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과도한 방 구조개혁 사업에 몰두한 관계로 중천에 해가 기울만한 시간에 눈을 떴다.

밤을 먹고 컴퓨터를 켰다가 투표율 30%대가 어쩌고 하는 뉴스를 봤다. 그래, 가야지. 갔다. 도장 찍고 왔다.


투표소는 한산했다.

빌어먹을 투표소 위치를 잘못 확인한 탓에 뱅 돌아서 엄한곳을 들렸다가 집 옆에 있는 투표소를 겨우 찾았다. 5분 남짓 거리를 30여분에 걸쳐 갔다. 빌어먹을.

그래, 비도 오긴 하지만 나름 산책도 하고 좋다, 이런 기분으로 투표소를 들어섰다.


사람이 없었다. 썰렁했다.

투표용지를 얻기 위해 신분 확인을 하는 곳에는 네 분의 어른이 앉아계셨는데 그 중 한 남성 분께서 옆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이 정도면 오늘 개표는 10시도 안되서 끝나겠는걸.


투표를 한뒤, 집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다시 방정리를 했다.

언제부턴가 내 책상 두개를 지배하며 탑을 쌓았던 잡지들을 모조리 처분했다. 덕분에 내 책상은 간만에 안식을 얻었다. 책상 서랍에 있던 불필요한 잡동사니들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덕분에 쓰레기를 버리러 부지런히 대문을 출입하는 수고가 있었지만 홀가분했다. 두개의 탑을 무너뜨린 반지원정대의 마음이 이토록 후련했을까.


버리는 것도 능력이라고, 가볍게 사는 것도 나름의 묘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무거웠던 방이 가벼워졌다. 나름 효율적인 공간 구성이 가능해졌다.


인터뷰 마감을 위해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한나라당 과반석 이상 확보. 원래 예상했던 일이다. 졸속같은 민주당이 대세를 엎기엔 역부족이리라 확신했다. 게다가 민주당 따위는 한나라당과 함께 개밥으로 주기 딱 좋은 당이니까, 기대하고 싶지도 않다.


까놓고 말하자면 난 비례대표 13번 진보신당을 찍기 위해 투표소에 들렸다. 진보신당은 득표율 3%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난 지금 조금 슬프다. 한나라당 메이커를 달고 나온 듣보잡들, 게다가 유정현이라는 얼치기 마저도 당선이 되는 시국에서 진보신당은 3%의 득표율도 얻지 못했다.


이쯤되서, 한마디 하련다.

만약 당신이 오늘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 있어서 투표를 할 수 없었건 말건, 알바는 아니고.

만약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었건 안 찍었건 투표용지를 만져보지 못했다면 세상 어쩌고 지껄일 생각마라.

난 정치 따위는 관심없어서, 어차피 그놈이 그놈 아냐?

이딴식으로 쿨한 척하려거든, 조까라 마이신이나 쳐먹고 해외 이민 가던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판단할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인정해라. 세상에 염세적이라서, 혹은 무관심하다는 것을 자랑처럼 떠벌리지 마라. 당신은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을 방관하고 있는 관념의 아류일 뿐이다.


대놓고 말해서 당신은 자격이 없다. 월드컵 4강 때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호프집에서 건배하는 것이 애국심이라 착각하고 투표날을 4년 혹은 5년 마다 돌아오는 휴일 정도로 생각한다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아가리 닥쳐라.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그럴 자격없다. 그대가 나와 친한 누구더라도 결코 그럴 자격없다. 그러니 자격없으면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지켜보고 반성하고 느껴라.
당신은 한나라당 과반수에 찬조하기 위해 한표를 던진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해라. 기권도 의견행사라고 주장하고 싶거든 투표장에 가서 무효표를 던져라. 그게 기권이다. 당신의 호사스런 방관을 의미있는 기권으로 빙자하진 마라.
인정해라. 그리고 앞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 잘 봐라. 다음에 투표를 하던가, 말던가. 그리고 잘 결정해라. 당신의 젊음이 무관심의 관성에 빠져 자신을 궁지로 몰아가는 세상의 풍토에 뒤늦게 푸념하지 않길 바란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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