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국민은 오랫동안 고자였다. 100여 년 전만 해도 개인의 자유란 일부 계층만 세울 수 있는 권리였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가 명하지 않으면 자유를 세울 생각조차 못했던, 발기부전의 시대를 살아왔다. 민주주의라는 비아그라를 찾기 전까진.
그러니까 이것도 국가다. 국가란 이렇게 좆 같을 수도 있단 말이다. 결국 국민의 권리를 세우는 문제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에게 달려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유란 그저 자위다. 평생 민주주의라는 딸딸이나 치면서 억압 속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고자가 되고 싶진 않다.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마약 운반 혐의로 2년간 프랑스의 교도소에 억류됐다는 한국인 여성에 관한 실화 말이다. 어쨌든 2006년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이 기구한 사연은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여론을 통해서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의 보도가 환기한 것은 국가 기관의 어이 없는 작태였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던 외교통상부 산하의 주불대사관에서 이국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국민을 외면해버린 진실은 국내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여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절절하고 속이 끓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건 바로 전도연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은 심장과 같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객석 곳곳으로 피가 돌듯이 오롯한 심정이 전달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질주 신에서 전도연의 얼굴은 삼라만상 같다. 공터 같은 표정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 ‘연기력’이란 기능적인 단어로 그녀의 연기를 설명하길 꺼려지게 만든다. ‘경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한 연기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문장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정말 좋은 배우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때때로 신과 신의 이음새에서 성급한 인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실화와 가공된 허구를 재단하고 접목해서 영화적인 언어로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쥐어준다. 인물의 고난을 전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을 가혹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추적하고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당신이 공감하는 건 단순히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감한다면 그건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와 국가가 영화적 비극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태극기 휘날리며 국가의 위상을 높여주길 바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퍼포먼스는 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는, 혹은 군대 면제와 포상이라는 실물적인 거래로 환산된다. 이는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준 대한민국 1등 국민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지불, 그리고 이를 통해서 국가에 대한 더 없는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홍보 수단으로 변질돼 간다. 스포츠 이데올로기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의 최고 수단이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