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중, 71명의 학도병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다는 포항에서의 실제 전투를 극화한 <포화속으로>는 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 신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실감 넘치는 전투신을 목격하기 보단 ‘전쟁 화보’를 구경하는 듯한 기분이다. <포화속으로>는 재현보다도 포장에 능한 작품이다. 물량공세를 퍼붓는 전장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좀처럼 긴박감이나 비장함을 발견할 수 없는 건 그 덕분이다. 캐릭터의 비장함도, 전쟁의 참혹함도, 하나 같이 흉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 <포화속으로>는 전쟁의 껍데기를 두른 마초 화보 영화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만들 심산이었을까. 그렇다면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놓았다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을.
아내가 살인했다. 아니, 살인한 것 같다. 형사인 남편이 살인현장에서 발견한 물증들은 정확하게 아내를 진범으로 겨냥하고 있다. 대학동기인 동료형사에 대한 불리한 증언마저 고지식하게 해낼 수 밖에 없었던 원칙주의자 형사는 남편으로서 기로에 선다. 남몰래 물증의 은폐와 훼손을 감행한다. 그러나 수사가 거듭될수록 은폐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증거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 그리고 도무지 돌아설 수 없는 일이다. <세븐 데이즈>의 각본을 쓴 윤재구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시크릿>은 전자와 마찬가지로 공공적인 윤리에 발붙여야 할 이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얹어놓은 뒤 벌어지는 개인적 갈등을 다룬다. 윤리적 죄의식에 등돌린 채 개인적 불행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달릴 수록 상황은 진창으로 떨어진다. 가치관의 갈등을 느끼는 인물의 심리는 <시크릿>에서 전반적인 긴장감을 직조해내기 위한 궁극적 핵심과 같다. 동시에 빠르게 나열되는 컷과 숏을 통해 정보량을 증가하는 <시크릿>은 단서들의 교차와 충돌을 통해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스릴러다. 일단은 그렇다.
<시크릿>은 인공적인 영화이자 그것을 애써 가리지 않는 작품이다. 말끔한 슈트를 차려 입은 형사의 옷 매무새부터 시작해서 끝없이 단서를 벌려나가는 내러티브의 형태까지, 영화는 좀처럼 현실을 끌어안을 생각이 없다는 듯 모든 것들을 연출적 시공간으로서 치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스릴러로서 단서를 벌려나가는 이야기가 딱히 인상적이지 않을 때, 이 모든 건 허세가 된다. <시크릿>은 기본적인 비밀의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그 수면 위에 단서를 마구 흩뿌린다. 사연의 단초는 쓸만했다. 도입부의 몽타주도 꽤나 인상적이다. 문제는 그 사연의 설계다. 비장한 표정으로 자꾸 패를 던지는데 그 결과가 초라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비밀은 여간 해서 모른 체하기 어렵고,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가 제 입으로 설명하는 비밀의 정체란 구차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사족은 명백한 낭비다. 허물처럼 벗겨지는 단서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의 정체란 정작 허망하다. 감춰야 할 것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것들만 드러낸다. 비범한 척 패를 돌리지만 결과적으로 뻥카 같은 반전 앞에 허세로 몰락하고 만다.
일렬로 늘어선 폰(pawn)을 전진시킨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동선이 확보된다. 그 사이를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 룩(rook)이 파고들어 적진을 유린한다. 결정적인 순간, 순식간에 퀸(queen)이 적의 폐부로 돌진한다. 상대말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때론 자신의 말을 미끼로 던져 허를 찌른다. 멀리 선 킹(king)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동선을 조인다. 더 이상 오갈 때 없는 적진의 킹을 쓰러뜨리며 외친다. 체크메이트(checkmate).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이이>)는 일종의 체스판을 구상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말을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마련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전략적 동선을 그려 넣는다. 마지막 한 수에 다다르기까지의 밀고 나가는 전략은 그 와중에 발생하는 빈 공간의 변수까지도 철저하게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판을 읽는 지능적인 두뇌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전진시키는 두둑한 배짱이다. 지능적인 복마전을 팽팽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을 움직이는 이의 배짱도 두둑해야만 한다. 손실조차도 차익으로 역전시키는 탁월한 전술과 냉정한 판단력은 게임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름없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을 구사하는 유저의 능력이다.
카체이싱의 박진감과 스피디한 전개로 현금수송차량 탈취과정의 흥미를 돋우며 시작되는 <눈눈이이>는 시작부터 범인들의 몽타주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사건의 양 축이 되는 범인과 형사의 구도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그들의 대결양상을 한껏 살리겠다는 의도를 지닌다. 결국 그 구도는 과연 이 양상이 어떻게 끝맺음을 낼 것인가에 관심의 무게를 얻는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물음표가 하나 얹혀진다. 판을 구성하고 패를 돌리는 안현민(차승원)은 그 게임에 의도적으로 백반장(한석규)을 개입시키며 판을 키운다. <눈눈이이>는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을 다룬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두 캐릭터의 비중은 사실 한쪽으로 이미 치우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안현민의 의도는 <눈눈이이>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결국 두 캐릭터의 격돌양상이 캐릭터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세기와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애초에 캐릭터에게 주어진 능력치의 양상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설계한 안현민이 체크메이트를 외치고자 하는 대상은 그의 감춰진 사연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결국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구도는 <눈눈이이>의 맥거핀과 다름없다. 문제는 그것이 동등한 캐릭터의 대비를 갖추지 못한 탓에 맥거핀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굳이 동등해야 할 의무는 없다. 차라리 <눈눈이이>가 안현민을 위해 백반장을 소모시키는 영화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의도한 게임의 묘미는 캐릭터의 대비가 느슨해진 덕분에 긴장감을 서서히 상실한다. 이는 결국 영화가 의도한 목적성에 이도 저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활력적인 범죄스릴러의 구조를 지닌 전반부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느와르적 감수성을 머금으며 느릿느릿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형태의 변질과 함께 클라이막스도 손상된다.
애초에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립구도가 선악의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란 점은 <눈눈이이>의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지점이었다.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식과도 같은 구조관계에서 벗어나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의 우위에 서려는 사소한 욕망의 대결구도가 <눈눈이이>의 성패를 가늠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눈눈이이>는 스스로가 내세운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체크메이트를 위한 구색만을 차린다. 다만 외모만으로도 인상적인 두 캐릭터가 펼치는 신경전의 양상과 초반부 현금차량탈취씬을 비롯해 주요한 사건이 발생되는 굵직한 시퀀스의 연출력은 <눈눈이이>가 지닌 절반의 성취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위장된 게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흥미를 반감시킨다. 일방적인 게임은 아무래도 재미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게임조차도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의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그 말미에 다다라서야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가 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단 그것이 배신감의 형태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나마 영화가 마지막까지 일정한 동력을 발생시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두 배우의 힘있는 표정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