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나

도화지 2014. 11. 12. 03:36

그러니까 고2때였다. 학교를 다녀오니 집안 곳곳엔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어머니께선 집에 커튼을 쳐놓으시더니 절대 걷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었는데 문이고 창이고 시시때때로 빚쟁이들이 찾아와 두들겨댔다. 학교를 가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학교를 다녀오니 어머니께선 약수터에 들고 다니던 물통을 내게 두 개 쥐어주시더니 당신도 두 개를 들고 앞장서셨다. 아파트의 공용 수도에서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담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수도가 끊겨있었다. 그 뒤로 전기가 끊겼고, 가스가 끊겼다. 촛불을 켰고, 휴대용 버너로 밥을 지었고, 욕조에 채운 물로 나도 씻고 쌀도 씻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라졌다.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40평 대의 자가 아파트는 15평 남짓의 월세 단독 주택으로 쪼그라들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나는 당신이 미워졌다. 언젠가 나와 어머니를 버린 당신이 보란 듯이 잘살면서 당신을 한없이 비웃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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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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