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기이한 일이다. 노인의 육체를 안고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버려진다. 그럼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점차 젊어진다. 그렇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160여분으로 펼쳐놓은 영화의 서사엔 군더더기가 없다. 원작의 뼈대에 붙은 살점들이 꽤나 탁월하다. 노인의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이 점차 젊어지는 와중에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은 이야기 장악력이 대단하다. 벤자민 버튼의 신체적 현상 자체가 모든 사건을 역설적으로 재생시킨다. 하지만 <벤자민>은 단순히 그 흥미로운 현상만으로 눈길을 끌고 말 영화가 아니다. 한 남자의 특별한 삶을 관통하는 애틋한 러브스토리는 실로 깊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만큼이나 그 중후한 로맨스의 깊은 상호작용이 실로 감동적이다. 서로 다른 서사 안에 놓인 두 남녀의 로맨스는 운명적인 모순을 품고 있으나 무언의 진심을 통해 감정을 유지하고 끝내 보존한다. 흥미로운 사건(A Curious Case) 속에 놓인 감정의 파고가 실로 인상적이다. 기이하지만 실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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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보이> 단평

cinemania 2009. 1. 26. 20:01

전직 수영국가대표 출신인 천수(강우)는 도박판에서 크게 벌어 남은 인생을 휴양처럼 보내려 한다. 하지만 한번의 실수에 꿈은 날아간다. 패 한번 잘못 봤다가 빚더미에 앉아 패가망신할 처지가 된다. 하지만 일말의 기회가 찾아온다. 마린보이가 되는 것. 바다의 왕자가 아니라 마약밀매를 위한 생체보관함이 돼서 바다를 헤엄쳐 건너야 한다. 수장되기 좋은 운명이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마린보이>는 일방통행이 예상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다양한 캐릭터로 드라이브를 걸더니 방향표지판을 늘린다. 완벽한 지도를 제시하진 못해도 방향변화에 따른 좌표제시가 적절하다. 진짜 물건인지 뻥카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제공되는 정보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은근히 천연덕스럽다. 인물간의 관계에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복마전이 거듭되며 흥미를 유발하고 이를 빌미로 단순한 플롯에 지구력이 발생한다.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도 제법 인상적이다. 대수롭지 않을 것 같던 순간들이 복선처럼 되새김질되며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새로운 발견까지는 아니지만 즐길만한 수위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 게다가 시의 적절한 대사까지 겸비한다. 한국을 떠나고 싶다니, 이 나라 국민이 맞군. 대한민국을 뜨고 싶은 청년의 욕망은 결코 영화만의 사연이 아니다. 찰랑거리는 수면처럼 가볍지만 빠져들만한 매력이 있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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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인간(?)의 테러로 비디오 대여점 테이프의 내용물이 모두 지워진다. 빈 깡통처럼 비디오만 남고 영화만 사라졌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가게는 엉망이 되고 종업원은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사고의 주범인 친구는 넉살 좋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채우면 되지. 비디오 대여점이 영화 제작소로 탈바꿈한다. 그들만의 <고스트 버스터즈>가 제작되고 대여되며 비로소 시작된다. 친절하게 되감아 달라는 비디오 대여점의 작은 소망과 무관하게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로 명작들을 되감아버린다. 간과할 수 없는 영화 속 명장면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재해석되고 단편적이지만 유쾌하게 나열된다. 때때로 두서 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덜컹거리지만 그 끝에 건질만한 감동이 우러난다. B급 마인드로 무장한 유희를 빌미로 전설적인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을 복원하기까지, 그 두서 없는 짝퉁 사연의 말미에 감동의 체온이 느껴진다. 문화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자신만의 문화를 찾은 대중의 눈빛이 반짝인다. 대중들이 객석의 소비자로 밀려나버린 시대에서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창작의 공유를 통한 유희적 인간의 복원을 감동적으로 설득한다. 잘 만든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화라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비카인드 리와인드>가 그렇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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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숏에 담아낸 풍경들이 저마다 장관이다. 인물 너머에 펼쳐지는 풍경들도 좋은 밑그림이다. 그저 카메라에 잡기만 해도 그림이 되는 풍경들로 가득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호주를 위한 영화다. 게다가 호주가 낳은 세계적인 배우 니콜 키드만과 휴 잭맨까지 출연한다. 바즈 루어만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사랑과 전쟁, 인간과 자연을 아로새기는 거대한 대서사로 기획했다. 특히 과거 영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얻었던 호주의 수난사를 위로하고자 한다. 특히 노예로 착취된 혼혈2세들, 일명 빼앗긴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성찰보단 호강에 가깝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스토리는 초호화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스토리는 안이하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활공하는 카메라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방만한 이야기에 방대한 이미지가 산만하게 흘러 넘친다. 저마다 제 빛을 내느라 응집될 겨를이 없다. 호주의 절경도, 배우들의 열연도, 방만한 서사도, 거대한 규모도, 하나같이 서로를 배려하지 못한다. 많은 것들이 보이긴 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게 없다. 그저 거대한 전시관을 보고 나온 기분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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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Movie Best&Worst 5

culturist 2008. 12. 8. 03:05

노컷뉴스에서 부탁한 리스트. 기준은 2008년 국내 개봉작. 대단할 것도 없고 지극히 사적인 리스트이니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 저러쿵, 은 사양하겠음. 일단 베스트 5편을 뽑고 생각해보니 한국영화가 한편도 없다는 것이 고민스러웠지만, 5편 모두 훌륭한 작품이니 후회되진 않는다. 워스트 5편은 뭐, 보시는 그대로. 더 졸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리스트를 작성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참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나름대로의 이유 때문에 누락하기가 참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있지만 어쨌든 정해야 하기 때문. 게다가 종종 놓친 영화도 있고.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봤지만 정말 보고 싶던 어떤 영화는 못보기도 했고. 결국 사적인 애정이 뒷심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 중, <다크나이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스노트 L: 새로운 시작>의 짧은 단평을 남긴다. 여하간 그렇다. 2008년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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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마리의 개가 사납게 내달린다. 사나운 개떼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다. 청자는 감독 자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과거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아리 폴만 감독의 자전적 성찰이다. 동시에 그 잔인한 기억에서 상실로 도피한 자의 뒤늦은 참회이자 치유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현재 고백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기억을 복원해나간다.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취하는 건 <바시르와 왈츠를>이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가 어떤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착시와 연동된 까닭이다. 비극을 목도한 이들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적 상흔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과 실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격전이 펼쳐지는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서 스텝을 밟으며 기관총을 사격하는 병사의 모습 위로 왈츠가 흐른다. 우아한 이미지 사이로 비통한 정서가 유유히 새어 나온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결과가 담긴 실제적 풍경이 등장하는 말미에 도달하면 그 모든 이미지의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환기된다. 승자도 패자도 소용없다. 살아남은 자는 지울 수 없는 업보의 여생을 떠안게 될 뿐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거대한 비극에 압사당한 인간 그 자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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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단평

cinemania 2008. 11. 12. 22:53

<렛 미 인>은 기본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 영화다. 소년과 소녀의 만남은 플라토닉한 로맨스의 숭고한 미를 체감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벼운 장치 하나로 평면성이 극복된다. 천진난만한 로맨스의 배후엔 질겁할만한 공포가 창백하게 잠복해있다. 투명함과 창백함을 지닌 중의적 풍경의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를 함께 담아내기 좋은 공간이다. 한적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사라지면 눈 밭에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따돌림 당하는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는 외로움의 반려자로 서로에게 기댄다. 무심한 세계 속을 외롭게 전전하던 소년은 소녀와의 기이한 로맨스를 통해 비로소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경악할만한 악의를 환상적인 순수로 구원하는 비범한 재능을 가미한 러브스토리다. 황홀하여 잊혀지지 않을 만큼.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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