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as an actor
박신양은 말을 아낀다
마치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러웠다. ‘뭐라고 말하지?’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마치 단추가 풀다가도 금세 다시 채워버리듯, 박신양은 속내를 뱉다가도 이내 삼켜버렸다. 그래도 건질 만한 언어들은 있었다.
화보 촬영할 때 조금 경직된 느낌이던데.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감정이나 연기를 만들어낸다는 게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잖아. 보기엔 자연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막상 모델이 되면 뭔가 만들어내야 된다는 중압감이 생겨 긴장을 풀기 어렵지.
긴장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부들부들 떠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원래 긴장하는 편이긴 하다. 다만 연기할 때만큼은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긴장하지 않는다. 긴장한 채론 연기 못한다. 멜로도 못해. 그러니까 이완돼 있어야 되는데 극을 위해선 그런 긴장도 조절해야지. 마냥 풀어져 있다고 되는 건 아니니까.
촬영장에선 어떤가.
이제 현장에 익숙해졌지. 불필요하게 긴장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거 같아. 처음 할 땐 현장 분위기라든가, 사람들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는데 이제 필요한 건 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경력도 어느 정도 찼고.
<박수건달>은 5년 만의 영화다.
오랜만이지. 그렇게 됐어. 그런데 영화에 대해 할 얘기가 별로 없네. 일단 웃기는 영화다.
<달마야 놀자> 이후로 두 번째 코미디영화이기도 하고.
<박수건달>도 그 작가가 쓴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코미디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보지? 사실 나 코미디 좋아하거든. 물론 허무한 코미디는 별로인데 <달마야 놀자>처럼 얘기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코미디는 좋아. <박수건달>도 그래서 했고. 공교롭게도 내가 한 코미디영화 두 편을 한 작가가 썼네. 다른 사람들이 박규태 작가를 어떻게 평가할진 몰라도 난 대단하다고 생각해. 천재적이야.
예상하기 쉬운 영화 같다.
그렇지 않을걸. 우리 영화를 뭐라고 설명하지? 이거 참.
플롯은 단순한데 캐릭터의 디테일이 중요한 영화 아닌가?
스토리도 엉뚱해 보일 거다. 그 와중에 엄청난 휴머니티가 있기 때문에 그걸 살리려고 애썼다. 그래서 했고. 사실 코미디도, 캐릭터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니까, 변주가 쉽지 않았다.
정확히 이해되진 않는다.
영화의 4분의 3까지 신나게 웃다가 나머지는 펑펑 울 거다. 이거 스포일러인가?
캐릭터에 어떤 매력을 느꼈나.
그냥 웃겼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런 거 생각 안 해. 이 영화가 끝나면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까, 그것만 생각하지. 캐릭터도 중요하긴 한데 그런 건 두 번째다.
슬랩스틱도 하는 거 같던데?
극을 위해 필요한 거라 생각하고 행동했지, 그냥 웃기려고 한 건 없다고 봐. 절묘하게 선을 그었다고 할까.
방송으로 자주 볼 수 없어서 작품 할 때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많이 한 거 아닌가? 얼마만큼 해야 많이 한 거야?
그나마 올해는 <두드림>에도 출연하고 <스타특강쇼>에도 출연했다.
펀(FUN) 장학회 홍보 때문에 한 건데, 틈틈이 해두길 잘했네. 아니면 언제 홍보할 거야. 영화 홍보할 때 하려면 힘들거든.
의외로 빈틈이 있는 사람 같더라.
나 원래 가벼운데.
사실 배우 박신양은 완벽주의자처럼 보이니까.
연기할 때는 진중하게 하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끝나서도 그러면 안 되잖아.
박수무당을 찾아갔다던데, 남자 무당이 많나?
생각보단.
꼭 그렇게 진짜 실물의 직업인을 찾아가야만 하나.
직접 연기한다고 생각해 봐. 의사는 심각한 척하고, 건달은 어깨에 힘주고? 그럼 무당은 어떻게 하는 건데? 어렵지. 그만큼 생소하니까 흥미롭고 도전해 볼 만한 일이긴 했다. 게다가 무당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보인다는 컨벤션도 없어. 무당 영화가 별로 없잖아. 게다가 그걸 코미디로? 쉬운 숙제가 아니라니까. 그래서 무속인들 만나서 물어보고, 굿도 많이 보고, 그런데 막상 인터뷰하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더라. 어느 날 갑자기 몸이 너무 아프고, 이래도 저래도 낫지 않았다는데 과학적이지 않으니까 믿을 수가 있나. 그 와중에 이해하고, 발견하고, 알아내려고 노력했지.
직접 보지 않으면 연기할 수 없는 건가?
그렇진 않다. 그냥 하면 된다. 다만 나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걸 좀 더 찾아내려고 연구하는 거지. 당연히 그래야 되고.
낯선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나.
스리슬쩍? 잘? 그냥 가면 돼. 처음엔 얼떨떨한데 가서 약간만 용기를 내면 괜찮아진다.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냐?
낯을 가리는 편이라 들었는데.
일할 땐 뻔뻔하게 일한다. 대학교 시절엔 모르는 사람 찾아가서 대화한다는 게 창피해서 떨리고 식은땀 나는 일이었는데 20년 정도 하니까 이젠 탐험 같다. 어디로 갈까, 누굴 만날까, 재미있어.
배우로서 좋아하는 배우가 있나?
톰 행크스, 로빈 윌리엄스, 찰리 채플린 그리고 그 사람 대단하지 않나? 모건 프리먼? 특별히 하는 것 없이 집중력이 대단한 거 같아. 정말 대단해.
고3 시절의 충동적인 결심으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고 들었다. 그 전의 장래희망은?
건축과를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좋아 보여서. 특별히 뭘 알고 싶었던 게 아니었고, 여자들한테 멋있어 보이려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어떤 공간이 힌트를 불러일으키는 게 재미있다. 머리 식힐 땐 항상 뭔가 생각한다. 주로 공간에 대해서. 왜 그럴까. 그냥 재미있다. 누군가에겐 만화 보는 게 그렇듯이. 공간이 사람 사이를 변화시킨다. 사람이 어떤 틀에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정말 많이 달라 보인다. 그런 생각이 재미있지. 건축 전공자도 아닌데 많은 시간 동안 머리 속에서 자꾸 집을 짓고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정말 많이도 지었네.
뭔가 하나에 빠지면 엄청 몰입하는 편?
잘 모르는 거, 막상 해보면 재미있지. 언젠가는 여러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하나 지을 거 같다. 나오시마라고 아나? 원래 쓰레기 섬이었는데 안도 다다오 같은 건축가들이 모여서 건축 섬을 만들었다.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엄청난 건축물들이 거기 생겼어. 게다가 매년 미술축제도 여니까 사람들이 그걸 보러 거길 가. 나도 그랬고. 여행 다니면서 미술관 가본 적 있나? 미술관은 보통 아무나 설계하지 않거든. 정말 ‘핫’한 건축가들이 설계한단 말이지. 각 나라나 도시를 대표할만한. 그네들이 만들어놓은 걸 보면 정말 멋진 거 같아. 사람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연구하는 게 느껴져. 영화도 사람의 감성을 다루지만 건축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
캐릭터로 몰입한다는 것도 어떤 공간에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쉬운 과정이 아닌데, 이제 조금 구력이 붙은 거 같다. 그럴 때도 됐다. 16년 일했으니까. 신인은 아니잖아. 과정 자체가 생소하진 않다. 본론에 접근하는 속도가 빨라진 거 같다.
신내림을 받은 듯이 몰입하고 빠져 나오지 못하는 배우들이 있지 않나. 그런 식으로 연기하는 편은 아닌 거 같다.
점점 아마추어 습성을 벗어나고 있는 거지. 대학교 때는 못 벗어나서 헤매고 그랬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거다.
일단 동물적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는 아닌 거 같다.
나도 동물적이고 싶다. 다만 기본기와 지구력이 뒷받침되는. 사실 연기할 땐 이성적이거나 교과서적일 이유가 전혀 없어. 그냥 본능에 맡기면 돼. 그리고 결코 교과서적인 영화도 없을걸. 그런 건 고르지도 않고. 내가 봐도 재미없거든. 배우가 연기를 계속하려면 꾸준히 트레이닝해야지. 그렇게 배웠다. 나만 그러는 거 아니잖아. 아닌가?
25년간 새벽 발성 연습을 지속해 왔다던데.
지금도 하지.
그게 가능한가?
야구선수가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규칙적인 편?
아니. 그것만.
정말 하루도 빼먹지 않고?
잠깐 게으름 피우기도 하는데, 하루 건너 하루씩 해도 좋고, 몰아서 해도 된다. 지속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지. 등산을 하면서 병행해도 되고. 연습을 10년 넘게 하면 운동처럼 습관이 된다. 하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 차에서 하거나, 방에서 하거나, 특히 노래방이 좋다. 학생들한테도 노래방 가서 연습하라고 한다. 마음껏 소리 지르고, 발성 연습하라고.
자꾸 ‘학생들’ 얘기하니까 선생님 같다.
애들하고 같이 지내니까 입에 뱄다. 생활이라서.
펀(FUN) 장학회에서 양성 중인 배우의 수는?
10명 정도?
장학회는 어떻게 꾸리나?
웬만한 회사라 할 만큼 팀원이 있다. 일본팀 2명, 운영진이 한 5~6명. 홍보 담당자도 있고. 비상시적으로 일을 진행하고 프로젝트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계속 운영할 사람이 필요하다. 신경 많이 쓰이는 일인데 즐겁게 신경 쓰고 있다.
일본 팀?
일본 팬들 중에 장학회를 지원하는 분들도 있어서.
최근 몇 년 사이엔 드라마 위주로 경력을 쌓았다.
들어오는 작품 중에 고르는데 주로 드라마가 걸리네. 사실 피 튀기는 영화들은 하기 싫었다. 그래서 할 게 없더라. 영화에서 꼭 누굴 죽여야 돼?
불필요한 폭력성이 싫다는 이야기인가?
영화적인 실험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좋은 느낌을 주는 영화를 해야지. 일단 내가 기분 나쁜 영화는 보기 싫다. 그럼 만지지 말아야지. 배우들은 각자의 기준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나 만나지 않고, 아무 데나 가지 않고, 아무거나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나도 그렇다. 자기 인생을 막 다루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그런 기준이 없으면 가치도 없는 거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아름답고, 기분 좋고, 재미있는 느낌. 그런 면에서 <박수건달>도 기분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깡패나 껄렁한 캐릭터를 많이 했다.
나만 하는 건 아니잖아.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역전시키는 의외성이 있다.
그래서 시키나? 의외성이 있어서? 어쨌든 해보지 않은 걸 하면 재미있다. 나중에 기회 되면 껄렁한 거 한번 해봐라.
가끔 캐릭터의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소리 몇 번 들었다. 그러니까 한국에 살고, 지구에 살아도 외계에 사는 것 같아. 진짜는 어떤 모습일까? 저 사람의 위선적인 면은 뭔가? 실제로는 뭐하고 사나? 뭐, 이런 건가?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웃기지.
왜 그런 말을 듣는지 생각해 본 적 없나?
그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 시간 아깝게. 그리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배우 입장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아니, 모르겠다. 어떤 사람에겐 중요한가?
배우라는 직업에서 벗어난 박신양은 심심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엄청 심심하지.
최근 장학회 후원 콘서트에서 싸이의 ‘새’를 부른 영상을 보면 남모를 면이 있는 것도 같고.
그게 평소의 모습은 아니니까.
배우로서의 길을 의심해 본 적 없나.
10년 했다. 10년. 사활을 걸고. 실제로 일해보면 모든 일은 다 똑바로 알게 되기까지 한 10년쯤 고생해 봐야 된다.
일말의 의심도 없었나?
사활을 걸 정도로 한다는 건 의심의 끝에 가보는 거다. 특별히 추론할 수 있는 힌트도 없잖아. 갈 때까지 가봐야지. 별 방법이 없잖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고. 시나리오도 그렇다. 만들어진 걸 보긴 쉽다.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결정들을 제각각 하고 있는 거다. 다 만들고 나서도 확신할 수 있으려면 만드는 과정에선 천 배, 만 배 열을 내서 해야 한다. 조금 심하게 보일 정도로 해야지만 분명히 선택할 수 있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대충 자신 없는 선택을 하면 큰일난다. 사람들 생각도 다 다르고.
드라마 <드라마의 제왕>에서 이름이 언급된 거 아나?
모른다.
<싸인>을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각본을 썼다.
아, 그래서 그런가 보네.
박신양이란 이름 석 자가 톱배우의 예시로 활용된다. 당신이 지금 그런 위치에 있다는 거다. 연기를 시작할 때 이런 위치에 오르고 싶단 야망은 없었나.
죽어라 열심히 연기하겠다는 생각밖에 안 했다. 유명해지고, 그런 건 알지도 못했다. 요즘 애들은 그런 걸 선망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유명해진다는 것에 대해 몰랐다. 관심도 없었고, 그게 좋아서 연기했던 것도 아니고.
어쨌든 좋은 작품을 할 기회가 늘었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건 좋지.
만족하나?
아니, 만족하진 않는다. 좀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거든.
(ELLE KOREA 1월호 No.243 'ELLE inter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