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이브 생로랑'을 '디오르(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굴하고 '존 갈리아노'를 디오르의 지휘관으로 발탁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말했다. "검정색 풀오버와 열 줄짜리 진주목걸이로 샤넬(Channel)은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디오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nel)'의 패션을 시대적 혁명으로 정의했다.
샤넬이 파리로 진출했던 1910년경의 여자들이란 그저 남자들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 아니라면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사교계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신분이 천하고 처지가 박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유년 시절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 샤넬 역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샤넬(오드리 토투)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반체제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직업적으로 선망한 여성이라 묘사한다.
1893년, 부모에게 버려져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맡겨진 샤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통해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간다. 물랭(Moulin)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와중에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샤넬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엔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을 만나게 된다. 샤넬의 도전적인 태도에 호감을 느낀 발장은 그녀가 파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샤넬의 오디션은 실패하고 발장 역시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사저로 떠난다. 하지만 발장을 찾아가 그의 사저에 머물며 고위층의 사교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샤넬은 그곳에서 고위층 부녀자의 화려한 패션에 실소를 머금고 자신만의 심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샤넬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연인 보이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을 만나게 된다.
<코코 샤넬>은 샤넬의 스타일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만약 <코코 샤넬>을 통해 샤넬의 스타일을 만끽하고자 티켓을 구매한 관객이라면 만족감을 쥐고 상영관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 될 거다.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샤넬이란 브랜드를 창시한 가브리엘 샤넬의 비화를 다룬 전기적 성격의 영화다. <코코 샤넬>이 묘사하는 샤넬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전문직업인이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샤넬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샤넬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묘사보다도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부에 기대어 화려한 치장을 뽐내며 살아가는 부유층 여성들의 삶을 무료하게 인식하며 무능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끼는 샤넬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자립여성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샤넬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사회적 배경이 <코코 샤넬>의 1차적 자산이라면 샤넬의 삶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2차적 자산이다. 결국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인물의 삶이 빛나는 지점을 다룬 화려한 소품이 아니라 그 삶이 정점에 오르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쳤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사적 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관객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소비를 느끼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샤넬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현재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부여하는 물질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인물의 성장이라는 역동적 소재를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에 가둠으로써 단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감정적 고양을 무마시킨다.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권태로운 감상이 도모된다.
이름만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삶이란 분명 들춰보고 싶게 매력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 인물의 현재를 이룬 기반을 살핀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의 서사적 선택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전히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영화다. 오늘날 명성을 얻은 명품 브랜드의 네임밸류를 만든 건 그 브랜드의 시작을 이룬 누군가의 삶이라기 보단 그 브랜드가 현대의 물질적 욕망과 상응하는 덕분이다. 물론 인물의 삶에 집중한 <코코 샤넬>이 패션쇼 따위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대심리를 배반하는 가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설득할만한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 샤넬>은 설득력 없는 드라마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조로운 드라마를 통해 설명되고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은 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던 패션 아이콘을 투정하는 아이처럼 치환해버린 과소비적 영화다.
확고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 <코코 샤넬>은 분명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소비심리를 부추길만한 영화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 <코코 샤넬>은 트렌디한 스타일로 무장한 패션쇼가 아니다. <코코 샤넬>에서 스크린의 용도란 명품 스타일을 전시하기 위한 쇼윈도가 아니라 인물의 감춰진 삶을 훔쳐보기 위한 창과 같다. 코코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빛나는 경력을 쌓아가기 이전에 그 삶을 어떻게 디자인 했는가를 조명하는 <코코 샤넬>은 엄밀히 말하자면 코코 샤넬이라는 인물을 위시한 멜로드라마이거나 페미니즘 전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구가하는 명품적 환상성에 이끌려 <코코 샤넬>을 선택했다면 상영 시간 내내 무기력한 감상을 동반할 확률이 크다는 말. 물론 인물의 절정을 배제한 채 그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이 감내한 시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이라 추켜세울만한 구석은 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비극적인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국한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다. 마치 가봉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마냥 불완전하고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마냥 무료하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