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빈 손이다. 그의 손을 잡아줄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다. 소년이 가진 거라곤 빈 주먹 뿐이었고, 이를 통해 얻은 건 소년원 경력 뿐이다. 그리고 19살이 된 소년은 이제 교도소로 발을 들인다. 사회에서도 혼자였던 소년은 교도소에서도 홀로 살아가야 한다. 아니, 살아남아야 한다. <예언자>는 6년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갇힌 소년 말리크(타하 라임)의 성장을 다루는 범죄 영화이자 갱스터 무비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에서 두드러지는 건 장르적 중후함보다도 현실적인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는 비범한 전형에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교도소에 가야하는 말리크의 현실적 처지를 덩그러니 던져놓는다.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가 이제 소년원이 아닌 교도소에 가야할 나이가 됐으며 그를 지켜줄 사람도 없고, 그가 가진 것도 없다는 얇은 정보 뿐이다. <예언자>가 소년에게 어떤 운명을 부여할지에 대해서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교도소에 들어서서 알몸으로 검문을 시작하는 말리크의 표정을 마주한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동공에 두려움과 경계심이 터져나갈 것처럼 자리한 말리크의 표정만으로도 그의 교도소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통제와 억압이 자리한 교도소 안에서는 남몰래 폭력이 자행되고 있으며 권력의 착취는 은밀하듯 공공연하게 이행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말리크는 그 중심으로 멱살을 잡히듯 끌려들어간다. 선택의 여지란 없다. 단지 생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내던져진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분명 가혹한 현실을 비추는 영화다. 하지만 <예언자>는 예상 외로 그 가혹한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연민과 같은 감정을 끌어내거나 그 현실로부터 잉태되는 상황으로부터 윤리적인 물음을 도출할 야심이 없는 작품처럼 보인다. 말리크가 처한 가혹한 현실을 다룸에도 그 현실에 어떠한 감정이나 의문을 담아내지 않는다. 단지 말리크라는 소년의 현실을 연출해 던져넣고 그 연출된 현실 속에서 소년이 살아나가는 모습을 비춰낼 뿐이다.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관계를 이루고, 그 관계 속에서 소년은 비로소 삶을 배운다. 마치 사회학적인 실험이 벌어지는 교도소의 풍경을 영화적 형식으로 옮겨놓은 듯, 살풍경을 담담한 태도로 응시한다. 흥미로운 건 결과적으로 그런 태도가 <예언자>를 성장드라마로서의 쾌감에 다다르게 만든다는 점이다. 교도소의 살풍경을 응시하면서도 느와르적인 비장감이나 윤리적인 이의를 제기하기 보단 생의 노하우를 수집해나가는 말리크의 성장을 찬찬히 지켜볼 따름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말리크가 형을 마치고 출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예언자>는 시작과 끝에서 인물의 달라진 표정만으로도 특별한 성장드라마의 묘미를 자아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에서 말리크는 삶의 특별한 계기를 거듭 수집해 나가고 이를 통해 그 동안 꿈꾸지 못했던 미래를 설계하며 삶의 기회를 개척해 나간다. 말리크에게 교도소는 기회의 땅이다. 코르시카 출신 성분의 갱단 보스인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립)의 눈에 띄어 그에게 살인 지령을 받고 그의 수족처럼 부려지는 말리크는 그로부터 온갖 폭력을 감내해고 생사의 여부가 불확실할 정도로 위험한 임무를 떠안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립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해 나간다.
사실 <예언자>가 묘사하는 말리크의 성장담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이를 미화하거나 혹은 정당화하지 않음으로서 그 논란을 온전히 배제시킨 채 그 서사적 진행에 감상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인물의 상황을 전시하면서도 그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나 감정에 연출적 효과를 배제함으로서 그 자체에 대한 감정적 이입을 차단해낸다. 숏과 컷의 배분에 있어서도 비중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균등한 시선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서사를 전진하는 서사 속에서 잉태되는 역설적인 결과의 연속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새겨넣는 것만으로도 집중력 있는 감상을 도모한다. 안정적인 서사의 흐름 속에서도 진전되는 서사를 예측 불가능한 선상으로 밀어넣으며 흥미를 유발하고 지속시켜 나간다. 특히 영화가 부여하는 현장감의 자질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를 비롯한 지난 갱스터 고전들이 중후하고 비장한 느와르의 감성과 시대적 징후 등을 끌어안으며 감상의 체중을 묵직하게 이끌어내던 것과 달리 <예언자>는 때때로 경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중량감을 자랑한다. 되레 긍정적인 기운마저 느껴지는 <예언자>의 결말은 현실적 물음을 따져묻기 보다도 현상적 가치를 이어붙이며 살아온 말리크의 서사로부터 얻어진 일종의 위안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교도소에 들어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 소년은 이제 스스로 개척한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성큼 걸어나간다. 가혹한 운명을 새로운 삶의 계기로 전환한 소년의 서사는 뒤늦게 역설적인 쾌감을 낳는다. 소년은 위협 앞에 운다. 하지만 소년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성장한다. 그 생의 가치란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 가늠될 수 없는 비범한 묘미를 품고 있다. 적어도 그 서사를 목격한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을 만큼.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