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고2때였다. 학교를 다녀오니 집안 곳곳엔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어머니께선 집에 커튼을 쳐놓으시더니 절대 걷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었는데 문이고 창이고 시시때때로 빚쟁이들이 찾아와 두들겨댔다. 학교를 가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학교를 다녀오니 어머니께선 약수터에 들고 다니던 물통을 내게 두 개 쥐어주시더니 당신도 두 개를 들고 앞장서셨다. 아파트의 공용 수도에서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담아서 집으로 걸어왔다. 수도가 끊겨있었다. 그 뒤로 전기가 끊겼고, 가스가 끊겼다. 촛불을 켰고, 휴대용 버너로 밥을 지었고, 욕조에 채운 물로 나도 씻고 쌀도 씻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라졌다. 결국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40평 대의 자가 아파트는 15평 남짓의 월세 단독 주택으로 쪼그라들었다. 아버지는 없었다. 나는 당신이 미워졌다. 언젠가 나와 어머니를 버린 당신이 보란 듯이 잘살면서 당신을 한없이 비웃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스물 두 살 무렵이었다. 연락이 왔다. 아버지라고 했다. 나는 항상 당신이 눈 앞에 나타나면 해주겠다며 세상에서 가장 못된 욕을 실탄처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당장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만나기로 했다. 만났다. 고속터미널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멀리서 나타난 그의 얼굴이 내 마음을 긁었다. 그 몇 년 사이 세월을 한껏 머금은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얗게 샌 머리엔 노인의 기미가 역력했다. 잠시 말이 없었고, 잠시 말이 있다가도 다시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봉투를 건넸다. 옷이라고 했다. 그리고 별말이 없이 헤어졌다. 다시 연락하자고 했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풀어보니 옷이 있었다.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하나 같이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옷들 사이에서 당신의 마음이 보였다. 나는 그 옷을 보며 당신을 향해 뱉어주리라 생각했던 욕을 그제서야 뱉어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당신을 미워한다는 일이 내 마음을 할퀴는 일임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해서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기로 했다.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등지고 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살다 보니 살아졌고, 살게 됐다. 그리고 결혼도 하게 됐다.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아버지를 모실 필요가 없다는 건 내겐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어떤 식으로든 알려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아버지와 연락을 하곤 있었다. 전화를 했다.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결혼식은 하지 않을 예정이니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다. 청계천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의 아내와 함께 청계천 광장으로 나갔다. 길을 건너는데 저 너머에 그가 서있었다. 꾸벅 인사를 했다. 아내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언가를 건넸다. CD라고 했다.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 CD라고 했다. 전원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베토벤 9번 교향곡 ‘황제’를 주겠다고 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클래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의 클래식 CD를 듣곤 했던 기억이, 문득 났다. 나는 말을 잃었다가 다시 찾다가 잃었다. 그래서 거듭 하늘을 봤다.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어떤 시간들이 자꾸 눈으로 올라오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별 한 점 보기 드문 새카만 밤이었다. 그 새카만 밤 어딘가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그냥 하늘을 향해서 말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부디 건강하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나는 CD를 듣다가 조금 울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게 아버지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단어이고, 그 어떤 시절이다. 되돌릴 수 없다. 더 이상 살이 차오르지 못해서 잘라내야만 하는 상흔이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안간힘을 써서 이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지난 날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와도 이별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도하기로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이 잘 되길 바란다.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해서. 부디 그렇다. 당신의 삶도 ‘전원’이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