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에 점이 있어서 점순이라 불렀던 어미랑 닮은 무늬를 지니고 있던 주먹만한 아이는 점점 어미에 가깝게 자랐다. 하지만 어미와 달리 언덕에서 올려다 보이는 좁은 난간으로 뛰어 오르지 못해 항상 난간 아래 조그마한 돌바닥에서 위를 올려다 보며 울곤 했다. 난간으로 올라와 밥을 먹지 못하는 새끼를 위해 생각해낸 것은 캔을 까서 포크로 잘라 투척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조준을 잘못해서 머리에 맞기도 하고 떼굴떼굴 굴러 떨어져서 새끼가 언덕 아래로 쫓아 내려갈 때마다 '아이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캔만 먹을 수 있는 이 아이를 보고 깐돌이라 불렀다.
깐돌이가 보이지 않은 건 이제 그 흔적이 겨우내 밀려간 지난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깐돌이에게 주기 위해 사놓은 캔이 겨울 내내 그 자리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종종 근심했다. 괜찮을까. 끊임 없이 찾아오는 깐돌이의 어미인 점순이를 보며 가끔 물었다. 네 아이 어디있니. 그 겨울이 지나는 동안 서서히 걱정도 묻혀 갔다. 가끔씩 더해가는 일상의 지층 어느 단면쯤에 있는 그 걱정을 더듬어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 망각했고 떠올리지 않았지만 고양이밥을 줄 때마다 나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 아이를 생각했다. 잘 있으려나.
난간으로 뛰어올라온 아이를 보며 나는 별스럽지 않게 창가로 다가가 밥이 있나 확인했고 창을 열었다. 봄이네. 봄이 왔다. 그리고 점순이라 생각했던 그 아이를 빤히 보았다. 점순이가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얼굴을 한참 보며 기억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건져 올렸다. 너 깐돌이니? 나름 2년 정도 밥을 챙겨주다 보니 눈썰미가 생겼다. 그래도 실험을 하기로 했다. 점순이는 캔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캔을 까주기로 했다.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캔을 먹었다. 창문 안으로 들어와 기웃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안전한 거리를 보존해주는 한에서. 어쨌든 맞았다. 깐돌이였다.
녀석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 사이 팔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쯤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을 물었다. 뭐했어? 더 줄까? 밥도 줄까? 그렇게 신이 났다가 난데 없이 눈물이 나서 흐느꼈다. 나는 어쩌다 보니 광장에 서있었다. 그 광장에서 자식을 잃은 채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절규하는 어떤 어미 아비들을 떠올렸다. 눈물이 그치니 밑바닥에 쌓여 있던 화가 조금이나마 씻긴 기분이었다. 마치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아이였던 것마냥 고마웠다. 돌아와 줘서. 제법 잘 자라줘서.
깐돌이는 까준 캔을 잘 먹고 난간을 서성이다 창문 안을 잠시 기웃거린 뒤 사라졌다. 가끔은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위로를 자연으로부터 얻는다. 위로가 됐다. 4월의 봄은 다시 찾아왔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다. 살아갈 것이다. 고양이캔도 주문할 것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음악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신을 울리지 않을 거다. 그것이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만든다.
<인사이드 르윈 Inside Llewyn Davis>은 제목 그대로 르윈 데이비스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작)는 밥 딜런이 스스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하며 헌사를 바쳤던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 데이브 반 롱크를 모티프로 기획된 허구의 인물이죠. 영화 역시 전기적 실화와 무관한 허구의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한 분야에서 나름의 족적을 남긴 인물을 모티프로 기획된 영화라니, 무언가 대단한 의미나 성찰을 기대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인공인 르윈 데이비스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나 성찰을 남길만한 영화나 인물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런 기대감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사이드 르윈>은 공갈빵 같은 영화란 말이죠.
모든 이의 삶이 그리 대단한 무언가 일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고요. 그렇다고 하여 어떤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영화적인 관점에서 큰 울림을 준다거나 대단한 여운을 남길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만한 인생은 몇이나 될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관점에서 영화가 될만한 삶은 드물 겁니다. 놀랍게도 <인사이드 르윈>은 특별한 의미나 성찰을 동원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을 스크린에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건 삶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의미나 성찰로 가닿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그저 관찰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영화적인 감상이 될 수 있음을 설득합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 삶을 위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객석에 앉은 어느 관객 또한 그런 의무감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영화 속의 르윈 데이비스에게선 어떤 낭만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음악이 전부인 남자입니다.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인생의 의미로서도 말이죠. 하지만 그는 음악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할 만큼 음악 그 자체를 사랑해마지 않는 인물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으로 쉽게 타협하는 인물도 아니죠. 때론 음악에 속박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운명이라기 보단 지금 당장 그가 해낼 수 있는 무언가일뿐입니다. 단지 그것이 그에게 대단한 성공을 안겨주지 못하고, 그 스스로도 그것을 이용할 만큼의 절실함을 갖고 있지 안다는 것이죠. 게다가 내면적으로 성숙한 인물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지만 필요 이상의 의무감을 껴안으려 하지도 않아요. 고로 관객은 그 인물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을지언정 대단한 애정을 갖진 못할 겁니다. 덕분에 스크린과 객석은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감정적으로도 철저하게 분리돼있습니다. 영화적 세계를 향한 ‘관찰자’라는 거리감 안에 머무르도록 만든다는 말이죠. 아이러니하지만 이것이 이 영화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듭니다. 그 삶에 어떤 애정이나 연민을 품을 필요도 없다는 말이죠. 이러한 감상의 방식이란 대단히 놀라운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윈도 너머로 바라보듯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감상이 텅 비어있는 것 같지만 허무하지도 않습니다.
코엔 형제의 첫 번째 음악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면서 단 한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평범했다고 말하는 몇몇 코미디물도 말 그대로 ‘그들의 필모그래피 안’이기 때문에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죠. <인사이드 르윈>은 대단한 이야기꾼이기에 가능한 음악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큰 울림을 남기기 용이한 음악영화에서 이토록 그저 인물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사연의 굴레를 관찰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은 한편으론 대단한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요. 대구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야기부터 전체적인 내러티브의 진행 자체 면에서도 느슨해지는 면이 없습니다. 자극적인 진폭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보는 내내 얕은 흥미를 놓치지 않습니다. 삶의 리듬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예측불가능한 일상을 파편적으로 나열하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치고 빠지듯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사라집니다. 이를 관찰하고 경험하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며 기대 밖의 위트를 곳곳에서 건질 수도 있죠. 특히 수다스러운 존 굿맨과 지극히 말이 없는 가렛 헤드룬드가 등장하는 중반부의 드라이빙신은 이 영화에서 액자 구조라고 여겨도 될 정도로 흥미로운 여정 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도 음악영화로서의 가치가 대단한 작품입니다. 대단히 훌륭한 넘버가 삽입된 동시에 그 훌륭한 넘버들을 적재적소에 절묘하게 삽입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든 넘버는 실제로 촬영 현장에서 녹음된 라이브 버전이라고 합니다. 영화적인 현장감을 실제적인 체험으로서 감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실제로 이 영화에선 ‘좋은 노래’ 그 자체를 전달하고자 하는 야심보다도 노래하는 인물의 표정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보다 집중하는 인상입니다. 기타를 치며 ‘Hang me, oh hang me’를 부르는 르윈 데이비스를 근접 촬영하는 도입부부터 노래하는 표정과 연주하는 풍경을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오스카 아이삭이 연기한 르윈 데이비스를 비롯한 배우를 섭외할 때 연주와 노래가 뛰어난 배우를 염두에 두고 캐스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는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언애듀케이션>, <셰임> 등의 작품에서 감미로운 보컬 실력을 뽐낸바 있는 캐리 멀리건이 함께 한 넘버 ‘500 miles’ 또한 이 영화로부터 건질 수 있는 백미 같은 화음입니다. 두 배우 역시 음악영화로서의 완성도에 기여하고 있고요.
한편으론 애묘가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고양이를 정말 자연스럽고도 사랑스럽게 포착했더군요. 촬영 감독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게다가 가장 극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하기도 하고요. 저로서는 이것만으로도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도 평소보다 너무 길어져 버린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