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원작자와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테이트 테일러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헬프>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에 약간에 손질을 가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각색의 묘를 살렸다. 할리우드의 다양한 신구 여배우들이 주를 이룬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일상의 풍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당대 미시시피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진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감상에 드라마틱하게 녹여낸다. 마치 21세기 버전의 <컬러 퍼플>이라 할 수 있는 <헬프>는 보다 경쾌하지만 역시 강건하게 그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게 만든다. 스크린은 어느 야만적인 시대를 중계하는 창과 같고, 그 너머에서 저마다 제 삶을 살아나가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영화는 보다 명확해진다.
<헬프>는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반추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종의 벽을 넘어서 소통한 어떤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립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종착된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웅변이 아닌, 그 약자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과정을 뚝심 있고 사려 깊게 살핀다. 동시에 <헬프>는 용기에 관한 영화다. 용기란 것이 막강한 힘의 산물인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것이 그 용기라는 아이러니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차별에 관한 영화다. <헬프>는 차별을 그리되, 차별을 웅변하지 않는다. 백인 가정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견뎌내야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사랑 받지 못하는 백인 아이들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광경 속에서 느껴지는 건 흑백의 구분이 아닌 체온의 공감이다. 눈물샘보다도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따뜻하게 끓는다. 유연하고 강인한 수작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했고 하나의 삶으로 융화되길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 한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한 아이가 생겼고, 다시 한 아이가 생겼다. 그들은 가족이라 불렸고, 더욱 너르게 삶이 분열하고 팽창했다. 하나하나의 생이 모여들어 더욱 커다란 삶의 영역이 자라났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분열하고, 생장하며, 격동하다, 소멸된다. 생명의 태동은 곧 삶으로 자라나 저마다의 세계를 이룬 뒤, 언젠가 사라진다. 단층과 같이 쌓인 시간들은 지층의 역사를 이루고 적층과 균열을 거듭하며 고유의 영역으로 멈춰서다 서서히 풍화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 사소하고도 거대한 생, 그 자체에 관한 영화다.
과작의 거장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를 통해서 현묘한 생의 철학을 우주적인 심연으로 띄워 보낸다. 엄격한 아버지와 그 아래서 자라난 아들의 반목,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들은 늙어가며,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나간다. 영화는 그 삶의 단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밀하고 광대하게 이 세계의 풍경들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느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다가도, 그 주변에 잠재돼 있던 광대한 대자연의 이미지들을 관조하듯 떠내려 보낸다.
사실 이는 형식적으로 지나친 과장이자 확대에 가깝다. 사소한 일상을 비추던 카메라가 초자연적인 감상을 부르는 광대한 몽타주들과 맞붙어 거대한 접점을 형성해내는 과정은 인위적이며 생경하다. 하지만 그 무분별한 몽타주들의 흐름에는 일정한 약속이 있으며 운율의 운동이 느껴진다. 탄생과 생장, 쇠락과 소멸의 여정이 뒤엉켜 완성된 세계가 스크린에 떠오른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의 이미지들을 거듭 지켜보다 보면 그것이 끝내 탐미적인 극치로 가 닿아 감상을 부풀어오르게 만듦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고, 거시적인 자연을 관조하는 영화의 전지적 시점은 끝내 이 세계의 모든 생의 너비를 아우른다. 탄생과 사멸의 예정 속에서도 꾸준히 생장하는 생은 흩어져 부유하다 한데 엉켜 돌다 덩어리져 구축되고 끝내 소멸하는 우주의 원리와 다르지 않음이 그 끝에 다다라 체감된다. 신앙적인 영험과 자연적인 신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경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저 이 세계를 채우는 모든 존재에 관한 역사를 응시하고 되찾아 짚게 만드는 영화다. 악상처럼 흐르는 유려한 이미지들은 사소하게 자리한 모든 세계를 유려하고 장엄하게 아우른다.
생의 영역은 거대한 우주에 예속된 먼지처럼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저마다 맞잡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 이룬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세계와 이 세계를 보존하고 움직인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연주하는 경건하고 장엄한 심포니다. 일상의 단면이 모여 하나의 생을 이루는 여정 안에서 우리는 마주하거나 마주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경의 일원으로 자리한 채 생의 너비를 이룬다. 우리는 결국 음표다. 이 세계의 연주 안에서 고유의 음을 내는 음표로서 완전하고 불완전하다. 그렇게 뿌리 내린 저마다의 생이 이 세계를 울리는 생장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삶과 생, 어쩌면 존재 자체가 이토록 경이로운 것일까. 생이란 것이 단순히 켜켜이 쌓인 단층적인 서사의 총합이 아니지만 찰나에도 끊임없이 생장하고 분열하는 것이 생이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의 우주이기에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이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카메라가 어느 미시적인 삶을 관조하는 가운데, 그 주변으로 광대한 자연의 이미지가 전시되어 끝내 층위를 이루는데 지켜보는 내내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탐미적 감상이 차오른다. 형식적으로 지나친 과장이자 확대 같은데, 그것이 끝내 마음을 광활하게 지배하고 부풀려 감상의 극치까지 떠올라 가닿게 만든다. 신앙적인 영험과 자연적인 신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경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연주하는 경건하고 장엄한 심포니다. 실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