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에서 하얀 여왕으로 등장한 앤 해서웨이의 첫 출연작이자 첫 주연작은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였다. 하루 아침에 공주가 된 소녀의 사연처럼 해서웨이도 하루 아침에 아이돌 스타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돌 스타라는 성을 박차고 나갔다. 퇴폐적인 이미지로 누드신과 베드신을 감행한 <하복>(2005)은 일종의 전환점이었다. 메릴 스트립과 함께 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로 성공적인 경력을 더한 뒤, 제인 오스틴을 연기한 <비커밍 제인>(2007)으로 우아한 기품을 뽐냈다. 진중한 내면 연기를 펼친 <레이첼, 결혼하다>(2008)는 그녀에게 오스카 노미네이트의 영광까지 안겼다. 최근 필름익스피어리언스는 내년 오스카 노미네이트 후보 예상 리스트에 <Love and Other Drugs>(2010)의 해서웨이를 포함시켰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 받는 여배우로 자랐다. 마치 공주가 여왕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영국의 수학자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을 앞세워 1965년에 발표한 동화다.지극히 개인적인 의식의 흐름을 통해 진전되는 서사와 비상식적인묘사가 동원된이 작품은 비논리적인 기괴한 설정들이 도처에 난무함에도 직관적인 상상력과 천진난만한 감성을 동반하며 그 세계관에 대한 호기심을 당긴다. 동명의 제목 그대로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이 창조한 그 기이한 세계관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하지만 팀 버튼은 루이스 캐럴이 손으로 써내려 간 세계를 영상으로 치환하려는 노력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팀 버튼이 참고한 건 비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뿐만이 아니다. 또 한번 앨리스를 통해 특별한 모험담을 그려낸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역시 팀 버튼의 세계로 편입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루이스 캐롤이 아니라 그 결과물이 온전히 팀 버튼의 것이란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본격적인 서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그것처럼 앨리스(미아 와시코우스카)의 굴 속 추락으로 시작된다. 분명 유사한 방식으로 그 특별한 세계관에 침입하듯 발을 들이지만 전반적인 이야기는 그 원판과 다른 뉘앙스를 발생시킨다. 최소한 루이스 캐롤의 원작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애초에 그 세계관에 발을 들일 뿐 재현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원작의 포스트(post)로서 서사를 설정하고 있다. 서사적인 순차로 볼 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후에 등장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 캐릭터와 세계관을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보다 흥미롭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두 작품을 포괄하고 변주하되 어느 쪽에도 부합할 마음이 없어 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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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과 하얀 여왕(앤 헤서웨이)이 서사의 주요 대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트위들디와 트위들럼(매트 루카스)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하는 동시에 재버워키나 도도새처럼,역시 후자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서사의 결정적 줄기에 활용된다. 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그 제목과 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역을 넘어 루이스 캐롤이 창조한 앨리스의 세계관을 뒤엉켜 아우르고 있음을 명시한다. 모자 장수(조니 뎁)와 하얀 토끼(마이클 쉰 목소리)는 두 작품을 포괄하는 상징적 장치에 가깝다.원작에 비해 성숙한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그 세계에 등장하는 소녀와 동일한 인물이되 팀 버튼의 야심을 대변하기 위해 내세워진 캐릭터다. 더 확실히 말하자면 앨리스는 팀 버튼 그 자신이라도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이 완성한 ‘이상한 세계’를 다시 한 번 팀 버튼이 재창조한 이상한 세계다. 궁극적으로 루이스 캐롤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그 세계는 역시나 개인적인 취향을 예술적 감각으로 승화시킨 팀 버튼에게 남다르지 않은 감상을 부여했을 것이다. 덕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팀 버튼 스스로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전적 작품으로 치장했다 해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비정상적 기질을 창의적 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건 분명 여러 모로 남다르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직접적인 대사까지 동원하며 비정상적이라 규정된 창의력에 대한 응원을 전달하기도 한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이지.- 마치 팀 버튼 자신 스스로에게 바치는 헌사이거나 연민과 같은 위로처럼 들릴 정도로 때때로 비장한 느낌이 동원되기도 한다. 앨리스에게 과거에 ‘이상한 나라’에 온 적이 있다고 말하는 ‘이상한 나라’의 캐릭터들은 ‘이상한 나라’의 현실이 꿈이라 믿는 앨리스의 망각을 일깨운다. 이는 팀 버튼 스스로의 다짐이거나 혹은 그가 전달하고 싶은 일종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동심의 망각, 혹은 자유로운 사고의 고갈은 대부분 어른이 되면서 벌어지는 관성적인 변화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가 당면해야 했던, 혹은 감내해야 했던 현실을 반영하듯 앨리스의 극복을 유치할 정도로 비장하게 묘사해낸다.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팀 버튼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세계관을 디자인으로 삼아 팀 버튼의 취향을 담아낸 결과물이다. 이는 곧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에 대한 호불호에서 시작할 때 보다 온당한 접근이 가능한 작품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인위적인 색감만으로도 <찰리의 초코릿 공장>을 연상시킨다. -하물며 두 작품은 원작 동화를 스크린에 옮겼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원작을 도구처럼 참고한 뒤,온전히 자신만의 판본을 디자인했다는 점에서특별한 작품이다. 원작의 캐릭터들은가공된 이미지를 얻고, 관계 구도는 뒤섞이고보다 강한 성격을 자랑하는 캐릭터로서 위치를 지킨다. 캐릭터의 변주는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다.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는 그 의도를 수행하기 위한 자산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헬레나 본햄 카터인데 외형만으로도 눈에 띄게 과장된 머리 크기로 등장하는 그녀는 히스테릭한 블랙코미디로 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를 어필한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끝에 다다를수록 그 기이한 세계를 목격하는 이들에게 허전한 감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 세계관의 디자인은 팀 버튼이 품은 기괴한 발상의 결과물로서 스크린에 착상되지만 그 디자인에 담아낸 서사는 (팀 버튼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상투적이며 한편으로 식상할 정도로 안이해 보인다. 평범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고립되듯 살아가던 이상한 앨리스가 비정상적인 이상한 나라 속에서 자아를 찾고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성취를 완성하는 과정이란 팀 버튼 스스로를 이입해내는야심의 반영에 가깝다. 하지만 그 야심을 품은 서사에는 어떠한 야심도 없어 보인다. 마치 디자인을 전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제작된 결과물처럼 단조로운 서사는 특별한 감흥으로부터 객석을 차단해낸다. 3D를 전면에 내걸었지만 그 효과도 딱히 탁월해 보이지 않는다.-애초에 이 작품은 3D로 촬영되지도 않았다.-결국 팀 버튼을 설명하기 위한 작품으로서는 유용하지만 팀 버튼의 대표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가 지금까지 선사했던 매혹적인 작품들을 경험했던 이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단지 이상한 이미지로 가득한 팀 버튼의 모방작이거나 습작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매혹이 사라진 팀 버튼의 기괴함이란 그만큼 허전하다. 멋진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상일지 몰라도, 비정상이 항상 멋진 건 아니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진동하는 핸드헬드와 거친 입자가 부유하는 캠버전 영상은 영화의 정서를 관통하기까지의 추이적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실험적 기제처럼 보인다.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근본을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언니인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재활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킴(앤 헤서웨이)은 대사를 앞둔 집안의 공기를 불안정하게 덥힌다. 킴과 가족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을 부수기 위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담긴 거친 언어가 쏟아진다.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흔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반목 속에서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한다.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혈연이라는 구속에서 자유로워진다. 존재만으로 폭력처럼 행사되던 가족이란 속박이 서로를 위한 배려로 거듭난다. 단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가족은 오랜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의 카메라는 그저 그 과정을 지켜볼 따름이다. 단지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앤 헤서웨이의 놀라운 연기는 그 의미를 돈독히 다지는 강력한 지원군이다.
적막한 스크린의 검은 여백 위로 제목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을 명시하는 자막이 눈을 깜빡이듯 몇 차례에 걸쳐 뒤따라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러다 마치 감았다 뜬 눈 앞에 비춰지는 어떠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쫓아가듯 영화는 시작된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과 숏을 채우는 인물간의 거리는 일정하되 두서가 없다. 제3자의 곁눈질이거나 무심한 응시처럼 담담하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기록적인 다큐멘터리의 시야로 위장된 극영화다.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응시하는 관점이 발견된다.
재활원에 있던 킴(앤 헤서웨이)은 아버지 폴(빌 어윈)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레이첼(로즈마리 드윗)의 결혼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은 짐짓 무겁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이웃의 눈동자엔 모종의 경계심이 배어있고 그녀 역시 그 경계심을 온 몸으로 체감한다. 레이첼의 결혼을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 사이에는 짐작할 수 없는 이상 기류가 감지된다. 킴의 등장과 함께 집안의 공기가 달라진다. 감춰진 사연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약물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킴의 과거행적에 대한 불안 정도는 쉽사리 짐작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진전 속에서 가족의 들추기 힘든 사연이 암시되며 양상은 또 한번 발전된다. 단순한 맥락이 예감되던 사연에 입체적 호기심이 형성된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다큐의 눈을 빌린 드라마다. 그 심연에 잠겨있던 사연을 들쑤시고 이를 통해 발생하는 갈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반목을 통한 화합의 여정을 묵묵히 지켜본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레이첼, 결혼하다>의 정서를 관통하기 위한 하나의 실험이다. 흔들리는 카메라 너머의 인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기적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 마치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 위력도 짐작되지 않는 갈등의 도화선 속에서 위태롭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린다. 고의성이 다분한 캠버전의 거친 입자는 <레이첼, 결혼하다>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단이 된다. 그 설득력이란 상황에 대한 사실적 인지라기 보단 정서적 동감에 해당한다. <레이첼, 결혼하다>가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때때로 가족이라는 구조적 실존을 고찰하는 실험극처럼 보이는 건 이 덕분이다. 캠 버전의 화질과 핸드헬드의 진동은 이를 위한 미장센에 가깝다. 혈연의 운명에 속박된 애증의 알고리즘이 뜨겁게 폭발하고 차분히 가라앉는 3일 간의 서사 속에서 은밀하고도 생생하게 관찰된다. 음악의 기능성 또한 탁월하다. 외부가 아닌 영화의 내부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들은 극적인 감정들을 적절히 보좌한다. 특히 갈등의 심화 지점에서 들리는 위태로운 바이올린 선율은 기능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 모든 것은 극적이되 과장되지 않았고 진심이되 사실은 아니다.
킴과 레이첼을 비롯한 그네들의 가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과거사를 시간에 떠내려 보내고 망각하려 하지만 가족의 재회는 결국 기억의 소환을 이루고 갈등을 촉발시키며 서로의 상처를 긁고 이내 파헤친다. 다만 <레이첼, 결혼하다>는 가족의 갈등과 화합을 명시하기 위한 단선적인 드라마의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서로를 증오하듯 거친 언어를 내뱉던 가족이 종래에 서로를 다시 끌어안기까지의 과정에 돌발적인 변수들이 매복하고 예상의 범위를 수없이 벗어난다. 결혼은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내는 수단이자 갈등과 위기를 봉합하는 계기가 된다. 가족의 일원이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가족들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은 유기체의 잉태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굴레로 떠나기 직전에 벌어지는 일종의 속죄양이자 대속과 같다.
레이첼과 킴의 갈등 사이에서 아버지의 상흔마저 벌어진다. 내면의 침묵에 진심을 숨겨두며 살아온 가족은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의 상처 역시 확인한다. 감춰둔 사연이 드러나는 동시에 갈등이 폭발하고 위기가 도래하지만 결국 그 모든 상처를 확인함으로써 서로의 통증을 이해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전형적이란 단어로 일축되기 쉬운 사연의 본질은 입체적 양식을 통해 간과될 수 없는 특이성의 너비를 확보한다. 결국 가족은 갈등의 반목을 통해 화합에 도달한다. 그 화합의 방식은 어떤 사과나 반성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혈연에 대한 담담한 수긍을 통해 완성된다. 그 성찰의 깊이에 도달하기까지 큰 공헌을 펼치는 건 역시 배우들의 뛰어난 열연이다. 특히 앤 헤서웨이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이 확보된 눈빛을 갖추고 있다. 그녀에 대한 재평가를 가능케 한 연기만으로도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연 값진 수확이다. 물론 로즈마리 드윗과 빌 어윈, 데브라 윙거를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열연을 동반한다. 그 열연은 <레이첼, 결혼하다>에 진정성의 너비와 깊이를 확보하는 큰 자산과도 같다.
뜨거운 눈물보다도 묵묵한 이해 속에서 가족은 비로소 서로를 진심으로 감싸 안는다. 이해할 수 없던 애증의 장벽이 무너지고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혈연이라는 구속이 비로소 연민을 넘어 사랑으로 거듭난다. 그렇게 가족은 새롭게 거듭나 다시 헤어지고 돌아선다. 서로에 대한 냉소를 걷고 진심의 온기를 확인한 채 그리움을 머금고 돌아선다. <레이첼, 결혼하다>는 단지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담담한 시선으로 얼어붙어 있던 본의가 따스하게 녹아 내린다. 갑작스런 도입과 달리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결말의 롱테이크에 이 영화의 진심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