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건, 의무의 짐을 더는 것이 아닌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민주주의란 과실을 누리기까지 긴 고난의 역사를 전제로 해야 했다는 걸 이 땅에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간과하고 있나 봅니다.

정치가 나날이 자기 목적을 간과하여 권력화되고 민중의 터전을 밑천으로 투기행각을 벌이는 현실에서 50%가 되지 않는 투표율은 그 사항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반증이겠죠.

혹세무민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자본의 논리에는 민감해 재테크를 논하고 집값을 걱정하는 이들이 그런 걱정을 야기시키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유난히 둔감해지는 형국입니다.

지금은 지성이 중요한 역할을 해내야 할 시기인 까닭은 그 떄문이죠. 행위로서 투쟁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건 현실에 대한 첨예한 지적을 통해 그 행위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성세대들의 정치적 폐단에 당당히 맞섰던 건, 지금의 386세대들, 즉 그 시대의 젊은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서 젊은 지식인들은 지나치게 혈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푸념은 할지언정, 그 푸념의 근원에 대해서 투쟁하긴 회피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유신 시대냐, 계엄령이라도 선포했냐, 화염병이라도 던질까, 라고 깐죽거린다면 물론 그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 유신 시대도 아니고, 계엄령이 선포되지도 않았으며, 화염병을 던질 수 없는 시대이기에 더욱 지성의 날을 세워야 한다고 강변할 것입니다.

과거에는 시야적으로 확보되는 해악적 움직임의 형태가 존재했지만 지금은 형태가 아닌 관념으로 그것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당신의 눈을 가린 채, 혹은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와중에도 사회적 질서와 관념이 기이한 구조로, 어떤 충돌도 없이 쉽게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죠.

또한 과거처럼 행위를 통제하는 시대가 아니라 사고를 통제하는 시대이며 이로써 다양한 무의식의 발현을 쉽게 규합해버리는 질서의 야합적 통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행태가 만연한 시대적 속성은 어디로부터 출발했을까요.

다양성을 배제하고 경쟁을 중시하는 첨점 쟁탈의 교육을 거친 세대는 그 시스템의 적용을 벗어나서도 끝없이 트랙 위를 달리는 것을 삶이라 여기며 미련하게 앞만 보고 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손에 쥔 것에 만족하기보단 더 많은 것을 쥐어야만 행복할 것 같다는 관념은 어디서 왔을까요. 대체 우리는 왜 경쟁의 도가니에서 한시도 자기의 삶을 향해 뒤돌아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큰집과 좋은 차, 명품이 성공의 척도가 된 걸 왜일까요.

더 쉽게 예를 들어서 어째서 회사원들은 퇴근시간이 돼서도 상관의 퇴근 여부를 눈치껏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좀 더 나아가서는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시위나 집회 앞에 불법이라는 수사가 따라붙는 걸까요. 어째서 합법적인 시위는 좀처럼 보기 드문 걸까요.

 

우리 사회는 교육을 빙자해서, 혹은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그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관념을 반복적으로 세뇌시켜왔습니다.

서울대와 연고대에 가는 학생을 우대하던 학창시절을 거쳐, 삼성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의사, 검사처럼 자 돌림 직업에 호의를 베푸는 과정을 반복해서 관찰하다 보면 결국 삶의 우대를 누리기 위해서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야 한다는 논리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사람이 올라서기엔 첨탑의 꼭대기는 너무 비좁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 구조에서 열패감을 안고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 구조는 약자의 패배감을 깊게 각인시키기 때문이죠. 결국 그 구조상에서 아래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자신이 사회적 주춧돌에 불과하다는 타성에 쉽게 수긍하게 됩니다.

MB의 실용주의가 메시아의 전령처럼 작용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파이의 확대가 더욱 많은 첨탑을 세울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한 경우의 수로서 정함수의 그래프처럼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어떤 반론의 여지가 없는 숭배의 대상이었을 테니까요. 당신에게 이 사회가 현재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있다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건 지독한 우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삶의 질을 위한 발전을 거듭해왔습니다. 수출무역국 10위권의 나라에 사는 국민이 OECD가입국 중 자신의 삶의 질을 최악으로 여기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모두가 다 루이비통을 메고 다녀야만 우리는 행복할까요? 돈 없어도 해외 유학 갈 수 있게 해주는 이명박의 선언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일까요?

당신이 어리석지 않다면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욕망을 좇는 개인들이 망상이 뭉쳐낸 신기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정욱을 뽑는다고 해서 노원구 주민들이 77장의 삶을 살 수 없음에도 그에게 한 표를 행사한 어떤 들은 분명 자신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권리를 내준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만약 노회찬을 뽑았다면 그건 사표일까요? 적어도 당신이 던진 한 표가 당선에 유효한 표가 안됐을지 몰라도 그 투표의 의미까지 퇴색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 한 표가 의사를 반영한 행위이기 때문이죠. 투표율 46%의 당선자와 투표율 70%의 당선자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상대를 찍는 움직임이 한 표라도 늘어난다면 견제 당하는 이의 심기는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의 한 표가 당선자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 한 표는 분명 당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작동합니다.

 

만약 당신이 투표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의사를 반영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건 결국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당신이 책임을 물을 권한이 없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그건 결국 어떤 투쟁 심리를 잃어버린 온순한 사자를 보는 것마냥 재미없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권력을 견제하는 건 그 권력을 추대한 이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투표율이 46%가 나오든, 100%가 나오든, 결국 누군가는 권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46%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와 100%의 견제를 의식하는 이의 본능은 완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목소리를 높이기 위한 정당성은 그 자체로 상실된다는 셈이죠. 결국 무효표를 던지는 것과 달리 투표권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체념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죠.

 

결국 그런 상황은 당신이 알게 모르게 루이비통을 메는 것이 성공의 척도라는 기준을 고착화시키는데 유용하게 작동합니다. 그런 식으로 권위를 거머쥔 이들은 자신이 누린 호사를 그저 자기 승리로 기만할 따름입니다. 결국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 못한 채 쉽게 자리를 얻은 이들은 스스로가 의무를 위한 존재가 아닌 권리를 누리는 존재로 인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타인을 위한 헌신보단 자신을 위한 투자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민생은 셀프로 여기고, 골프에 매진하는 사태에 육박하는 셈이죠. 지나친 비약이라고요? 성추행까지 일삼은 의원이 관성적으로 재선되고, 정치적 능력이 미약해 보이는 엔터테이너가 유명 당사 메이커를 메고 나와서 당선되고, 우익을 빙자하며 역사를 왜곡하거나 한국에서 열린 자위대 기념행사에 당당히 참석하며 역사적 의식조차 무시하는 이들이 당선되는 세태 속에서 우리가 기대할 것은 뭘까요. , 이렇게 살아도 난 되는구나, 라는 관성은 과연 배제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과거를 뉘우치거나 자신의 몰염치를 반성할 계기란 게 과연 있을까요? 결국 이는 어떤 짓을 해도 첩탐에 서면 된다는 논리를 방조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계승될 따름이죠.

이건 짝퉁이라도 루이비통을 메고 거리를 활보해야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거리의 모습과도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야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이 바로 이 사회 구조의 맹점에서 흘러나오는 착시현상이며 그것이 현상 유지에 걸맞은 삶의 질 찾기를 포기시키는 원인에 가깝습니다. 당신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정치적 공작에서 비롯된 사회 제도의 허술함을 떠받치기 위해 지독하게 무리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너무 오래 믿어왔습니다.

 

선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도장 찍고 유세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이 척박해지는 건 지금까지 우리가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관성적으로 삶을 그러려니 방치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학창시절에 머리를 짧게 깎는 것에 대해 반발할 수 없었던 구조가 우리의 사회적 행태와 어떤 식으로든 직결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이유 있는 항변을 반항으로 몰아붙이는 구조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줘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무기는 투표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말 뽑을 사람이 없어 무효표를 던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표가 나머지 56%를 차지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나 당선됐네, 라고 노래를 부를까요?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요? 굳이 루이비통을 얻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자본의 논리로 재편된 계급적 무의식 속에서 열등감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에게 실용주의란 많은 돈을 버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식 교육을 위해 거액의 학비를 보태야 되는 사회 구조를 척결하는 것입니다. 신기루를 없애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신기루를 볼 수 있는가라는 전제가 따를 뿐이죠. 당신은 그 전제 앞에 놓여있습니다. 한번의 기회는 지났고, 앞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겠죠. 그 때까지 정신 놓지 말고 앞 똑바로 보세요. 그리고 다음에는 꼭 투표하세요. 누구를 찍던 간에, 정말 실용적인 투표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당신이 젊다면 더더욱 움직이세요. 이건 당신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 당신 자녀의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허리 휘지 않기 위한 일이자 정당한 대가를 얻기 위해 합법적으로 시위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중요한 의사 표현일테니까.

 

우리가 지금 현실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의료제도 민영화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100% 공공 의료보험의 확대적용을 희망하는 쪽이라야 옳습니다. 그게 바로 현실에서 당신의 한표가 절실해야 할 가장 충분한 이유이기도 하죠.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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