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형사였던 강태식(설경구)은 좋은 말로 하자면 ‘범죄연구소’, 속된 말로 하자면 ‘흥신소’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명 해결사다. 모텔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대가를 얻는 그의 일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이려던 어느 날, 그는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청난 덫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연루된 일임을, 동시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런 덫을 풀어놓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음모의 핵심을 찾아 나선다.
일단 류승완이 기획하고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해결사>는 분명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대감을 품은 어떤 이가 있다면 그 방향을, 혹은 그 기대감의 정도를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만큼이나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그린 <해결사>는 시종일관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해결사>는 단순히 그 활약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최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지 않는 영화다.
개인에게 얽힌 음모의 실체가 실상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와 폐악의 범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 얻게 될 충격은 곧 관객에게 전이돼야 할 문제의식으로 발전될만한 것이다. 실제로 <해결사>는 현실정치를 직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클라이맥스로 점철될 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풍자의 의미를 더할 때, 쾌감은 분명 배가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결사>는 풍자라는 작품의 의미적 성취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완결성 안에서도 분명한 파급력을 얻어낼 수 있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사>라는 결과물 안에서 딱히 이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되레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되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사>에서 가장 기대하고자 한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은 지나치게 의미에 매달린 영화의 야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며 궁극적으로 그 야심 또한 그 의미에 근접해내기 보단 극의 흐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 낭비적인 욕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결사>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부재한다. 음모를 뒤집어 쓴 인물이 끝내 이루는 건 단순한 폭력적 응징에 불과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설경구라는 주연 배우 탓일지 몰라도) <공공의 적>을 연상시키는 엔딩이기도 한데 두 영화의 결말이 클라이맥스라는 용어 안에서 대조군을 이루는 건 말 그대로 중심인물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공공의 적>이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활약을 거칠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반면 <해결사>에서 강태식의 활약이란 고작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룰렛 안에서 돌고 돌다가 운 좋게 타인의 도움에 구제받는 식이다. 음모에 빠진 인물의 감정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할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부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방점을 고민하지 못한 채 어떤 이야기적 구성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주연배우들이 주도하는 액션신은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가 느껴질 뿐, 탁월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는 사실 <해결사>에서 가장 아쉬운 측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액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해결사>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다. 최근 <아저씨>와 같이 특별한 성과라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액션신을 연출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해결사>의 액션은 어떤 스타일도 어필하지 못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체이싱은 대단히 공허하다. 몇몇 조연배우들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이는 영화의 공백을 메울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체 <해결사>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에서 해결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랄까.
입에서 한기가 새어 나오는 한겨울 동대문 새벽상가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물류정리 관리일로 하루 벌이를 하는 할아버지(신구)는 손녀 다성이(김향기)와 함께 집과 일터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그의 아들(김영호)이 찾아와 자신의 딸 다성에게 작은 방울토마토 화분 하나를 선물하지만 다음날, 제 아버지가 푼돈을 아껴 모아둔 통장을 들고 황망하게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다성이가 살아가는 비좁은 집마저도 재개발 지역이란 명목으로 철거당할 상황이다.
<방울토마토>는 가난을 짊어진 하층민의 고단한 일상을 비참할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한다. 지저분한 얼굴과 옷차림의 아이, 심술로 발화된 삶의 체증을 한 가득 질어진 할아버지의 표정, 어떤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은 사회적 최하층민의 삶을 이미지로 대변한다. 말 그대로 <방울토마토>에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삶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삶이 거짓이라고 부연할 수는 없다. 분명 그런 참혹한 일상을 두르고 살아가는 이는 이 땅에 드물지 않게 존재하는 법이므로. 허나 <방울토마토>는 이를 통해 보편적인 슬픔을 끌어내고 관객에게 심적 통증을 권고한다. 진창 같은 비극적 삶을 전시함으로써 이를 통해 비통한 감정을 양산한다.
굽이굽이 돌아서라도 돌아오겠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손녀의 아버지는 통장을 들고 도망간 후행적조차 알 수 없고, 그 와중에 입에 풀칠하게 해주던 일자리도 사라졌다. 게다가 비좁은 집구석마저 강제 철거당하며 길바닥에 내앉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라는 순간마다 더욱 잔혹한 현실로 그들은 내던져진다. 결말은 지독할 정도다. 한치에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은 빈부의 격차가 영락없이 인간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본주의적 패악의 세계다. 이를 통해 <방울토마토>는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양산된 양극단의 계급을 묘사한다.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는 기르는 개조차 한우를 먹이고, 어떤 이는 밥 한끼 사먹을 돈 없어 남이 먹다 남긴 국그릇을 몰래 훔쳐 마시다가 그 안에 버린 쓰레기까지 입에 담는다. <방울토마토>엔 비판의 수위를 넘겨버린 자본주의적 적대감이 넘실거린다.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들의 사연은 일관적인 흐름과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관계가 불확실한 몇몇 캐릭터들이 시간을 소모시키듯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야기의 얼개는 듬성듬성 불안함을 드러낸다. 물론 할아버지와 다성이의 주거침입(?) 에피소드는 나름의 묘미를 지닌 창의적인 플롯이라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이음새가 부실하고, 다소 극단적인 양상의 비극적 내러티브는 시종일관 어떤 혐의를 야기시키는 것이라 다소 불편하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대립적 관계로 배치시킴으로써 관객이 빈곤한 노인과 손녀를 그 비극적 알레고리의 피해자로 쉽게 인식하게끔 유도당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결국 가난을 비극적 볼모로 삼아 관객의 눈물을 소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비극적인 양상 속에서 허덕이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끝끝내 비극을 맞이하는 이 무지막지한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남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 아니면, 빈자의 지독한 현실적 슬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비극이 몰아친 뒤, 황폐한 땅 위에 홀로 남은 노인의 곁에 방울토마토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은 이리도 얄팍하다. 제작의도는 고결했을지 몰라도, 가난한 이들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적극 활용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에 용이한 결과물은 지독하게 황폐하고, 간악하다. 이는 연륜만큼이나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의 열연과 어린 나이에도 또박또박 제 연기를 하는 김향기의 호연을 제물 삼아 이뤄진 것이라 더더욱 악취미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지닌 일말의 미덕은 희망을 결코 무책임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만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