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단평

cinemania 2009. 6. 8. 14:58

지현의 할리우드 진출작 논란 따위를 접어두고라도 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드>는 현재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이 부여하는 묘미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하는 작품이다. 초중반에 등장하는 집단 학살신은 심심하지 않은 구경거리처럼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인상적인 액션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때때로 게임 동영상을 삽입한 것마냥 조악하기 짝이 없는 CG가 심심찮게 눈에 띄고, 비전문액션배우의 지친 몸놀림을 커버하기 위해 시종일관 흔들어대는 카메라 워크도 무색하기 짝이 없다. 결론은 <블러드>가 딱히 미덕을 설명하기 어려운 오락영화란 말이다. 혹시나 만약 <공각기동대> 오시이 마모루의 동명 원작 스크린판이란 문구 따위로 그 이상의 기대감을 충만한 관객이 있다면 모든 기대감을 접는 게 낫다. <블러드>는 전공투 시절의 역사적 의식을 투영한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소설도, 그 이후로 뱀파이어 팬픽 수준의 양질을 유지하며 분화해나간 블러드 프로젝트의 애니메이션과 코믹스와도 다른 작품이다. 특히나 증축된 서사는 <블러드>를 부실한 스토리텔링으로 흔드는 과욕 같다. 모든 이들의 관심사라 할만한 전지현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할 뿐, 안타깝지만 액션을 구사하기엔 지치는 몸놀림을 선보인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3부작을 생각한다지만 이미 시리즈로서의 가능성은 끝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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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햄123> 단평

cinemania 2009. 6. 5. 20:20

오후 1 23에 뉴욕 펠햄 역에서 출발해서 ‘펠햄123(one-two-three)’이라 불리는 지하철이 갑자기 구간 가운데서 정차하더니 차체마저 분리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하철 배차원 가버(덴젤 워싱턴)는 접속을 시도해보지만 좀처럼 응답이 없다가 곧 낯선 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신원미상의 목소리는 지하철 납치를 알리며 인질과 거액의 교환을 요구한다. 협상이 시작된다. <서브웨이 하이재킹: 펠햄 123>(이하, <펠햄123>)은 이와 같이 지하철 납치를 소재로 한 범죄극이다. 하지만 하이재킹 액션물의 이미지를 기대한다면 배반감을 느낄 가능성이 농후하다. <펠햄123>은 뉴욕에서 벌어지는 납치범죄극이며 이는 명백하게 ‘9.11’을 연상시킨다. 사실 문제의 그날 이후 할리우드의 멘탈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포스트 9.11’ 작품들은 벌써부터 낡았다고 인식될 만큼 지겹게 회자되고, 해석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펠햄123>의 포스트 9.11 탑승을 눈여겨볼만한 지점은 테러에 대한 공적 공포보다도 테러리즘을 대처하는 뉴욕 시민들의 심리적 이해와 행정적 대응의 현상태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을 납치한 라이더(존 트라볼타)는 국가를 상대로 테러의 대가를 요구하면서도 민간인을 협상의 중계자로 지정한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테러가 단지 공적인 정치로 해결되기 전에 개인의 공포를 거쳐 환기된다는 직설적인 심리가 더욱 적나라하다.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협상과 연동되는 위기이기 전에 인간적 생존과 직결되는 개인과 개인의 알레고리 안에 놓여있음에 접근한다. 거대한 재난을 공유했던 뉴요커, 더 넓게는 미국인들이 관계를 인식하는 심리적 변화를 예상케 한다. 개인의 희생과 양심적 고백을 요구하는 범인의 태도에 몸소 응답함으로써 무차별적인 희생을 방지하려는 시민의 태도를 묘사한다는 점이나 뉴욕 시민의 안위를 정치적 훼손의 분기점으로 이해하고 반응하는 공적 대응도 흥미롭다. 동시에 <펠햄 123>은 캐릭터의 심리적 대립구도를 통해 밀고 나가는 스토리의 결과가 궁금해지는 영화다. 토니 스콧의 오랜 동반자인 덴젤 워싱턴은 언제나 그렇듯 빼어난 연기를 보이고 존 트라볼타 역시 매력적인 악당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은 카리스마를 선사한다. 특유의 핸드헬드와 컷 편집을 동원하는 토니 스콧의 현란한 이미지는 <펠햄123>에서도 눈길을 끄는데 유효하지만 때때로 스타일리쉬의 강박을 인식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과정에서 증폭되는 흥미에 비해 허탈함이 선명한 결말은 분명 가장 큰 아쉬움이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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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동네 주민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 단면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무능력한 마초이즘은 때때로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이방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니를 찾아서>는 어느 치졸한 마초의 체험을 통해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진전시키는 영화다. 인호(유준상)가 뚜힌(로빈 쉐이크)과 함께 로니(마붑 알엄 펄럽)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조합을 이룬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 극적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만 문제의식을 발견할 뿐 어떤 결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변화를 관찰할 뿐이다. 인호의 변화는 결국 한국남자들, 더 넓게는 한국사람들의 가능한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설득력 있는 사연이 귀엽고 즐겁게 전달된다. 물론 인호가 로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일면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고 목적성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무모한 희망에 동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로니를 찾아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시에 한국어에 유창한 불법체류자 외국인들의 모습은 기이한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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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핀> 단평

cinemania 2009. 6. 4. 12:39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세라핀 루이는 천재라고 명명되기 좋은 재능을 소유했던 프랑스의 여류화가다. 그녀를 발굴한 건 독일 출신의 미술평론가 빌헬름 우데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기가 된 건 세라핀이 우데의 가정부였기 때문이다. 삶의 여유란 찾아보기 힘든 빈민 여성노동자가 재능을 꽃피운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만큼이나 강렬하고 치열한 색채와 날카롭고 예민한 붓터치를 지닌 세라핀 루이의 작품은 우데의 말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놀라운 재능은 때때로 비극이다. 생애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헐값에 팔았다는 고흐가 현실적 가난과 정신적 광기에 시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라핀 루이 역시 비슷한 서사 속에서 단명했다. 물론 그녀의 광기를 잉태한 건 유년 시절을 지배하는 비롯된 종교적 집착이었다지만 현실적 부조리가 그녀를 파국으로 몰고 갔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세라핀>은 제목 그대로 세라핀 루이의 삶을 조명하는 전기적 역할에 충실한 드라마다. 극적인 울림이 최대한 절제된 담담한 시선은 그녀의 생을 객관화시킴으로써 그 삶 자체를 온전히 부각시킨다. 물론 클라이맥스가 결여된 채 페이드 아웃을 반복하며 서사를 진전시키는 영화로부터 심심한 인상을 얻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동시에 세라핀 루이의 생 자체가 그리 극적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여인의 초상 뒤에 담긴 은밀한 생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세라핀>은 전기 영화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특히 순수와 광기를 차분히 넘나드는 세라핀을 연기한 욜랭드 모로의 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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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박물관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고 난장판을 이룬다.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요소를 두루 갖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돌팔이 조제법으로 융해한 난장판을 연출하는 기획상품이었지만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있었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와 어드벤처는 결국 이 작품을 효자상품으로 만들었다. 속편은 그흥행성을 담보로 내놓은 매물이다. 좀 더 규모는 커지고 캐릭터는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실상 전작의 엉터리 같은 상황을 확장해서 답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2>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던 속편의 전형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에 아담한 규모로 맹점을 가리던 전작의 단점들이 오히려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탓에 때론 유치하며 스토리는 더욱 부실해졌다. 개체 수가 늘어난 전시물들은 다채롭기보단 산만하다. 전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던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새로운 캐릭터들은 매력을 보충하지 못한다. 플러스가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부른다. 그나마 매력적인 에이미 아담스가 유일한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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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움직임이 구사되지 않는, 타격감이 없는 성룡영화라니 생소하다. 액션 장면은 있다. 하지만 그 액션 장면에서 성룡은 우리가 아는 성룡이 아니다. 그냥 마구 휘두르고 얻어 맞기도 한다. 액션 활극이 아닌 사실적인 느와르 안에서 성룡의 위트는 전혀 구사되지 않는다. 그 진지함만큼이나 진중함도 대단하다. <신주쿠 사건>은 살벌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도쿄의 비정한 정서를 온전히 체감하는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도쿄 생존기다.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밀항한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이 넘치던 90년대 도쿄 신주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희망과 절망을 가로지르는 불법이민자들의 저항과 애환을 핏빛으로 투영한다. 성룡과 판빙빙을 비롯한 중화권 배우들과 타케나카 나오토를 비롯한 일어권 배우들은 제 역량을 다함과 동시에 그 조화가 자연스럽다. 사실적인 신체훼손 장면이 연출되는 등 폭력의 수위가 높지만 그 무거운 정서가 캐릭터의 공포와 분노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무엇보다도 활극적 액션을 연출하지 않고 온전히 표정만으로 승부하는 성룡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연륜과 관록이 넘치는 성룡의 표정은 비정한 느와르의 내면을 탁월하게 대변하는 창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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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증을 앓는 원우(김예리)는 이를 걱정하는 어머니가 때때로 못마땅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병이 더욱 싫다. 할머니는 이를 말없이 지켜본다. 혈연으로 엮인 세 여자의 집안을 살핀다는 점에서 여성영화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바다 속으로, 한 뼘 더>는 정적인 가족드라마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는 모녀의 연대를 차분하게 살피는 시선이 사려 깊다. 심신을 괴롭히는 병세를 극복하려는 소녀나 새로운 로맨스 앞에 마음을 여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만의 성장통을 건넌다. 물론 때때로 인공적인 어투가 경직된 찰나를 인식하게 만들고 심심함이 감지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산뜻하며 긍정적인 에너지가 귀엽고 섬세하게 찰랑거린다. 온전히 따뜻하지 않아도 포근한 감성이 충만한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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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 단평

cinemania 2009. 5. 22. 00:47

귀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소재가 사실 어느 정도 닳은 방식임을 간과할 수 없다. 귀신을 보는 눈이라던가, 귀신을 듣는 귀라던가, 이미 형태적으로 비슷한 동류의 영화들이 많았다. 돌파구는 효과적인 표현 양식이다. <에코>는 스토리텔링에 역점을 두고 효과를 치장하는 공포영화다. 동양적인, 좀 더 확실하게 일본호러의 정서가 문득 보인다. 한을 품은 혼령의 복수라는 게 일면 그렇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에코>는 사회적 교훈극에 가깝다. 결말에 걸리는 메시지는 명징하다. 무관심의 이기가 팽배한 현대인의 소통불가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다. 다만 장르적 목적이 희석된다는 게 문제다. 장르적 기능성을 그릇으로 삼는 건 좋지만 그 역할이 무색해져야 쓰나. 때때로 움찔하게 만들지만 그것도 썩 유쾌하진 않다. 기교에 능할 뿐 지배력이 약하다. 물론 심약한 이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 정도는 된다. 하지만 좀 봤다는 이들에게 <에코>는 식상하기 짝이 없는 호러 영화로 분류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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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진동하는 핸드헬드와 거친 입자가 부유하는 캠버전 영상은 영화의 정서를 관통하기까지의 추이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실험적 기제처럼 보인다.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근본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언니인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킴(앤 헤서웨이)은 대사를 앞둔 집안의 공기를 불안정하게 덥힌다. 킴과 가족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을 부수기 위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담긴 거친 언어가 쏟아진다.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흔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반목 속에서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혈연이라는 구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존재만으로 폭력처럼 행사되던 가족이란 속박이 서로를 위한 배려로 거듭난다.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가족은 오랜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의 카메라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볼 따름이다. 단지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앤 헤서웨이의 놀라운 연기는 그 의미를 돈독히 다지는 강력한 지원군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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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단평

cinemania 2009. 2. 12. 19:15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고, TV도 보고, 핸드폰으로 전화만 하면 요즘 사람이 아니다. 더 이상 핸드폰은 전화기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잃어버리면 비단 전화기 하나 잃어버리는 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밀한 개인정보가 노출될 위험이 생긴다. <핸드폰>은 그 지점을 파고 든다. 분실한 자와 습득한 자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다. 문제는 ?라는 질문이다. 핸드폰에 뭐가 있느냐, 가 정답일 것 같지만 실상 그보다 더 복잡하고 중첩되는 상황의 복마전이 기다린다. 단순히 인물과 인물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핸드폰>은 물건에 깃든 세태를 하나의 소재로 승화시킨다. 서비스업에 대한 계급적 풍토와 함께 자본적 노예로 몰락한 서민의 심리적 공황을 결부시켜 객석에 전송한다. 스토리는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된다. 진행의 구조가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임팩트가 집중되지 못한다. 병렬로 나열돼야 마땅한 사연들이 직렬로 이어진다. 조합을 이루지 못하고 순열처럼 늘어서있다. 끝에 다다를 때 즈음엔 전반부의 사연이 깡그리 잊혀진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서 문제라기 보단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묶어버린다. 순간적인 장악력은 존재하나 전반적인 지속력이 흔들린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번갈아 통화하듯 산만함이 느껴진다. 물론 교훈 하나는 확실하다. 핸드폰 잃어버리지 마시라. 특히나 은밀한 자신만의 사연을 간직한 것이라면 더더욱.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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