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언론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을 때 이를 둘러싼 총체적인 매커니즘에 관해 취재해서 긴 기사를 썼던 적이 있다. 그때 당시 뒤늦게 마지막으로 강호순의 얼굴 공개에 탑승한 MBC 보도국 관계자로부터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론 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JTBC <뉴스룸>이 성완종 회장의 발언이 담긴 녹음 파일을 공개한 것도 이런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 방송의 보도윤리란 일반적인 사회적 윤리와 완벽하게 동일한 궤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정보원의 엠바고를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일 순 없겠지만 알 권리를 바탕에 둔 보도윤리를 중점에 두고 보도방침을 해석하고, 결정하는 뉴스 관계자의 기류를 판단할 때 참고할만한 사항은 되겠다.
이번 사안이 향후 <뉴스룸>의 행보에 어떤 타격을 입힐지는 모르겠으나 <뉴스룸>이, 본질적으로 손석희가 십자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된 건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이런 판단을 내린 손석희도 잘 알고 결정한 사항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다. 그럴 리는 없지 않은가. 그만큼 손석희는 녹음 파일 공개가 언론으로서의 직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건 손석희의 직업정신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향하는 활시위가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건 <뉴스룸> 보도국이, 손석희가, 사회적 윤리를 배반했다고 논할 이들을 정서적으로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될 것인데 그 국면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다. 그리고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라 판단했을 손석희의 믿음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결국 아무도 모를 것이다. 손석희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할 순 없지만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내린 판단은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으로 그의 자리를 지켜볼 것이다.
손석희가 진행하는 <뉴스9>엔 유난히 독점 보도가 많았다. 이상하다. 타방송사 기자들은 노는 것도 아닐 텐데 왜 <뉴스9>에서만 유독 독점 보도가 많단 말인가. 손석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일같이 출입처에서 나오는
자료 보고 그 바탕 위에서 보강 취재하는데 익숙해지면 자기가 주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데 익숙해진
기자의 경우 자율적 취재기능이 상당 부분 떨어져 있다.” <뉴스9>의
공신력은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손석희의 <뉴스9>은 언론의 직업 윤리란 정의로운 신념을 걸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실력을 증명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뉴스룸>이추구하는것은지금까지진행해왔던 <뉴스9>과본질적으로다르지않습니다. 한걸음더들어가진실에접근하는것입니다." 손석희의말처럼<뉴스룸>은
기존의 <뉴스9>의 확장판이다. 100분짜리 뉴스라니,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보도국 입장에선 기존의
탐사 보도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하고 전달할 수 있는 호흡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기존의 <뉴스9>에서 힘을 발휘했던 손석희의 생방송 인터뷰 능력과
현장성 있는 보도 방식은 100분이라는 시간을 생동감 있게 채운다. 실제로
지난 10월 17일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당시 <뉴스룸>은 해당 보도를 무려 70분 동안 진행했는데 대부분 현장에 출동한 기자들의 현장 스케치와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과의 통화로 채워졌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건을 사건 현장에서 급박하게 전한다는 것. 이건 <뉴스룸>이 타방송사들과 차별화된 취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해외의 ‘뉴스쇼’들처럼 박진감을 연출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갖은 사회적 이슈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100분짜리 뉴스가 존재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손석희의 <뉴스룸>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 무모한 도전으로 회자될진 모르겠다. 공중파 뉴스의 시청률에 비해서
낮은 시청률을 보이는 종편 뉴스로선 모험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뉴스룸>의 영향력은 이미 타방송사의 뉴스를 압도한지 오래다. 브랜드로서의 인지도가 중요하다. 게다가 당장 TV 앞에 앉아서 뉴스를 보지 않아도 <뉴스룸>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많다.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뉴스룸>에 대한 평가가 심심찮게 들린다는 건 이미 <뉴스룸>이 어떤 식으로든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적지 않은 영향력이 감지된다. 지금 한국의 방송 뉴스는 손석희가
있는 뉴스와 손석희가 없는 뉴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손석희가 JTBC의 보도국 사장직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손석희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그 누가 손석희를 의심하는가. 지금 손석희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손석희뿐이다. <뉴스룸>에 대한 믿음도 거기에 있다. 손석희는 손석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16일, 언론에선 하루 종일 진도의 여객선 침몰 상황에 대한 소식을 알려왔다. 참담했다. 그리고 그 소식만큼이나 참담했던 건 한국 언론의 현주소였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 HBO의 미니시리즈 <뉴스룸>은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유명 앵커인 윌 맥어보이(제프 다니엘스)를 주축으로 구성된 방송 보도국의 분위기를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이 미드는 동시대의 뉴스를 소재로 삼아 에피소드를 전개함으로써 동시대와 호흡하는 진짜 뉴스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공정성에 중점을 둔 뉴스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해나간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시즌 1 에피소드 4회의 말미인데 주말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애리조나의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한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긴급히 정보를 수집하고 보도 준비를 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속보의 핵심은 하원의원인 가브리엘 기포즈가 행사 참석 도중에 총에 맞았다는 사실인데 라디오에서 그녀의 죽음을 보도하면서 일체의 케이블 채널 뉴스들도 역시 그녀의 죽음을 속보로 전하기 시작하고 윌의 뉴스룸도 술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뉴스룸 안의 스태프들은 공식적인 확인을 얻게 될 상황에 대비할 뿐 부정확한 타매체의 속보전에 동참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한다. 그러나 방송국 대표의 젊은 아들은 죽음에 대한 공식 발표를 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추궁하기 시작하고 뉴스 진행이 한창인 뉴스룸으로 박차고 들어오기까지 한다. 그때 한 스태프가 말한다. “사람 목숨이잖아요. 뉴스가 아니라 의사가 결정하는 거죠.” 그리고 결국 타방송사들의 속보가 오보였음이 밝혀진다. 기포즈가 살아있으며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병원의 정보를 전한 것. 공식적인 정보를 확인하는 인내심을 통해서 유일하게 진실을 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힘든 하루였고, 다시 한번 힘든 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6일 아침부터 진도 해상에서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속보가 보도됐다. 오전 10시경에 이뤄진 정부의 브리핑에선 제주도로 향하는 이 여객선엔 총 477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그중 수학여행을 떠난 325명의 단원고 학생들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언어만으로도 마음이 쪼그라드는 속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학생들이 전원 구조될 것이란 보도가 이어졌고, 오전 11시경엔 학생들이 모두 구출됐다는 문자가 학생들의 부모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소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실종자의 숫자는 매번 달라졌고, 전체 승객의 숫자마저도 불명확해졌다. 실종자의 수에 관한 정부의 발표는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 그에 따라 언론의 정정보도가 이어졌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4시 30분경에 벌어졌다. 구조자수가 368명이라고 했던 언론들은 곧 집계상의 오류로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음을 전했고, 실제 구조자수가 절반으로 떨어진 164명이란 보도가 이어졌다. 집계상의 오류라는 이유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구조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쓰나미 같은 절망으로 덮어버린 이 소식 이후로 구조자수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어두운 예감을 부추기듯 해가 저물고 하늘보다도 마음이 먼저 암담해졌다.
일선의 한 기자는 이처럼 무분별한 정부의 통계는 처음이라며 볼멘소리를 토로했다. 하지만 과연 정부의 통계만이 문제였을까. 오전 10시경을 전후로 시작된 갖은 언론 매체들의 속보 경쟁 또한 무분별한 레이싱 같았다. 온라인과 방송, 공영방송과 케이블 채널을 가리지 않고 진도에서 벌어진 참극에서 얻어낸 모든 정보들을 누구보다 먼저 ‘속보’란 이름으로 내걸었다. 정부가 발표하면 받아 적고 게재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알고자 하는 의지보다 알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정확한 정보보단 신속한 소식이 중요했다. 기자가 아니라 속기사들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언론의 현주소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진도는 포털사이트를 바탕으로 가속화된 갖은 언론 매체들이 벌이는 속보의 전장이 됐다. 그 와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촌극이 언론 기사라는 미명하에서 게재되기 시작했다. ‘타이타닉, 포세이돈 등 선박사고 다룬 영화는?’이라는 믿을 수 없는 헤드라인을 내건 <이투데이>의 기사는 오후 2시 40분경에 게재됐다. 질타를 받았다. 상관없었다.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를수록 트래픽을 챙기고자 하는 속셈이 다분한, ‘어뷰징’ 기사였다. 그리고 15분 뒤 이 매체는 ‘SKT, 긴급 구호품 제공, 임시 기지국 증설 “잘 생겼다~ 잘 생겼다”’라는 추악한 헤드라인까지 선보이며 매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과시했다. 현재 기사는 삭제된 상태다.
한편 몇몇 인터넷 언론 매체는 여객선의 보험 가입 현황에 주목하는 기사를 송고하기 시작했다. 조선닷컴에선 ‘세월호 보험, 학생들은 동부화재 보험, 여객선은 메리츠 선박보험 가입’이란 헤드라인을 내건 기사를 송고했고, 이런 온라인 기사에 자극을 받았는지 공영방송 MBC는 보험 조건에 따라서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보도를 전했다. 보험사 PPL 음모론을 제기해도 될만한 촌극이었다. 한편 같은 날 JTBC의 <뉴스 9>은 손석희 앵커의 긴 사과로서 뉴스진행을 시작했다. “오늘(16일) 낮에 여객선 침몰 사고 속보를 전해드리는 과정에서 저희 앵커가 구조된 여학생에게 건넨 질문 때문에 많은 분들이 노여워하셨습니다.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나마 배운 것을 선임자이자 책임자로서 후배 앵커에게 충분히 알려주지 못한 저의 탓이 가장 큽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손석희의 사과는 16일을 암담하게 뒤덮었던 언론들의 막장 배틀에 내린 한 줄기의 빛처럼 느껴졌다.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도 언론의 몫이다. <뉴스 9>은, 손석희는 최소한 그 자리를 지켰다. 다행이다.
“언론의 자리를 되찾는 거지. 언론을 다시금 명예로운 직업으로 만드는 거야. 위대한 나라에 걸맞은 토론의 장을 탄생시킬 정보를 제공하는 저녁 뉴스를 만들고, 예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진정으로 중요한 본질로 돌아가는 거. 천박함은 벗어 던지고, 가십과 관음증도 끝내고, 어리석은 대중일지언정 진실을 전달하는 거.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얘기 말고, 그래서 언론이, 우리 모두가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거야.” <뉴스룸>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 대한민국 언론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실천했다.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그리고 언론은 이를 보도한다. 그런데 진실을 전하려는 의지보다도 추악한 의도가 먼저 눈에 띈다. 무분별한 언어를 통해서 상처 입은 이들을 되레 유린한다.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소식은 기약이 없는데 알 필요가 없는, 어쩌면 알아선 안될 소식들이 귓전으로 내던져진다. 누군가의 비극이 하나의 쇼가 돼서 초단위로 판매되고 폐기된다. 마치 모든 언론이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16일 하루 동안 대부분의 언론이 보여준 작태는 온라인 쇼핑몰과 홈쇼핑에 매대를 세우고 정보를 팔아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취재원에 대한, 독자에 대한 예의도 없었다. 그저 무엇이든 팔아 치우겠다는 장사치의 욕망만이 파도처럼 진도를 덮쳤다. SNS상에선 기자라는 이름 대신 ‘기레기’라는 조롱이 난무했다. 기자와 쓰레기를 더한 말이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를 압축하는 조롱이다. 마치 온라인 쇼핑, 홈쇼핑이 돼버린 듯한 글과 말의 추락에 대한 씁쓸한 비유다.
조지 클루니가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미국의 CBS방송에서 시사프로그램 <See It Now>를 진행했던 에드워드 머로우에 대한 영화다. 그는 1940년대 미국에 불어 닥친 매카시즘의 광풍 앞에서 끝까지 진실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고, 되레 끈기 있게 조셉 매카시의 실정을 주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머로우는 말했다. "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이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자명하다. 하지만 진실을 추구한다는 건 그만한 각오와 실력이 필요한 일이다. 치밀한 기획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은 단순한 정의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사람들은 수많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 스마트폰으로 숱한 정보를 공유하고 세상의 곳곳을 본다. 하지만 그 수많은 정보에 대한 변별력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알 수 있다. 혹은 알아야 한다. 가십을 생산하는 건 언론이 아니다. 흔히 우리가 ‘알 권리’라고 말하는, 개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공적인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고 언론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과연 우리에게 그런 정보들을 구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있는가라는 문제다. 신념 있는 언론의 등장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신념을 지켜줄 수 있는 대중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머로우는 말했다.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 또한 남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 언론과 대중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는 건 이상적이다. 믿을 수 있는 언론과 이를 지지하는 대중이 함께 하는 사회는 보다 나은 가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린 보다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찾아야 한다. 지금도 진도에선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방금 막 두 번째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봤다. 우린 희망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언론은 그 희망을 팔아먹는 매대로 전락해선 안 된다. 그러니 부디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해’ 주길 바란다. 팔기 쉬운 가십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진실을 위해서. 부디 껍데기는 가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패이보릿 미드로 알려진 <홈랜드>는 이라크 파병 중에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미군 병사 니콜라스 브로디 하사(데미안 루이스)가 이라크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군들에게 발견되어 8년 만에 고국에 귀환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은 세 개의 축으로 나뉜다. 갑작스럽게 구조된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CIA의 정보원 캐리 매티슨(클레어 데인즈)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큰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브로디가 자신의 죽음에 익숙한 삶을 살아오게 된 아내와 자녀들과 겪게 되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브로디 자신의 혼란이 주변부의 줄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홈랜드>에서 가장 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브로디의 정체다. 알 카에다 조직의 수장 아부 나지르를 추적하는 캐리는 테러리스트 조직인 알 카에다에게 납치된 뒤, 8년 만에 생환하며 미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추앙 받는 그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이한 징후로 지목하며 불법적인 도청과 감시 행위까지 불사한다. <홈랜드>의 묘미는 거기 있다. 캐리의 의심스러운 시선과 함께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다가도 흐릿해지길 반복하는 브로디의 정체로 인해서 혼선을 거듭하는 상황이 흥미를 자아낸다. 가장 큰 백미는 캐리와 브로디의 관계에 있다. 완벽하게 괴리돼 있던 두 인물의 관계가 우연한 접점을 통해서 급속하게 근접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홈랜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떠밀려간다.
<홈랜드>로 인해서 <제로 다크 서티>를 떠올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자정 이후 즉 ‘00시 30분’을 지칭한다는 의미의 <제로 다크 서티>는 네이비 씰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팩션이다. 사실 빈 라덴의 사살 이전에 픽션으로 기획됐다가 제작 도중 빈 라덴이 실제로 사살당하자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했던 <제로 다크 서티>는 러닝 타임의 팔 할을 빈 라덴을 찾아내기 위한 CIA 요원들의 분투와 고뇌에 할애한다. <제로 다크 서티>의 하이라이트인 결말부의 빈 라덴 사살작전 신을 보기 위해선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적의 몸통을 찾고자 불법적인 고문까지 자행하는 CIA 요원들과 끊임없이 꼬리를 끊고 몸통을 감추는 빈 라덴의 숨바꼭질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실패의 연속 안에서도 끝까지 빈 라덴의 실체를 쫓는 마야(제시카 차스테인)의 피로감과 좌절감은 되레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진다.
9.11은 미국인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공포처럼 보인다.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유명했던 미국 케이블 채널 뉴스 보도국의 뉴스 제작기를 그린 미드 <뉴스룸>은 7번째 에피소드에서 빈 라덴 사살 작전에 관한 첩보를 보도하는 과정을 다룬다. 흥미로운 건 그 끝무렵이다. 결국 그 첩보가 팩트로 확인되자 그 이성적인 보도국 일원 전체가 환호하는 광경에서 확인되는 건 뼛속까지 깊게 서린 9.11에 대한 체증이다. 빈 라덴의 사살은 그야말로 미국인 전체를 위한 살풀이였던 셈이다. 포스트 9.11에 관한 이야기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런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어떤 소재거리 이상의 현실성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심리를 품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홈랜드>와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인들에게 최고의 안전지대라고 여겨졌던 미국의 심장부가 타격 당한 이후로 겪은 공황을 다룬다. 세계인들에겐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이었던 9.11 테러의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 이상의 질환이 됐다. 두 작품은 바로 현재 미국의 심리를 대변하는 바로미터에 가깝다.
그런 현실 속에서 미국에 뿌리 깊은 공포를 주입한 테러리즘의 수장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는 마야와 캐리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공포와 그로 인해 축적된 피로에 시달린 미국 사회의 잠재된 심리를 대변하는 육체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두 작품이 그 심리의 그릇으로 여성의 육체를 빌리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두 여성은 각자 알 카에다의 수장인 빈 라덴과 아부 나지르를 쫓으며 병리학적인 강박 증세를 드러낸다. 그리고 강인하고 단단한 남성적인 심리보단 섬세하고 예민한 심리로 보다 첨예하게 날을 세운 심리를 묘사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여성의 육체는 첨예해진 미국의 심리를 담아내기 좋은 그릇으로서 손색이 없다.
캐리가 쫓는 아부 나지르는 포스트 ‘빈 라덴’에 가깝게 설정된 알 카에다의 수장이다. <홈랜드>는 완전한 픽션이고, <제로 다크 서티>는 현실에 기반한 팩션이란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두 작품의 현실성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9.11 테러 장면에서 시작되어 빈 라덴을 추적하는 <제로 다크 서티>만큼이나 아부 나지르를 쫓는 <홈랜드> 역시 여전히 테러에 대한 공포와 피로가 적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미국 사회의 포스트 9.11 증후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까닭이다.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캐리가 상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그의 신변을 감시하는 과정은 점차 그녀를 궁지로 몰아간다. 그 과정은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의심스럽게 비춰지기 마련인데 그녀의 추측이 대단히 얕은 단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9.11 테러 이후로 미국인들의 심리에 깊게 내려앉은 공포와 방어적인 심리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차 그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그 불안한 심리에 대한 어떤 비판 의식도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미궁에 갇힌 것처럼 그렇다.
<제로 다크 서티>는 허무에 가까운 물음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결국 빈 라덴을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마야는 그 성과 앞에서 환호를 지르기 보단 길 잃은 표정을 짓고 끝내 눈물을 흘린다. <홈랜드>는 <제로 다크 서티>가 주지 않은 답변 혹은 닿을 수 없었던 결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끝내 아부 나지르를 찾아내고 사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빈 라덴은 죽었지만 미국의 전쟁은 여전히 도처에서 펼쳐지고 있다.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공격받고 있다. 공격받을 것만 같다. 불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결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복잡한 미로를 헤쳐 나왔던 캐리는 다시 출구라고 믿었던 곳이 입구임을 깨달았고, 브로디의 여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섰거나 어쩌면 다시 원점으로 끌려온 것만 같다.
미국의 전쟁은 이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돼버렸다.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누가 시작한 전쟁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건 막아야 하고, 멈출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빈 라덴의 주검을 확인한 마야는 사실 누구보다 명확하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그 허무가 지난 날의 고통을 되레 명징하게 되살렸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포스트 9.11 시대의 나침반과 같다. 그리고 <홈랜드>는 올해 9월에 시즌 3로 되돌아온다. 이 피로와 공포는 보다 오래갈 것이다. 앞으로도 현실의 브라운관이나 영화 속 스크린으로 그들의 전쟁을 계속 지켜볼 가능성이 여전히 다분하다는 이야기다. 혹은 그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거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