 작품이란 점만으로도 비교되기 좋은 영화다. 벌써부터 그러는 분위기고. <패왕별희>는 15년 전 작품이다. <매란방>은 실재 역사적 인물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패왕별희>와 전혀 다른 작품이다. 일단 연기하는 인물들이 다르지 않나. <패왕별희>에서 장국영이 연기한 데이는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라 할 수 있는 중심인물이 아니라 변두리의 인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늘 긴장관계를 지니고 살았다. 결국 그 사회가 발전하는 변화 속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서 매란방은 그에 반해서 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매란방은 물처럼 흘러가는 인물이었다면 데이는 불처럼 꺼져가는 운명이다. 매란방은 부드러운 저항가란 점에서 실제 아시아인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두 인물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화두는 없을까?
인물이 다르긴 하나 두 인물을 통해서 느껴지는 바는 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 같다. 단지 나는 매란방이 이를 더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매란방>을 통해서 포용하는 인간을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패왕별희>의 장국영과 <매란방>의 여명을 비교한다면 어떤가?
장국영이라는 배우는 굉장히 민감하고 내적으로 불 같은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서 여명은 마치 차분한 검객처럼, 혹은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처럼 조용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다.
몇 년 전부터 아시아 합작영화들이 활발히 제작됐다.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아시아인이 느낄 수 있는 어떤 공통된 소재나 주제를 이용해서 아시아인들끼리 좋은 영화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이젠 이런 합작영화가 더 이상 소수의 사례가 아니라 보편화된 단계로 올라섰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합작영화에 참여해보고 싶기도 하다. 한국도 괜찮고, 일본도 괜찮고, 혹시 어느 회사랑 합작하면 미래가 밝을지 당신이 알려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웃음)
혹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가 있나?
그리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 다만 어떤 이야기들은 영화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을 거 같고, 어떤 이야기들은 관객들이 과연 그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 중 하나는 내가 소년 시절 문화혁명 당시, 남쪽 지방인 운남 열대야 지방의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평범한 삶이긴 했지만 자연환경 속에서 얻었던 역경과 사랑, 이상을 비롯한 청춘 시절의 충동 같은 감정들과 그로 인한 다양한 사연에 대해서 한번 꼭 다루고 싶다. 다만 그게 관객들이 보고 싶어할만한 이야기일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