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다섯 군대 전투>를 축약하자면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통해 한차례 증명된 바 있지만 피터 잭슨이 물리력을 총동원해서 전투신을 뽑아냈을 때의 스펙터클은 볼거리 중의 볼거리다. 아이맥스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여러 종족이 엮어서 발생하는 공명심과 이기심의 복마전과 물리력의 차이를 바탕에 둔 전투적 정황의 다양성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입체적인 감상 구조를 제공하고, 켜켜이 틈이 없는 감상적 지층을 만들어내는 덕분에 딱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롤러코스터. 어떤 식으로든 아이맥스에서 보시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피터 잭슨이 다시 중간계로 끌려 들어가 <호빗> 트릴로지, 심지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을 확장해 가며 3부작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살짝 혀를 차는 입장이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으로 다시 한번 갈무리된 트릴로지를 봤을 땐 대사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스타워즈>의 살짝 민망한 3부작 프리퀄과 대조적으로 언급될 만한 프리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올 겨울에 이만한 볼거리는 없다. 무조건 극장에서, 이왕이면 아이맥스다.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