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plicity>라는 원제처럼 <더블 스파이>는 시종일관 ‘표리부동’한 정체를 유지하는 캐릭터들의 심리전이다. 각각 ‘MI6’와 ‘CIA’근무경력이 있는 전직 국가요원 레이(클라이브 오웬)와 클레이(줄리아 로버츠)는 현재 대기업 산업스파이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두바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구면이지만 초면처럼 낯선 인사를 반복적으로 주고 받아오곤 했다. 마치 정해진 대사처럼 대화를 나누고, 정해진 배역처럼 마주치고 헤어졌다. 첫 만남을 묘사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로 5년 뒤로 점프 컷, 그리고 그 중간중간의 서사를 플래쉬백하는 영화의 속내를 읽기란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저 두 사람만큼이나.
2003년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더블 스파이>는 첩보물의 예감을 부르지만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동서진영의 이념적 대립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본’시리즈의 각본가이자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인 토니 길로이의 이름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런 예감쯤은 애초에 지닐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아남은 첩보원이 자신을 폐기하려는 국가에 대항하던 스토리나 기업의 비윤리적 노폐물을 청소하던 로펌 변호사의 양심적 결심을 묘사한 이야기는 거대한 반윤리에 맞서는 개인 윤리의 승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더블 스파이>는 앞선 사례들처럼 비범한 야심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는 어떤 본질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하지 않는다. '제이슨 본'과 '마이클 클레이튼'이 개인의 본질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역류했던 것과 달리 레이와 클레이는 개인의 욕망에 삶을 복무시킨다. 반윤리적 질서 속에서 몰락한 개인의 가치를 복권하기 위한 고행을 감내했던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의 남녀는 사유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껍데기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한다. 상대를 속이는 동시에 상대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연출된 거짓처럼 인식시키며 철저하게 위장된 삶을 살아간다. 5년의 너비를 확보한 서사는 그 간격을 오가며 두 사람의 진심을 끊임없이 캐묻고 덮는다.
관객에게 있어서 <더블 스파이>는 두 사람의 진심을 추적하는 게임과 같다. 스파이를 소재로 두고 있지만 첩보물과 거리를 둔 <더블 스파이>는 경쾌한 범죄영화의 외형에 로맨틱코미디의 정서를 함양한다. 물론 그 모든 형태와 정서를 포괄하는 스토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부르는 미궁처럼 설계됐다. 하지만 ‘본’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해법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듯 군더더기 없는 결말은 탁월하다. 줄충한 스토리 설계자로서 토니 길로이의 능력은 <더블 스파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다만 미로 같은 심리를 헤매는 과정이 온전히 매력적이라고 떠받들기엔 걸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더블 스파이>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관객은 예측 불가능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끊임없이 그 진심을 의심하면서 반복적인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수집하고 배열해나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수고와 노력에 비해 결말이 주는 보상은 충분한 위안이 될 만큼 비범한 것이 아니기에 허무에 시달리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컷어웨이 방식의 장면 전환 역시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권태로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더블 스파이>는 분명 뛰어난 스토리 그 자체를 핵심에 두고 다양한 장점을 장착해나가는 영화다. 클라이브 오웬과 줄리아 로버츠의 앙상블은 진심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의 모호한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절묘한 호흡을 선사한다. 로맨스적 감수성과 대결 구도의 긴장감까지 아우르는 캐릭터 수행 능력은 이야기를 위한 훌륭한 보호색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대사를 차단한 채 경쾌한 배경음과 슬로모션을 통해 연출한 오프닝 시퀀스의 난투극은 고조된 감정을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도 한껏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연출한다. 마치 춤을 추듯 멱살을 잡고 팔을 휘두르다 이내 바닥에 뒤엉키는 톰 윌킨슨과 폴 지아매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섬세하게 포착된다.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씬이지만 그 씬의 독자적인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더블 스파이>에 등장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산업스파이들은 삶의 본질보단 물질적 수단으로서의 일상에 속박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인과 닮았다. 결국 모든 작전은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봉착하고 결과적으론 물질적 실리가 없는 승패가 구성된다. 물론 그 뒤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건 패자들의 실체 없는 허무다.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껍데기 같은 일상에 복무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한방을 계획하는 산업스파이들의 위장된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토니 길로이는 결국 게임의 윤리를 빌미로 막대한 이윤을 부과하지 않는다. 오락적 자질을 뽐내는 동시에 작가의 가치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토니 길로이의 양심은 결코 변질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두리라. 완벽한 결말만큼 계산도 철저하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거짓이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거짓에 압도당해 쓸모를 잃고 그 빈자리마저 거짓으로 메워진다. 형체가 없는 거짓이 진실의 육체를 장악할 때 선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중동과 미국의 전쟁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끝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포스트 911의 시대에서 악의 축으로 구분된 이라크는 미군의 로켓세례를 얻었지만 그 반작용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발생시켰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고도화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기 위해 첨단의 반대편에 서는 방식을 터득했다. 도청이나 추적 자체를 막기 위해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으며 게릴라적인 대응으로 적의 정보를 분산시킨다. 정보력이 약화되면 적과 아군의 구분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적의 실체는 모호하고 동지에 대한 신뢰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진실은 백지장 차이로 옷을 갈아입고 소통의 부재는 총구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의 갈등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적진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CIA요원 페리스는 지뢰처럼 깔린 도처의 위협을 피해 테러리스트의 본산을 찾아내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현장에서 활약하는 페리스는 자신과 접촉하는 정보원들과 인간적 신뢰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무선으로 지령을 내리는 호프만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앞세우며 매번마다 페리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절친한 정보원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페리스와 호프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중동에서 고군분투하는 페리스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것과 달리 본국에서 생활하는 호프만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이라크와 미국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은 삶에 대한 이해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건 옳고 그름의 여부가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삶과 죽음도 그 지점에서 판별된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을 끌어내기 위해 평범한 건축가를 거물 테러리스트로 설계해 위장된 테러의 주범으로 조작해 미끼처럼 내모는 과정은 거짓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수긍할만한 결과를 위해 희생양이 동원되고 모종의 신뢰는 전략적 볼모로 채택된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분명 포스트 911의 텍스트를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초월해 개인적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가와 문화라는 프로파간다의 경계가 부딪히는 사이,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은 어느 한편의 실체 없는 명분을 지탱하기 위해 거짓을 품기 위한 실존적 육체로 투하된다. 생사의 기로를 넘으며 그 허상을 목격한 페리스는 결국 스스로의 진실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허상의 세계에서 탈출한다. 거짓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뛰던 말은 궤도를 이탈한다.
과감한 액션과 세심한 스릴이 거듭되는 <바디 오브 라이즈>는 생생한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박감과 달리 스크린의 표면에선 건조한 기류가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능동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정적인 무기력이 감지된다. 그건 영화가 묘사하는 그 세계를 향한 무기력과도 같다. 재활의 의지로 몸부림칠수록 진창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듯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은 그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암담할 따름이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그 익숙한 회의감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탄탄한 연출력과 두 주연배우의 녹록치 않은 연기가 감탄스럽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현실의 무게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