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김상남(정재영)은 이제 구단 내에서도 손사래를 치는 사고뭉치 퇴물투수에 불과하다. 음주에 폭행시비까지 휘말린 그는 선수생명에 제동이 걸린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학창시절 절친이자 매니저인 철수(조진웅)에게 떠밀려 청각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위한 충주 성심학교의 야구부 감독직을 맡게 된다. 야생마처럼 길들이기 어려운 퇴물 투수가 소리가 없는 세상 속에서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쥔 소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그라운드에 나선다.
아마도 <글러브>에서 가장 뚜렷하게 주목되는 대상은 어느 배우들도 아닌 강우석 감독일 것이다. <글러브>는 전작 <이끼>와 함께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발견되는 변화적 흐름을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시사적인 이슈들에 밀착한 상업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강우석 감독은 본격적인 장르물에 도전한 <이끼>로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글러브>는 ‘착한’ 휴먼드라마로서의 감정에 무게를 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가장 무딘 날을 세우고 있다 평할만한 작품이며 강우석이라는 이름 안에서 또 한번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하게 만드는 결과물로서 이목을 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박의 여지는 있다. <글러브>는 충주 성심학교 야구부 학생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둔 각색물이란 점에서 역시 현실적인 이슈를 스크린 속에 녹인 강우석 감독의 전례들과 이어진 일관성이 유지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글러브>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시사적인 이슈들을 적절한 시기에 스크린에 수용해내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특유의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글러브>는 실화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나 그것이 정치적인 가치평가를 염두에 두게 만드는 소재가 아닌, 드라마틱한 보편적 감동에 무게를 얹는 소재로서 수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강우석이라는 이름을 건 전례들과 차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뒤집어서 ‘강우석 감독의’ 라는 부연을 제하면 사실 <글러브>는 굉장히 빤하게 수가 읽히는 영화다. 청각장애를 지닌 소년들과 한때 프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던 망나니 투수가 만나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함께 성장해나가는 눈물 겨운 감동스토리가 빤히 읽히는 <글러브>는 그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진짜 빤한 영화다.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지점이 있다면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라고 할까. 스스로 감동을 웅변하는 대사들이 숱하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감동’드라마임을 스스로 주창하는 올드한 휴먼드라마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글러브>는 직구다. 포수의 미트 안으로 정직하게 뻗어 들어오는, 치기 쉬운 직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투구되는 영화다. 장애를 극복하는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뒤늦은 깨달음이 성장드라마라는 그라운드 안에서 차례대로 진루하다 어렵지 않게 홈까지 걸어 들어오는 양상이다. 치기 쉬운 볼을 받게 되는 타자의 입장과 같이 관객은 손쉽게 감동을 얻어내겠지만 동시에 큰 감흥에 다다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사들은 거창하고, 표정들은 비범하나, 감정이 얕다. 목청은 크지만 울림이 없다.
적당한 진루타는 쳐내지만 홈런 한 방이 부족한 휴먼드라마라는 점에서 <글러브>는 인상적인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동시에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어쩌면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에러일 것이다. 그나마 정재영의 살아 있는 표정이 영화의 빤한 승부수 속에서 흥미진진한 역투 노릇을 한다.
140분이 넘는 러닝타임은 과하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간지러운 표정 연기도 숱하게 나온다. <글러브>는 꽤나 올드한 영화다. 단도직입적으로 촌스럽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눈길을 끈다. 장애를 극복하는 스포츠영화라는, 이미 닳고 닳은 영화적 양상을 직구로 관통한다. 정재영은 때때로 과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이 영화의 감정에 진심의 무게를 얹어 내며 구원투수 노릇을 한다. 야구 영화치고 경기 장면이 재미없다는 건 맥 빠진 중심타선을 보는 느낌이지만 홈런은 아니더라도 진루타는 쳐내는 드라마가 대타 노릇을 해낸다.
단 한 장의 편지에 전쟁이라는비극적인 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참상 속에 내던져진 이유도 모른 채 총을 쥐고 상대를 겨누던 한 학도병이 남긴 편지에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맞선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속에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생에 대한 갈망이 가늘지만 깊게 스며들어 있다. <포화속으로>는 그 편지 한 장으로부터 확장된 팩션 전쟁영화다. 어린 학도병이 겪었던 끔찍한 참상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포화속으로>가 재현하고자 하는 건 참상 그 자체다. 그건 결코 추억이라는 단어로서 허용될 만한 가치를 품은 것이라거나 어떤 장식적인 환경으로서 수단화될 수 없는 것이다. 71명의 학도병이 다수의 북한군에 맞서 남진을 지연시켰고 이것이 전쟁의 전세를 역전하는데 대단한 공헌을 했다. 이것이 <포화속으로>라는 영화가 재현할 수 있는 사실의 영역이라면 <포화속으로>에서 가능한 연출은 그 사실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거나 혹은 인물이 바라보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충실한 감정적 이입이어야 한다.
긴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단적으로 말하자면 <포화속으로>는 온전히 전쟁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전쟁 화보영화다. 극초반부터 현장감 넘치는 시가전을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포화속으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본질보다 전장에 대한 연출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얼리티는 중요하다. 하지만 <포화속으로>에 담긴 전장의 풍경은 리얼리티라기 보단 과장과 포장에 불과하다. 색의 대비를 높이고, 현란한 핸드헬드를 동원한다 한들, 그 풍경에는 어떤 비장함이나 숭고함이 없다. 그저 군복을 챙겨 입은 배우들의 살아있는 화보집의 나열에 불과할 따름이다. 종종 들어서는 얄개드라마 같은 에피소드는 웃기지도 않다.
이건 성의 문제다. <포화속으로>는 전쟁이라는 상황 자체를 스크린에 옮겨놓았을 때 어떤 수지타산이 가능할까를 계산한 영화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비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비극을 재현한다면 최소한 그 비극의 본질을 관통해야 한다. <포화속으로>에는 전쟁 이미지가 있을 뿐, 전쟁이 없다. 영화는 끝까지 전쟁놀이에 여념이 없다. 피난민들을 위해 다리를 폭파시켜서는 안 된다고 절실히 주장하던 장교가 지휘관의 명령에 체념한 뒤 폭파되는 다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비장하게 걸어오는 풍경은 그 자체로 코미디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반공영화라도 찍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북한군 전차에 파란색 매직으로 ‘1번’이라도 적어주고 싶은 건 단지 시대가 하수상해서 그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