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몇 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대작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지켜본 관객이라면 한국인 스태프의 이름을 심심찮게 발견했을 거다. 할리우드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프로덕션과 스튜디오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출신 VFX 아티스트들은 적지 않은 수를 자랑한다. 이들은 한국 VFX산업의 잠재적인 자산이다. 그리고 지금 영화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불리는 <아바타>에서도 한국인 아티스트들의 손재주를 확인할 수 있다. 텍스처 아티스트(Texture Artist) 전병건을 비롯해 시니어 모델러(Senior Modeler) 장정민, 시니어 페이셜 모델러(Senior Facial Modeler) 이진우, 노응호, 모델러(Modeler) 이선진, 리드 라이팅 임창의, ATD 라이터(Assistant Lighter) Sean Lee, 모션캡쳐 에디터(Motion Capture Editor) 김기현그리고 시니어 애니메이터(Senior Animator) 박지영까지, 총 9명의 한국인이 그 역사적 작업에 손을 보탰다. 그 중 두 명의 아티스트를 소개한다.
외국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를 소개해달라.
전병건(이하 ‘전’):홍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6년에 샌프란시스코의 AAU(Academy Art of University)로 유학을 갔다. 웨타에 오기 전,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3편의 장편과 1편의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했다. 플레이스테이션 제작사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와 파라마운트 산하 스튜디오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다. 경력 초반에는 SNK, 액티비전, 소니 등 게임 시네매틱 분야에서 3-4년 일했고, 영화쪽 경력은 2003년부터 시작했다.
박지영(이하 ‘박’): ‘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전공했고 졸업 후, 인디 영화사에서 2D 키애니메이터(Key Animator)로 일을 시작했다. 많은 2D 애니메이터들이 3D 파트로 전향하던 시기였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3년 전,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준비한다는 공고를 보고 웨타 애니메이션 팀에 지원했다.
<아바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의 역할을 맡았나?
전: 2008년 11월부터 초반 8개월은 CG로 만들어진 캐릭터나 배경, 소품 등에 색상과 질감을 입혀주는 텍스처 아티스트(Texture Artist)로, 나머지 4개월은 완성된 장면에 조명을 더해 최종 이미지를 그려내는 조명 스텝(Lighting Technical Director)으로 일했다. 부서를 옮겨가며 일하다 보니 더욱 폭넓게 <아바타>의 제작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박:시니어 애니메이터(Senior Animator)로 참여했다.영화에 등장하는 동물과 식물을 살아 숨쉬는 생물체처럼 보이게 하는 일이다.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모든 동식물들은 직접적인 순수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탄생됐다.
할리우드의 제작 방식을 경험했을 때 특별하다고 느낀 바가 있었을 것 같다.
박:자본의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체계적인 프로덕션 파이프라인 구축됐으며 유능한 프로페셔널 아티스트들이 많다. 투자자본이 많은 만큼 새로운 기술개발 투자가 이뤄지고 그렇게 개발된 신기술들이 바로 영화에 활용된다. 특히 프리 프로덕션이나 기획 단계에 많은 공을 들여서 소프트웨어와 테크놀로지 개발을 진행하고 탄탄한 스토리 구성을 갖추는 등, 효율적인 프로덕션 계획을 철저히 이룬다. 덕분에 철저한 계획에 맞물려 능률적인 작업 환경이 완성되며 시간소비가 줄어든다. <아바타>도 제임스 카메론과 20세기 폭스가 몇 년에 걸친 준비기간 동안 ’Pace Fusion 3D Camera System’이라는 새로운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신기술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많다는 것도 할리우드 VFX산업의 강점이다.
한국VFX기술의 발전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나?
전: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규모가 적지만 최소한 자국 영화 시장이 있다는 환경적 조건과 함께 열악한 환경을 견뎌내고 현재까지 산업을 이끌어온 한국의 VFX 종사자들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하지만 비슷한 경제 수준을 지진 타국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기술이 특별히 월등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러시아에서 만든 <나이트 워치>(2004)나 <데이 워치>(2006)의 VFX수준이나 최근 전세계를 대상으로 <아스트로 보이>와 같은 풀 3D애니메이션을 제작한 홍콩의 사례도 있다.
박:한국영화 관계자들이 VFX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부흥 효과에 많은 관심을 가진 덕분에 해마다 VFX를 이용한 영화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고 덕분에 영화의 소재도 표현력이 풍부해지고 있다. VFX활용도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과거보다 이 분야를 공부한 전문 인력이 많아진다는 것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최근 한국 VFX 업체의 외국진출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전:한국 VFX업체의 해외 프로젝트 공동 작업과 해외 진출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고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적은 규모의 시장에서 국내 관객만을 대상으로 산업을 이끌어 나간다면 VFX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현재 할리우드 제작사에서는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할리우드를 벗어나서 많은 프로젝트를 제작하고 있다. 실력만 검증되고 영어로서 커뮤니케이션만 가능하다면 해외의 VFX나 애니메이션 수주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다. 문제는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가다. 한국은 자국 영화와 게임 시장이 존재하고 수준 이상의 전문 인력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하이엔드 제작 경험을 가진 인력이 부족하고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이 서툴다. 지금 VFX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미국의 수주를 받는 나라는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싱가폴, 인도와 같은 영어권 국가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운대 앞바다에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온다. 한낮의 망중한을 즐기던 피서객들의 즐거운 비명이 아비규환의 절규로 뒤바뀐다. 2009년, 대한민국 여름 극장가엔 쓰나미처럼 몰려든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해운대>는 국내 최초 재난 블록버스터란 타이틀 아래 천만 관객을 수장시켰다. 그 반대편에선 밑바닥 청춘들의 스키점프 도전기가 한창이었다. 제대로 된 시설 하나 없는 강원도 무주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는 다섯 청년들은 8백만 관객 앞에서 스키점프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보기 위해 상영관을 찾은 관객은 대략 2천만 명에 다다른다. 지난 해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은 총 1억 5천 6백만 명을 웃돌았다. 불과 두 작품이 지난 해 국내 관객의 10분의 1이상을 책임진 셈이다. 무엇보다도 두 작품의 공통점은 국내VFX기술, 그 중에서도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란 점에서도 이례적이었다.
<해운대>와 <국가대표>의 흥행 이전에도 한국영화에서의 CG활용 사례는 즐비했다. 전장의 참혹한 현장감을 스크린에 재현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스크린에 판타지의 세계관을 입힌 <중천>과 같은 대작들에서 CG는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한 몫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2007년, 국내영화 사상 유례없는 CG활용도를 보여준 <디 워>는 그 첨예했던 논란과 무관하게 하나의 선례가 됐다. 국내에 상영된 역대 개봉작 가운데 최고의 흥행 스코어를 기록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역시 CG를 적극 활용한 크리처 무비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처럼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스크린 너머에 허구의 이미지를 전시하기 위해 장착되는 특별한 비기로서 유용하다.
CG가 스크린에 무엇이든 불러낼 수 있는 마법의 램프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CG는 VFX(Virtual Effect)의 한 분야이며 영화 안에서 VFX기술의 역할이란 카메라에 포착될 수 없는 비현실적 광경을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덕분에 요즘 제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 배우들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로봇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아예 블루매트로 둘러싸인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으며 감정을 조율해야 한다. 영화의 결과적 이미지가 CG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작 블록버스터에서 더더욱 심화되고 있다.
점차 CG의 활용빈도가 높아지는 국내영화계에서도 VFX슈퍼바이저의 능력이 대두되고 있다. “<국가대표>에서 후반 30분을 위해 CG팀과 감독, 촬영팀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폭발적인 연출로 대미를 장식하면서도 관객에게 리얼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속도감을 살리면서도 악천후 상황에서 점프를 감행하는 드라마틱한 정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CG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국가대표>의 VFX슈퍼바이저를 담당한 EON디지털필름스의 정성진 실장의 말은 CG가 단순히 영화의 기술적 보강을 위한 장치 수준에 지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화에서 CG는 극적 흐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효과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촉매로서 기능한다.
<해운대>는 ILM출신의 VFX슈퍼바이저 한스 울릭을 믿고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백주대낮에 해운대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해야 할 <해운대>는 한국영화에서 전례 없는 기획이었고 그만큼 도박에 가까웠다. 국내에서 제작비 120억여 원을 들인 대작으로 손꼽히지만 방대한 스케일의 CG컷을 구현할만한 디지털 데이터량을 보장하기엔 터무니없는 예산이었다. 무엇보다도 CG작업 가운데 난이도가 가장 높다는 물을, 그것도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야 했다. 경험치가 없는 국내업체를 마냥 믿고 맡기기엔 무리수가 컸다. 심지어 제작사가 접촉한 유수의 해외업체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제작단가로 기대치만큼의 영상적 퀄리티를 보장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물 시뮬레이션 작업에 탁월한 결과물을 보여준 한스 울릭은 그 예산으로도 원하는 퀄리티를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결국 한스 울릭은 <해운대>에서 물 소스 작업에 집중된 전반적인 VFX슈퍼바이징을 전담했고, 국내 업체 가운데 모팩 스튜디오가 나머지 VFX샷을 만들고 합성하는 파트너로 선정됐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엔 호흡이 잘 맞았는데 뒤로 갈수록 일정 문제가 생겼다. 우리의 경험 부족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변동성이 강한 우리 현장의 요구에 대해 한스 쪽에선 원칙적인 논리로만 대응하다 보니 감정적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의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외국 슈퍼바이저의 작업 능력과 무관하게 문화나 환경 차이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발견됐다.
실제적인 결과물에서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드러났다. 한스 울릭은 ‘레벨 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이라는 고난도 기술을 <해운대>에 적용하겠다고 약속했다. 레벨 셋 시뮬레이션은 물입자의 상호관계를 물리적으로 계산해 연산반응을 만드는 방식으로서 실제 물의 연쇄적 반응까지도 구현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자되는 작업이라 할리우드에서도 활용빈도가 낮다. 실제로 <해운대>에 적용된 건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서페이스 디포밍은 출렁거리는 유사 이미지를 섬세하게 쪼개서 물표면과 비슷하게 그려내는 방식이다. 전자에 비해 유체의 움직임이 완벽하진 않지만 비용 대비 효과 안에서 탁월한 결과물이 출력된다. 미국에서 보내온 파이널 데이터는 기대를 온전히 실망으로 변환시킬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작업을 체크한 제작자와 투자자는 작업 과정 자체에 애초에 무리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개봉을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작업의 공정 과정을 완전히 뒤집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애초에 미국의 하청을 위한 파트너로 고용됐던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에게 <해운대> VFX를 지휘하는 전권을 위임했다. 결국 장성호 대표는 미국에서 기본 작업이 된 데이터 소스를 다시 받아서 전부 재작업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했다. 결국 640컷이 넘는 최종합성 작업에 두 달여 동안 매진했다.
장성호 대표는 말한다.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한번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다면 가능한 방식 안에서 지금보다 나은 퀄리티를 얻어낼 수 있었을 거다. 그것도 미국에서 사용한 예산의 절반 이하로도 가능했을 거라 본다. 다행히 결과물을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최소한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는 건 위안이 되지만 완성도에 있어서 결코 만족스럽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해운대>를 제작한 JK필름과 윤제균 감독은 심해를 배경으로 한 크리처 무비 <제7광구>를 기획 중이다. 현재 모팩 스튜디오는 JK필름과 함께 <제7광구>의 프리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기술보단 경험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기술을 적용했을 때 예상치 못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발견도 있었다. 국내 CG기술이 떨어지지 않다는 걸 확인했다.” 길영민 이사의 말이다.
과거 <괴물>의 크리처는 미국의 VFX업체 오퍼니지(Orphanage)가 구현한 것이다. 당시 크리처 무비는 한국영화에서 역시나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100억 규모의 작품들은 투자 자본의 너비만큼이나 손실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선택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 <괴물>에서 미국의 오퍼니지가 선택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 기인한 바다. 하지만 오퍼니지는 본래 ‘하드 서피스(hard surface)’라는 기계적 질감의 CG작업으로 유명했던 업체였다. 오퍼니지는 <괴물>을 통해 크리쳐 작업의 데이터를 획득했고 그 결과적 경험치는 온전히 오퍼니지의 자산이 됐다. 그런 점에서 <해운대>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JK필름은 한스 울릭과 계약을 체결하며 모팩 스튜디오에 기술 이전 조건을 명시했다. 결국 <해운대>의 결과적 데이터는 모팩 스튜디오의 자산이 됐고, 이는 곧 국내VFX기술의 질적 향상을 의미한다. 최근 전세계적인 화제작 <아바타>를 작업한 뉴질랜드의 웨타 디지털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을 통해 성장했다. 피터 잭슨은 영화시장조차 없는 자국의 VFX업체를 자신의 블록버스터에 참여시키며 세계 최고의 업체로 성장시켰다. 경험만큼 확실한 자산도 없다. 한국이 참고할만한 확실한 선례다.
단순한 신뢰만으로 대자본의 결과물을 맡긴다는 건 무모한 도전이다. 하지만 도전적 시도가 결국 보다 발전적인 여건을 이루기 위한 직접적인 통로가 된다는 건 진리다. 과거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인사이트 비주얼은 현재 강제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알려진 <마이 웨이>(가제)에 참여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당시엔 CG팀에 대한 강제규 감독의 신뢰가 낮았다. 그러나 그 후로 CG파트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선 보다 적극적으로 CG를 활용하려 한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이사의 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마이 웨이>의 관건은 로케이션이다. 현재 중국과 독일, 헝가리, 한국 등지의 로케이션을 계획 중인 제작부는 현지 촬영의 필요성을 논의 중이다. 현지 로케이션의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도 적절한 효과를 얻어낼 대안적 방안을 강구 중이다. 300억 짜리 대작이라지만 전쟁영화의 스케일을 구현하기 위해선 최대한 허리끈을 졸라매야 할 예산이다. 그만큼 CG의 역할이 중요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덕을 본 ‘매트 페인팅(Matt Painting)’도 적극적으로 쓰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하지 않고도 현장에 동원된 인원들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입력한 뒤 복사해서 편집해 넣는 기술로서 탁월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모던보이>처럼 세트를 짓는 소모적인 비용들을 매트 페인팅 작업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생한 시대상을 구현하고 제작비를 절감한 <모던보이>의 사례도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이런 CG기술의 발전이 보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능케 한다는 점을 주목할만하다. <해운대>나 <국가대표>를 비롯해 최근작인 <전우치>까지, 근래 몇 년 사이 한국영화는 보다 풍부해진 장르적 시도나 소재적 접근을 꾀하는 중이다. CG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인해 장르적 도전이 탄력을 얻고 있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유효하다. 2008년 제작된 <태왕사신기>나 지난해 제작된 <아이리스>와 같은 드라마는 대작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장르물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결과적으로 CG기술의 발전과 함께 한국영상 콘텐츠의 보폭이 넓어지고 동선이 자유로워졌다. 그만큼 CG의 효율적인 활용에 대한 고민이 중요해졌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체질적으로 CG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차가 뒤집히는 카체이싱을 찍을 때, 액션 팀이 직접 연출할 것인지, CG팀이 그려낼 것인지, 그 상황에 어울리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작비 여건 안에서 보다 안정적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비용을 더 들여서 CG를 하자는 게 아니라 어느 부분에서 CG가 정말 필요한지 선별하는 게 중요하다.” 무엇을 포장할 것인가보단 무엇을 담아내고 있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셈이다.
<해운대>나 <국가대표>의 흥행은 고무적이다.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작의 성공으로 또 다른 작품이 기획된다면 이에 참여한 업체는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물론 경계해야 할 사안도 존재한다. “과거에 CG를 전문적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그때마다 작업 요구량이 확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할리우드 수준에 따라 국내 관객의 눈높이는 높아지는 반면 제작 여건은 여전히 낙후됐다. 결국 그런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 외면당하면 시장이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받게 된다.” 단지 기술적 성과만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대변할 순 없다. 열악한 시장의 조건 안에서 쥐어짜듯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국내업체들의 여건은 항상 최선의 결과를 바라는 시장의 기대치에 대한 발목을 잡는 셈이다. 그만큼 업체들의 목을 조이는 열악한 국내 환경의 개선도 급선무다.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저예산에 가까운 한국영화 제작비 안에서 VFX업체에게 돌아가는 몫은 언제나 열악하다. 정당한 요구를 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과거 <집결호>를 연출한 중국의 펑 샤오강 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국내 스태프들과 일하길 원했다. VFX를 담당한 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CG팀을 제외한 VFX팀이 <집결호>에 참여했다. “그 당시 우리가 너무 많은 작업에 매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상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 이사의 설명이다. 국내 VFX업체들은 대부분 동시다발적인 작업을 진행한다. 3~4편에 가까운 국내 작품의 작업을 함께 진행한다. 예산이 빠듯한 한국영화의 현실에서 최대한 많은 작품의 작업을 진행해야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기본금이라도 마련되기 때문이다.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만큼 업무량은 늘어난다. 할리우드나 해외의 유망한 VFX회사들은 전문화된 인력들의 철저한 분업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에 반해 국내 아티스트들은 멀티 플레이어로서 기능하지 않고선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덕분에 전반적인 작품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을 얻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분각을 다투는 작업 안에서 한 사람이 두 공정에 관여한다는 건 분명 비효율적이다.
현재 국내VFX업체들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성장의 한계가 분명한 국내 영화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끼리의 과다한 경쟁은 공멸을 자초하는 길이다. 결국 공존을 위한 방안으로 해외 시장 개척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문화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주최로 한국을 대표하는 VFX업체 7곳이 AFM(American Film Market)에 공동부스를 차리고 한국VFX산업을 홍보하는 자리를 가졌다. “AFM에서 미국 클라이언트나 프로듀서를 만나서 <국가대표>를 보여주면 항상 제작비를 물었다. 그리고 항상 답변에 놀라곤 했다. 할리우드의 기준으로 보자면 <국가대표>가 수 백억을 가지고도 찍을 수 없는 영화다. 한국의 시스템을 놀라워한다.” EON디지털 필름스 정성진 실장의 변이다. 이에 앞서 해외 영화의 후반작업을 수주한 사례도 있었다. DTI픽쳐스, 매크로그래프, 풋티지는 <포비든 킹덤>의 후반작업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DTI픽쳐스의 양석일 실장은 말한다. “<포비든 킹덤>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캐나다나 유럽 쪽 프로덕션 업체가 그 수주에 참여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가격 경쟁력 차이도 크지 않았다. 무조건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된 건 아니다. 전략적으로 잘 대응할 필요가 있다.” 하루 아침에 할리우드의 대작에 국내업체가 참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국내업체가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 개봉을 앞둔 <워리어스 웨이>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모팩 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도 이와 같이 말한다.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하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조금씩 열릴 수 있다고 본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되레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고 평판이 떨어지면 오히려 되돌리기가 힘들어진다.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앞선 두 사람의 말처럼 해외시장 개척은 국내VFX산업의 향방을 결정할만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보다 착실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의 협조도 중요하다. 자생적인 발판을 마련하기 이전에 산업적인 구조의 불합리를 개선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지난해 CG산업협의회를 설립한 업계는 이를 통해 정부 측과의 소통 창구를 마련하고 현실적인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전했다. 그 결과 국내외 프로젝트에 참여한 업체 가운데 제작비용을 지원하는 정책이 마련됐고, <국가대표>를 비롯한 몇몇 작품이 혜택을 받았다. AFM의 부스 참여도 이런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협의회가 업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통로이자 보다 현장을 배려하는 정책 반영을 가능케 하는 자문 기구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와 호주, 영국, 싱가폴 등 해외에서는 벌써 우리보다 먼저 자국의 CG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한국의 VFX업체는 정부 혜택을 받은 적 없다. 다른 국외 업체와 비교했을 때 20미터 뒤에서 뛰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부의 변화는 고무적이다.” 정성진 실장의 의견이다. 지금까지 한국CG산업은 열악한 토양 속에서도 열정과 노력으로 싹을 틔운 인재들의 피땀을 먹고 자라왔다. 이젠 그 희생으로 일군 토양에 물과 비료가 필요한 시점이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냥 식칼 용도로 사용되면 보검으로서 의미가 없다. 사용자가 그 가치를 가장 많이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장성호 대표의 말처럼, 국내CG기술의 발전적 성과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그 기회는 단지 개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발전을 이뤄온 개개인의 노력에 대한 산업적 이해가 절실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영상산업의 새로운 밑그림을 CG로 그려나가겠다는 야심도 그때부터 선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