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부로 치장한 베이클랜드 가문의 부부 바바라(줄리안 무어)와 브룩스(스테픈 딜런)는 겉으로 드러낸 평온 속에 잠재된 예민으로 끊임없이 충돌한다. 지독한 권태는 점차 부부의 삶을 괴리시키고 일상을 침전시킨다. 은밀하게 경멸과 적대로 서로를 희롱하듯 살아가는 베이클랜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에디 레드메인)는 온전하지 못한 질환적인 부부관계로부터 잉태된 후유증의 존재처럼 결핍에 시달린다.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이중적 나선처럼 얽힌 듯한 토니의 독백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는 결국 결말의 파국까지 나아가며 충격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세비지 그레이스>의 베이클랜드 가문의 인물들은 마치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미국인 중산층들의 권태를 닮았다. 영혼이 없는 껍데기의 삶을 부로 치장한 채 살아가는 가족의 일상을 멸시의 대상이 되기 좋은 형태로 그려낸다. 실상 그 이미지 너머로 어떤 성찰이나 교훈이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밀랍인형들과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적 비극의 현대적 역할극을 재현하지만 실상 그 재현의 방식엔 실체가 없다. 껍데기 같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엔 충격이 엄습할 뿐, 어떤 감정적 결과물이 채워지지 않는다. <세비지 그레이스>는 분명 충격적인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 충격은 어떤 감정도 잉태하지 못한다. 욕망조차 상실한 텅빈 삶처럼 영화적 욕망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다. 줄리안 무어의 가공할만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조차도 결국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인 양식과 별개로 기이하게 권태롭다. 빼어난 수사로 치장했지만 진심이 배제된 문장을 읽고 있는 것마냥 영혼이 새어나간 스크린을 맥없이 바라보는 기분이다. 마치 그 공허함이 영화적 의도인 것처럼 그렇다.
좋은 집과 좋은 직장, 평온한 삶과 순탄한 일상. 누구라도 행복하다고 믿을만한 인생. 하지만 그 인생의 주인공은 그 삶이 실로 괴롭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사는 헐리 부부의 삶이 그렇다. 이웃에겐 동경의 대상이지만 실상 그네들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에 닳고 닳아 낡은 벽지처럼 빛 바래간다. 삭막한 현재와 달콤한 과거를 대비시킨 프롤로그는 무너져버린 삶의 근원이 자리한 좌표를 예감하게 한다. 파리에서의 삶을 꿈꾸던 달콤한 연인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권태로운 부부가 되어 살아간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이하, <레볼루셔너리>)는 안온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깊은 권태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실이라는 거짓말이다.
너나 같이 비슷한 양복과 타이를 매고 먼 거리의 시내까지 기차로 출근하는 샐러리맨의 틈바구니에 낀 프랭크 윌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 앞으로 쓰레기통을 끌고 나오다 비슷한 너비로 줄 지어 선 쓰레기통이 집 앞마다 늘어선 적막한 거리를 지켜보는 에이프릴 윌러(케이트 윈슬렛)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젊은 부부다. 하지만 실상 윌러 부부의 삶은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점화되어 폭발 직전에서 다다르듯 위태롭다. 끔찍한 삶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에이프릴은 점점 예민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프랭크 역시 지쳐간다. 질식 당할 것 같은 권태에 짓눌리던 윌러 부부의 삶을 반전시키는 건 오래된 언약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날아가는 것. 해묵은 약속을 현실로 소환하려는 에이프릴의 권유는 프랭크의 승낙으로 이어지고 이는 고요한 수면처럼 평온한 삶 속에서 위태롭게 침잠되던 부부의 삶을 끌어올려 숨을 불어넣는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을 통해 시대를 지배하던 지독한 권태를 풍자한 리처드 예이츠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레볼루셔너리>는 텍스트의 행간에 놓인 여백까지 여운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듯 세심하고 첨예하다. 사랑하는 연인에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 모든 순조로운 과정이 실상 스스로를 얽매는 거대한 속박이 되었음을 깨닫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뒤늦게나마 자신들이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 부부의 삶은 부풀어오르지만 이내 다시 예민하게 서로를 찌르고 결국 터져나간다. 굴레를 맴돌듯 정해지듯 뻔한 일상을 돌고 도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헤매던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를 천천히 침식해나간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차분하고 예민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면서도 차갑게 냉소하지 않는다.
가능한 변화들을 역설하지만 실상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자들의 불행을 조소하지 않는다. <레볼루셔너리>는 시대의 기운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도 개개인의 특별한 속내에도 세심하게 귀를 연다.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에 가득한 건조한 향취를 외면한 채 행복한 척 살아가는 이들의 연기적 삶을 쓸쓸하게 비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행한 삶의 내면을 바라보는 건 정신병자로 낙인 찍힌 존(마이클 쉐넌)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나 파리로 가겠다는 윌러 부부의 고백에 수긍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다. 정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윌러 부부의 이웃과 프랭크의 직장 동료들은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비웃는다. 실상 그 정상인들은 현실에 담보 잡힌 삶 속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아내길 포기하듯 살아가고 있다. 매 순간마다 감지되는 불행의 신호들로부터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들고 자신의 현실에 합리를 덧씌워 불행으로부터 매일같이 도피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 합리의 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던 에이프릴과 이를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하던 프랭크는 현실을 등지려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현실로 다시 침전한다. 천천히 기울다가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해버린 타이타닉처럼 삶이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타이타닉> 이후로 11년만에 호흡을 맞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고요한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의 흐름을 따라잡듯 섬세한 케이트 윈슬렛은 밑바닥에서 천정까지 차오르는 감정의 영역폭을 깊고 높게 끌어올린다. 이를 보좌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액션 또한 훌륭하다. 안단테(andante)처럼 흐르는 <레볼루셔너리>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크레센도(crescendo)와 같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악센트(accent)와 같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전체적인 흐름을 좌우할만한 감정의 바다를 이룬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감정의 바다에 격랑을 제공하는 암초와 같다. 두 배우의 조합은 꽤나 이상적인 결과를 낫는다. 정신질환자 존을 연기하는 마이클 쉐넌 역시 비중에 비해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선사한다.
<레볼루셔너리>의 결말은 단연 비극이다. 그리고 그 파국을 면전에 둔 객석으로 모종의 질문이 던져진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삶이 권태롭다 하여 세상을 등지긴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불행의 근본을 마주서야 한다. 거기서 우린 선택한다. 삶을 등지고 전진하느냐, 삶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느냐.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건 삶이 아니다. 살고 있는가, 살아있는가. 전자와 후자는 불과 한 음절의 차이를 두고 있을 뿐이지만 결국 차원이 다른 언어로 읽힌다. <레볼루셔너리>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자신을 위한 자리인가? 비현실적인 꿈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은 행복을 선사하는가? 이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란 그런 것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에 두려운 영화다. 만약 당신이, 혹은 어느 누군가가 이 질문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충동 역시 느낄 것이다. 성공의 척도에서 인생을 볼모로 제공한 채 생을 부지하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면 그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평온한 거짓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사려 깊은 도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