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time loop 2009. 5. 13. 01:07

내가 커트 코베인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가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한때 나는 서른이 넘을 즈음, 그러니까 어린 놈이 할만한 막연한 단상 수준으로 젊은 시절이라고 생각하는 20대가 지나기 전에 뭔가 대단한 걸 이루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어려서, 생에 대한 집착 따위는 쿨하게 씹어먹을 정도로 담배를 피워대던 고삐리 시절에 그랬단 말이다. 어쨌든 이제 10년 넘게 피웠던 담배도 끊었고, 그래선지 그 때와는 생각이 많이 변한 것 같다. 어쨌든 난 지금 커트 코베인보다 오래 살고 있고, 20대에 딱히 이룬 것도 없으니 죽기엔 억울하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시저처럼 30대 문턱을 넘어서 20대에 이룬 것이 없다며 눈물을 흘릴 리야 있겠나. 어쨌든 난 확실히 범인으로 늙어가고 있구나.

 

생일이 지났다. 공일오비가 5 12이라는 노래도 불렀다는 걸 노래방 책자에서 보고 의기양양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무덤덤하게 생일을 보낸다. 그래도 오랜만에 생일이라고 축하한다며 전화해주는 친구도 있고, 문자를 날리는 친구도 있고. 여기저기 스팸문자처럼 날아드는 회원 관리 생일 축하문자 서비스는 성가시지만 그것만 빼면 나름 편안하고 훈훈한 생일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제 기자시사를 놓친 탓에 오늘 저녁에서야 <터미네이터>를 보고 나오다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일념으로 극장 앞에서 케이크를 들고 날 기다리며 선 여자친구와 마주치니 행복하더라. , 이래서야 30대에 죽을 수 있겠나. 커트 코베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싶었다.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위인전에 오를만한 사람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소소한 기쁨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뽀뽀도 해주면서 남한테 민폐끼치지 않고 똥칠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나이까지 건강히 살다가 잠든 듯 죽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할 거 같다. 대단하진 않아도 나쁘지 않았던 28번째 생일이 또 그렇게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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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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