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는 배우로서의 삶이 남다르긴 하지만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배우 박진희와 자연인 박진희는 한 줄기의 인생을 유영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흐름을 타고.
들고 있는 책은 제목이 뭔가요?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네요. 여기 놓여 있길래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 일탈의 사전적 의미가 나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또는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재미있네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에서 연기한 선주는 평생 일탈을 꿈꿔보지 못한 여자였거든요. 솔직히 박진희 씨도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개성 있는 배우들이 많아서 나만 너무 평범해 보이니까. 그래서 일탈을 시도했다가 심장이 떨려서 포기하고, 결국 일탈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았죠. 일종의 성장통 같네요. 20대 초반에는 항상 20대 중반 정도가 되면, 20대 중반에는 30대가 되면 성장할 거라 믿었어요. 어느 한 순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한 게 아니라 그 나이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철없는 아이였죠. 그런 탓인지 성장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청포도 사탕>도 좋아요. 서른이 돼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거니까. 어른이 되길 바라는 이유가 있었나요? 좀 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 보다 좋은 연기를 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 원하는 만큼 잘되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아요? 옛날에는 작품 외부의 이유를 보기도 있었어요. 상대 배우라던가, 그냥 타이밍이 맞아서라던가. 그런데 이젠 작품 자체만 보게 돼요. 진짜 하고 싶은 걸 알게 된 기분이죠. 선주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요. 본인은 어때요? 옛날엔 저도 그랬어요. 참는 게 사랑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꾹 참다가 폭발해서 이전 사건까지 생각하며 싸움을 크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말할 거면 확실히 하고, 말하지 않을 거라면 완전히 터는 것이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았죠. <청포도 사탕>처럼 여배우들이 많은 현장은 어떤가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인지 여자들과의 작업이 편해요. 어릴 때는 예쁘게 나오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서른 살을 넘기고 나니 현장에서 내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여자들끼리 대화는 많이 했어요? 박지윤 씨와 붙는 신이 많아서 지윤 씨랑 많이 나눴죠. 사실 팬이었어요. ‘성인식’처럼 도발적인 무대를 할 때도 멋있고, 후에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했을 땐 완전 반했죠. 지윤 씨와 출연 여부를 얘기 중이라고 들었을 때 같이 하고 싶었어요. 선주와 소라는 전혀 다른 아이잖아요. 그래서 저랑 상반되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지윤 씨의 이미지가 영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배우로서 스스로 평범하다 생각하나요? 사실 15년간 배우로 살아온 제가 지극히 평범할 순 없겠죠. 다만 독특한 배우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배우도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 생각이 정립된 과정이 궁금하네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예전에 드라마도 찍었다고 자랑할만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활동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엔 인터뷰하면서, “저는 잘할 거에요, 더 잘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20대 중반까지는 쉴새 없이 바빠서 어떤 위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죠. 대학원도 졸업했는데, 공부 욕심이 많나 봐요. 공부 욕심은 분명 있었지만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그 욕심을 다 소진했어요(웃음). 수업 듣는 건 좋았는데 논문을 쓰는 1년 동안 나랑 공부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얼마 전 존 박 씨와의 스캔들이 있었는데, 워낙 스캔들이 없던 배우라서 되레 신기하더군요. 원래 방송 의도는 작곡을 하는 남자와 작사를 하는 여자가 만나서 곡을 하나 만드는 거였어요. 환경 문제에 관한 가사를 써보겠다는 취지로 수락했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서 제작진이 봄에 어울리는 아련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데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첫 주 방송을 보고, ‘어? 이게 뭐지?’ 싶다가 3주쯤 되니,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었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죠.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 싶기도 했고. 존 박 씨의 볼에 뽀뽀한 것도 불가피한 연출이었나요? 야구장에 간 건 두 번째였는데 그날 너무 추워서 5회까지만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자꾸 한 회만 더 보자고 하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7회 정도가 끝나니 키스타임이란 걸 하더라고요. 갑자기 전광판에 저희가 비춰져서 당황했는데, 계속 비춰지니까 결국 존 박 씨가 ‘누나, 그냥 볼에 하고 끝내죠?’ 그렇게 된 거였어요. 예능을 몰랐고, 좀 순진했죠. 진짜 연애를 해야죠.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나지는 건 아니잖아요. 연애정보회사에 내놓을 수도 없고,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고(웃음). 특별히 요즘 꽂힌 게 있나요? 요즘에는 스님 책들? 네? 작가가 스님인 책들 있잖아요. 최근에 혜민 스님과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라는 책을 쓰신 정목 스님 트위터를 팔로우했다가 그 분들의 책을 읽었어요. 생각이 확장되는 기분이었죠. 불교신자인가요? 무교에요. 그냥 참선이나 수행 같은 과정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어요. 8월 초에 문경의 수련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어요. 명상하고 서로 묻고 답하며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았죠. 새롭게 리셋하는 기분? 지금까지 살아온 35년 안에서 그 일주일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을 기준으로 지난 시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좀 다른 삶을 살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소라가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이 선주와 재회하는 계기가 되죠. 혹시 유명한 배우가 된 덕분에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은 없었나요? 20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다가 현지에서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유학을 갔다가 현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는 언니였는데 초행이니까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해서 3~4일 정도 머물렀죠. 벌써 10년 전이네요. 그런데 며칠 전 트위터로 멘션이 왔어요. 너무 반가웠죠. 보고 싶네요. 트위터는 자주 해요? 예전엔 별별 이야길 다 했죠. 요즘은 가끔 환경 이야기나 하는 편이에요.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머니 덕분인 거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는 양동이를 모두 마당에 내놓고 빗물을 받아요. 그걸로 세차하고, 마당 청소하고, 화분에 물도 줘요. 설거지 마지막에 헹군 물은 꼭 다시 쓰고. 어릴 땐 너무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에 뱄어요. 얼마 전엔 저희 집 주차장에 채송화가 폈는데 어머니께서 채송화를 죽일 수 없다며 주차장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다들 결국 동의했죠. 곧 유학을 떠난다고 들었어요. 첫 번째 목적은 여행이었고, 길게 머물 생각이라 어학공부도 계획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그냥 긴 여행이나 다녀올 거에요. 얼마나 긴 여행이죠? 돌아오는 티켓을 끊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한 일주일 뒤에, ‘저 그냥 돌아왔어요!’할지도 모르죠(웃음). 목적지는 어디에요? 아일랜드요. 자연 경관이 좋은 나라라고 해서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어요. 너무 멀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가게 됐네요. 심지어 혼자서. 이것도 하나의 일탈 아닐까요?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건 없나요? 뭔가 기대했는데 얻은 게 없으면 실망하잖아요. 반대로 기대한 게 없는데 뭔가를 얻으면 기쁘겠죠? 그래서 기대 같은 거 잘 안 해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네요.
(ELLE KOREA 10월호 NO.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