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전례가 있음에도 서양의 신문물과 과거 조선의 관습들이 공존하는 20세기 초 일제치하 경성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변화와 정체가 혼재된 과도기의 이미지는 시대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희석시키며 장르적 발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그릇임에 틀림없다. 탐정추리극이라는 타이틀을 자신만만하게 내건 <그림자 살인>은 살인의 배후를 쫓는 전형적인 후더닛 구조의 미스터리로 시작된다. 인과관계의 나열로 놓고 보자면 플롯의 개연성은 인정할만하다. 다만 내러티브의 구조가 미숙하다.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까지 동원하며 너비를 벌리지만 수집된 양식을 펼쳐 보이기 급급할 뿐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동시에 적당한 수위의 장막이 걷히면 정답을 유출시키는 이야기는 영민한 편이 아니다.

 

이야기보다도 캐릭터가 눈에 띈다. 그러나 캐릭터들도 장르적 매력에 기인하는 건 아니다. 배우들의 표현력은 나쁘지 않다. 캐릭터 설정의 문제다. 애초에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다. 사건에 개입되는 당위부터 확실치 않은 캐릭터들은 역할에 대한 설득력을 명확하게 차려 입지 못한다. 추리물을 표방했지만 야심은 다른 쪽에 걸쳐 있다. 시대적 착취에 대한 응징을 마다하지 않으며 직업 윤리와 고위층의 도덕적 해이마저 도발하는 후반부는 전반부와 분위기가 판이하다. 말미에 다다라서 반복되는 클라이맥스는 도돌이표처럼 권태롭기도 하다. 어쩌면 동일한 얼굴로 분열된 양면성의 이미지야말로 <그림자 살인>이 노출하고자 하는 핵심적 이미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르와 역사 의식이라는 이중주 사이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는 <그림자 살인>은 시대에 대한 딜레마를 뛰어넘지 못한 장르물처럼 보인다. 혹은 뛰어넘을 마음이 없었거나.

Posted by 민용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