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의 연설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2008년 부시 정권 말기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 존 맥케인과 경합을 벌이던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조지 부시 미국 전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전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과 같은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이 심심찮게 귀를 파고 든다. 만약 당신이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하드보일드한 킬러물 정도를 예상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기대가 빗나갔다는 예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브래드 피트의 베니스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조지 히긴스의 1974년작 범죄 소설 <코건의 거래 Cogan’s Trade>을 모티프로 <킬링 소프틀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코건의 거래>와 <킬링 소프틀리>의 이야기 줄기는 유사하다. 보스턴의 도박장에 들이닥친 강도로 인해서 얻은 손실의 책임자를 가리기 위해서 갱단은 전문적인 해결사 즉 킬러를 고용한다. 문제는 이미 한차례 그 강도질을 벌였다가 용서받았던 이가 갱단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의 논리는 이렇다. 도박장을 턴 강도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태가 반복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
<킬링 소프틀리>의 서사는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가 붕괴된 부시 정권 말기의 미국 사회다. <코건의 거래>가 발표된 시기는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74년이다. <코건의 거래>가 <킬링 소프틀리>만큼이나 경제적인 위기 상황을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킬러물이란 장르적 속성을 공정한 거래와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은유하는 그릇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킬링 소프틀리>는 확실히 그렇다. 코건은 도박장을 턴 범인만큼이나 그 범죄 행위를 따라 하게 만든 주범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 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경제범들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평가됐던 지난 서브 프라임 사태가 연상되지 않나?
오바마와 부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들은 영화의 극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으로 인물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국인의 비전을 웅변하는 오바마의 대선 출마 캠페인 연설이 오버랩되는 것부터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형태나 인물의 행위와 맞물릴만한 음성이 마치 주석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은유인 동시에 장치적인 위트다. 킬러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국가의 행태와 유사하게 어울려 보이도록 설계된 은유인 동시에 인물의 행위를 반어적으로 설명하는 위트의 장착에 가깝다. 이를 테면 카페에서 코건이 남겨놓은 팁을 가로채려는 뚱뚱한 하수인에게 “팁을 내려놔. 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돼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 속의 부시는 말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는 하드보일드한 영화다. 도박장 강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레이 피오타가 연기한 마키가 갱단에게 떡이 되도록 맞는 신에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시점숏을 통해 사실감 있는 구타 장면을 감상하게 만드는 등 생생한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신이 더러 존재한다. 반면 고속촬영을 통해서 그 폭력성에 극단적으로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완성된 코건의 총격 암살 신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우아하다. 흥미로운 건 이 폭력적인 장면의 대립적인 체감이 코건의 의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암살을 생각했을 뿐, 린치를 가하며 책임을 규명하길 원하지 않았던 마키의 구타 신이나 직접 암살을 시도할 의사가 없었던 최후반부의 살인 신의 사실적인 폭력성과 반대로 그가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한 중반부의 총격 살인 신은 그야말로 ‘소프틀리’하게 묘사된다. 그가 킬러로서 추구하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지는 반어적인 BGM도 흥미롭다. 조니 캐쉬, 케니 레스터 등 평온한 감성이 깃든 고전 팝들이 극의 분위기와 대비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지독한 농담 같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레더 재킷과 대비될만한 수트 착장으로 일관된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해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레이 피오타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물론 극 초반을 이끄는 스쿳 맥네어리와 벤 멘델슨 콤비 등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그 끝에 다다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브래드 피트와 리처드 젠킨스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채운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대비적 상징으로 읽히는데 결말부에 다다라 명확하게 정리되는 브래드 피트의 대사를 통해서 이 영화에 첨언된 정치적 코멘트들의 역할이 명징하게 와닿는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가 울려 퍼지는 바에서 펼쳐지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저 자식은 우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미국에서 살고 있어. 미국에선 저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내 돈을 뱉어내!”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 영화다. 미국을 까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미국이란 비즈니스 브랜드 그 자체에 관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패이보릿 미드로 알려진 <홈랜드>는 이라크 파병 중에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미군 병사 니콜라스 브로디 하사(데미안 루이스)가 이라크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군들에게 발견되어 8년 만에 고국에 귀환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은 세 개의 축으로 나뉜다. 갑작스럽게 구조된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CIA의 정보원 캐리 매티슨(클레어 데인즈)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큰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브로디가 자신의 죽음에 익숙한 삶을 살아오게 된 아내와 자녀들과 겪게 되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브로디 자신의 혼란이 주변부의 줄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홈랜드>에서 가장 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브로디의 정체다. 알 카에다 조직의 수장 아부 나지르를 추적하는 캐리는 테러리스트 조직인 알 카에다에게 납치된 뒤, 8년 만에 생환하며 미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추앙 받는 그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이한 징후로 지목하며 불법적인 도청과 감시 행위까지 불사한다. <홈랜드>의 묘미는 거기 있다. 캐리의 의심스러운 시선과 함께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다가도 흐릿해지길 반복하는 브로디의 정체로 인해서 혼선을 거듭하는 상황이 흥미를 자아낸다. 가장 큰 백미는 캐리와 브로디의 관계에 있다. 완벽하게 괴리돼 있던 두 인물의 관계가 우연한 접점을 통해서 급속하게 근접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홈랜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떠밀려간다.
<홈랜드>로 인해서 <제로 다크 서티>를 떠올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자정 이후 즉 ‘00시 30분’을 지칭한다는 의미의 <제로 다크 서티>는 네이비 씰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팩션이다. 사실 빈 라덴의 사살 이전에 픽션으로 기획됐다가 제작 도중 빈 라덴이 실제로 사살당하자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했던 <제로 다크 서티>는 러닝 타임의 팔 할을 빈 라덴을 찾아내기 위한 CIA 요원들의 분투와 고뇌에 할애한다. <제로 다크 서티>의 하이라이트인 결말부의 빈 라덴 사살작전 신을 보기 위해선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적의 몸통을 찾고자 불법적인 고문까지 자행하는 CIA 요원들과 끊임없이 꼬리를 끊고 몸통을 감추는 빈 라덴의 숨바꼭질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실패의 연속 안에서도 끝까지 빈 라덴의 실체를 쫓는 마야(제시카 차스테인)의 피로감과 좌절감은 되레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진다.
9.11은 미국인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공포처럼 보인다.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유명했던 미국 케이블 채널 뉴스 보도국의 뉴스 제작기를 그린 미드 <뉴스룸>은 7번째 에피소드에서 빈 라덴 사살 작전에 관한 첩보를 보도하는 과정을 다룬다. 흥미로운 건 그 끝무렵이다. 결국 그 첩보가 팩트로 확인되자 그 이성적인 보도국 일원 전체가 환호하는 광경에서 확인되는 건 뼛속까지 깊게 서린 9.11에 대한 체증이다. 빈 라덴의 사살은 그야말로 미국인 전체를 위한 살풀이였던 셈이다. 포스트 9.11에 관한 이야기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런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어떤 소재거리 이상의 현실성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심리를 품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홈랜드>와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인들에게 최고의 안전지대라고 여겨졌던 미국의 심장부가 타격 당한 이후로 겪은 공황을 다룬다. 세계인들에겐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이었던 9.11 테러의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 이상의 질환이 됐다. 두 작품은 바로 현재 미국의 심리를 대변하는 바로미터에 가깝다.
그런 현실 속에서 미국에 뿌리 깊은 공포를 주입한 테러리즘의 수장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는 마야와 캐리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공포와 그로 인해 축적된 피로에 시달린 미국 사회의 잠재된 심리를 대변하는 육체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두 작품이 그 심리의 그릇으로 여성의 육체를 빌리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두 여성은 각자 알 카에다의 수장인 빈 라덴과 아부 나지르를 쫓으며 병리학적인 강박 증세를 드러낸다. 그리고 강인하고 단단한 남성적인 심리보단 섬세하고 예민한 심리로 보다 첨예하게 날을 세운 심리를 묘사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여성의 육체는 첨예해진 미국의 심리를 담아내기 좋은 그릇으로서 손색이 없다.
캐리가 쫓는 아부 나지르는 포스트 ‘빈 라덴’에 가깝게 설정된 알 카에다의 수장이다. <홈랜드>는 완전한 픽션이고, <제로 다크 서티>는 현실에 기반한 팩션이란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두 작품의 현실성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9.11 테러 장면에서 시작되어 빈 라덴을 추적하는 <제로 다크 서티>만큼이나 아부 나지르를 쫓는 <홈랜드> 역시 여전히 테러에 대한 공포와 피로가 적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미국 사회의 포스트 9.11 증후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까닭이다.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캐리가 상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그의 신변을 감시하는 과정은 점차 그녀를 궁지로 몰아간다. 그 과정은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의심스럽게 비춰지기 마련인데 그녀의 추측이 대단히 얕은 단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9.11 테러 이후로 미국인들의 심리에 깊게 내려앉은 공포와 방어적인 심리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차 그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그 불안한 심리에 대한 어떤 비판 의식도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미궁에 갇힌 것처럼 그렇다.
<제로 다크 서티>는 허무에 가까운 물음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결국 빈 라덴을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마야는 그 성과 앞에서 환호를 지르기 보단 길 잃은 표정을 짓고 끝내 눈물을 흘린다. <홈랜드>는 <제로 다크 서티>가 주지 않은 답변 혹은 닿을 수 없었던 결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끝내 아부 나지르를 찾아내고 사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빈 라덴은 죽었지만 미국의 전쟁은 여전히 도처에서 펼쳐지고 있다.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공격받고 있다. 공격받을 것만 같다. 불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결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복잡한 미로를 헤쳐 나왔던 캐리는 다시 출구라고 믿었던 곳이 입구임을 깨달았고, 브로디의 여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섰거나 어쩌면 다시 원점으로 끌려온 것만 같다.
미국의 전쟁은 이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돼버렸다.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누가 시작한 전쟁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건 막아야 하고, 멈출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빈 라덴의 주검을 확인한 마야는 사실 누구보다 명확하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그 허무가 지난 날의 고통을 되레 명징하게 되살렸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포스트 9.11 시대의 나침반과 같다. 그리고 <홈랜드>는 올해 9월에 시즌 3로 되돌아온다. 이 피로와 공포는 보다 오래갈 것이다. 앞으로도 현실의 브라운관이나 영화 속 스크린으로 그들의 전쟁을 계속 지켜볼 가능성이 여전히 다분하다는 이야기다. 혹은 그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거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최초’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손쉽게 수식된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 꼽히는 이모젠 커닝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사진가’라는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이모젠 커닝햄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심벌린>의 공주 이모젠으로부터 빌려온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남다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그녀가 그 운명에 눈을 뜬 건 시애틀 워싱턴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06년경이었다. 등록금 원조의 명목으로 식물 사진 슬라이드 제작에 참여했던 그녀는 사진에 매료됐다. 훗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예술 위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으며 예술학교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사진가가 되길 원하진 않으셨다.” 왕이었던 아버지 심벌린이 점지해준 고귀한 신분의 남자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스스로 선택한 공주 이모젠처럼 이모젠 커닝햄은 아버지의 바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이모젠 커닝햄은 70년의 세월을 카메라 뒤에서 살아왔다. 사진의 프레임을 회화의 캔버스처럼 인식한 회화주의적인 인물사진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는 점차 사실적인 즉물주의로 나아가며 본격적으로 셔터를 눌러나갔다. 이모젠 커닝햄은 피사체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추구하는 작가였다. 그녀가 바라본 뷰파인더 너머에는 이 세계의 맨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관능적인 클로즈업으로 다양한 식물들을 스펙터클하게 포착하거나 다양한 남녀의 나신을 고요하게 응시한 사진들은 이모젠 커닝햄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모젠 커닝햄이 수많은 식물들을 근접해서 찍었다는 사실은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를 과감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필름에 담아냈다는 점과 맞닿는다. 그녀의 누드는 섹슈얼리티가 아닌 오리지널리티에 가깝다. 그녀는 인간의 나체에 탐닉하는 대신 인간의 원형, 즉 육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적인 가치를 복원한다. 또한 그녀가 클로즈업한 식물들의 형태는 우리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던 그 작은 형태 속에 담긴 세밀한 세계를 광대하게 비춘다. 이 말없는 피사체들의 나신이 저마다 하나의 우주로서 완성된 세계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원초적인 형태 자체가 이미 하나의 미학적 완결체임을 깨닫게 만든다.
“사진에 관한 나의 흥미는 미학과 관계가 있고 모든 것엔 작게나마 미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모젠 커닝햄과 에드워드 웨스턴, 안셀 아담스, 소냐 노스코비악 등과 함께 참여한 F64 그룹은 극도로 사실적인 형태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즉물주의와 사실주의의 미적 가치를 발전시켜나갔다. 대형 카메라 조리개의 최대값을 의미하는 F64 그룹은 정밀 묘사가 가능한 카메라의 기계적인 특성을 이용해서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사진 예술의 심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새로운 가능성이라 제시했고 이모젠 커닝햄은 그 그룹에 속한 유일한 여류사진가에 머물지 않고 비전을 제시하는 중심으로 자리했다.
화학 전공으로 사진 인화에 정통했던 이모젠 커닝햄은 <여성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사진술>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여성이 단순히 남성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영역을 넘어서 자립적인 인간이자 자존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식물을 찍었다는 걸 벌써 잊어버렸을 거다. 빛에 노출되는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최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팔고자 하니까.” 1976년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모젠 커닝햄은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서가 아닌 사진가 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셔터를 눌렀던 그녀는 여성을 넘어선 진정한 사진가였다.
The Poetry of Form : Imogen Cunningham
이모젠 커닝햄 展
5월 17일부터 6월 23일까지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 이모젠 커닝햄의 사진전이 열린다. 1993년에 출간된 커닝햄의 도록의 제목을 차용한 이번 전시회는 12점의 빈티지 프린트와 디지털 프린트 20점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미국 알래스카주 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앵커리지는 세계적인 무역 중계지이자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계획 도시다. 그리고 앵커리지는 평균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겨울과 함께 전세계의 영화들을 맞이한다. 올해로 11회를 맞이하는 앵커리지 국제영화제는 12월 2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다. 개막작 <이누크>(2010)의 상영으로 축제의 포문을 여는 이번 영화제에서도 추위를 뚫고 날아온 필름들의 겨울나기가 시작된다.
‘미국의 톨킨’이라 불리는 조지 R. R. 마틴의 5부작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의 최종편 <드래곤과의 춤>이 지난 7월에 발간됐다. 첫 작품 <왕좌의 게임>이 발표된 건 1996년이었다. 그리고 2007년, HBO와 TV시리즈 제작이 논의됐다. 2011년 4월 17일, 10부작 중 첫 회가 방영된다. 약 220만 명의 시청자가 TV 앞에 모였다. 그래프는 내려가는 법이 없었다. 6월 19일에 방영된 최종회는 300만 명을 넘었다. <왕좌의 게임>은 IMDB의 역대 TV시리즈 순위 중 4위에 랭크됐다. 에미상 13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비견될 반향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제야 한 시즌의 걸음마를 뗀 작품이 이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기란 드문 일이다. 마틴은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왕위 쟁탈전이었던 영국의 장미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TV시리즈의 제작과 각본을 맡은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이를 ‘중간계(middle-earth)의 <소프라노스>’라고 정의했다. 그러니까 <왕좌의 게임>은 악의 제왕을 물리치기 위해 벌이는 영웅전기가 아니란 의미다. <왕좌의 게임>은 ‘웨스테로스’라는 가상의 대륙에 있는 세븐 킹덤의 왕좌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판타지물이다. 스크린 너머의 가상의 세계는 흡사 중세 봉건주의 사회의 유럽을 옮겨놓은 것만 같다. 전쟁의 위협을 잊은 지 오래인 왕국은 태평성대 속에서 형성된 태풍의 눈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거대한 탐욕의 소용돌이는 드높던 명예를 목 베어 내걸고 조롱한다. 누군가는 이를 되살리기 위해 몸을 팔고, 어떤 이는 그 삶을 판다. <왕좌의 게임>은 이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꿈틀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징후를 드러냈을 뿐이다. 선악의 대립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알을 깨고 나온 저마다의 욕망들이 눈을 뜨고 날개를 펼 때, 결국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웨스테로스의 여름은 지났다.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다. 냉혹한 전쟁의 계절을 그릴 2시즌 <왕들의 전쟁>은 내년 4월 봄에 방영된다.
(beyond 10월호 Vol.61 '2011 ENTERTAINMENT ICONS - BROADCAST')
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스웨덴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이에 앞서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바 있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홍보에 따르면) <렛미인>은 <렛 미 인>의 리메이크작이 아닌, 동일한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렛미인>은 분명 <렛 미 인>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비교군의 운명을 타고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스웨덴의 적막한 설원을 배경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페이소스와 은밀하게 새어 나오는 서스펜스가 공존하는 <렛 미 인>은 한 소년의 성장드라마이자 잔혹한 멜로이며 특이한 기질을 자랑하는 장르물이기도 하다. <렛미인> 역시 이런 범주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장르적 특성에 보다 접근한 결과물이라 말할 수는 있지만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으로부터 크게 차별화된 이미지를 그리려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되레 잔혹한 결말부는 원작보다도 스웨덴 버전의 작품으로부터 얻은 영향력을 감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분명히 다른 작품이다. 스웨덴을 배경으로 둔 <렛 미 인>의 정적인 감수성은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두 정서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렛 미 인>이 반투명한 유리 너머의 이미지와 같이 불투명한 감정을 매개로 신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라면 <렛미인>은 보다 뚜렷한 단선을 지닌 채 보다 감정을 위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보다 확실한 점을 찍어내는 영화에 가깝다.
이는 어린 배우들의 표현력과 기시감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감상자가 얻을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의 수집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감상을 완성해가는 전자에 비해 후자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동원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보다 단단하게 전달한다. 이는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차이를 좁히고 이를 통해 보다 확실한 형태의 감정으로 관객을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렛 미 인>의 기준에서 <렛미인>은 보다 친절한 영화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협소한 결과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렛미인>을 보다 폄하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나름의 성취를 품은 영화다. 무엇보다도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은 <렛 미 인>에 비해 보다 정치적인 텍스트를 삽입하고 있다. <렛 미 인>이 감수성과 연동되는 이미지의 활용이 돋보이는 영화였던 것과 달리 <렛미인>은 보다 직설적으로 풍경 자체를 시대적 배경과 연동하며 영화의 해석적 방향성을 변화시킨다. 도입부부터 레이건의 연설을 비추고 이를 중간중간 삽입해나가는 모습은 <렛미인>이 서정적인 뱀파이어물로서의 특이성에서 벗어나 간접적인 정치적 메타포를 웅변하는 작품이란 사실을 예감하게 만든다. 물론 서사적 나열의 차이는 두 영화에서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리감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두 영화의 정서적 차이에 한 몫을 거드는 요인이다. 특히 뱀파이어 소녀 애비를 연기하는 클로이 모레츠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를 오가듯 성숙한 감정을 전달하며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다. 이 역시도 스웨덴 버전과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결과인데, <렛 미 인>의 감정적 중심이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에게 놓인 영화였다면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애비에게 보다 많은 감정적 이입을 하게 되는 영화다. 이는 캐릭터로부터 드러나는 집중력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많이 다른 영화는 아니지만 두 영화의 차이는 분명 유효하다. 그리고 두 작품은 감상의 고지를 선점한 작품을 뛰어넘을 만큼의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차기작을 완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체감하게 만드는 좋은 비교군이기도 하다.
<렛미인>을 통해 굳이 <렛 미 인>과의 우월성을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렛미인>은 <렛 미 인>만큼이나 나름의 결정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토마스 알프레드슨에 앞서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을 먼저 봤다면, 혹은 이 영화가 보다 앞서서 제작됐다면 감상은 얼마나 달라졌을지에 대한 의문은 어쩔 수 없겠지만.
“Facebook me.”우리 식대로 하자면 일촌 신청해달라는 의미로 통용될만한 이 말은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전세계적인 열풍을 대변하는 유행어다. 207개국의 5억여 명의 회원이 이용한다는 페이스북은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자 250억 달러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글로벌 기업의 이름이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이 개발한 페이스북을 통해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기업자 자리에 오르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의 신화가 됐다.
<소셜 네트워크>는 바로 그 페이스북의 성장에 관한,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에 관한 서사를 다룬 이야기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과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을 위해 마련한 전기가 아니다. 페이스북 이전까지 소셜 네트워크라는 명칭이 존재했듯이, 이 영화의 제목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명확하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라는 시스템 안에 귀속된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페이스북을 다룬, 그 시작이 된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을 다룬 이 영화가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으로 명명된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온라인 관계 맺기 그 자체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바드대에 재학 중인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가 자신의 애인인 에리카(루니 마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시작부터 페이스북을 개발하고 성공을 거둔 뒤, 두 개의 소송을 겪게 되는 결말부까지를 다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큰 줄기로 이뤄진 순행적인 플래쉬백의 서사의 중간 중간에 현재 시제의 두 시점으로 나눠진 두 개의 소송 합의를 이행 중인 주커버그를 비춘다. 다층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서사의 흐름은 매끄럽고, 엄청난 대사량을 지니고 있으며 방대한 정보량을 쏟아냄에도 극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거대한 정보가 유려하게 흐른다.
<소셜 네트워크>는 스토리의 운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큰 너비의 서사를 주요한 맥락의 덩어리로 나눈 뒤, 다양한 캐릭터들의 개별적 서사를 그 틈새에 밀어 넣고 매듭처럼 이야기들을 연결해낸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살피는 동시에 인물의 주변부를 조망하며 시대적 공기를 포착한다. 특히 관조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은 데이빗 핀처가 거장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들 정도다.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훌륭하다. 캐릭터들의 특성을 묘사해내는 방식과 극의 흐름에 있어서 저마다의 캐릭터들이 뚜렷한 역할을 이룸으로써 영화의 시야는 폭넓게 확보되고 극의 흥미는 그만큼의 위력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서사는 결말부를 통해 비춰지는 거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여정이나 다름없다. 전세계를 연결하는 광대한 네트워크망을 창조해낸 이가 현실에서 혼자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고 심각한 고독을 체감하게 만든다. <소셜 네트워크>는 광역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되레 지독한 고립감에 시달리게 되는 아이러니 그 자체를 비춘다. 가입과 로그인을 통해 자신만의 공간을 개설하고 전세계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세계로부터 로그아웃한 뒤, 두 발을 딛은 현실 위에서 체감하게 되는 고독이란 오늘날 현대인에게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그 실풍경을 따뜻한 동정을 담아 응시한다.
실존 인물을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얼마나 사실성에 충실한 작품인가라는 의문에 있어서 이 작품은 논픽션에 기초한 2차적 생산물, 즉 결론적으로 가공된 픽션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마크 주커버그가 <소셜 네트워크>를 본 뒤,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처럼 <소셜 네트워크>와 마크 주커버그 사이에 놓인 진실의 간극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 그 자체를 둘러싼 거대한 아이러니로서의 드라마로도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는 곧 <소셜 네트워크>가 품은 사실로서의 가치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마크 주커버그가 아닌 당신이다. 당신은 소셜 네트워크 하고 있습니까? 알고리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당신의 진짜 네트워크는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진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