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맥어보이는 화려한 스타이기 보단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유명세란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그는 직업 연기자의 삶을 꿈꾸고 있다. 연기로 삶을 사는, 이상적인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중등학교 재학 시절, 제임스 맥어보이는 신부가 되길 마음먹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가 아니었다. “아프리카에 가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일곱 살의 나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맥어보이는 여동생과 함께 글래스고 외곽의 드럼채플에서 자랐다. 실업자와 범죄자가 넘쳐나는 드럼채플의 거친 분위기 속에서도 자상하고 엄격한 외조부모는 맥어보이를 밝고 건강하게 보살폈다. 하지만 집을 벗어나서 만큼은 항상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비좁은 세계의 폭력을 경계하며 자란 아이가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건 어쩌면 본능이다. 맥어보이는 독립에 대한 야심이 컸다. “위험한 지역에서 자라게 되면 나이가 들면서 현실이 그런 야심을 두들겨 부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이다.
맥어보이의 감춰진 끼가 드러난 건 14세 무렵이었다. 당시 두 선생님의 권유로 밴드를 결성하게 됐고, 소위 노는 물이 달라졌다. 옷차림이 달라졌고, 평소에 말도 걸지 못했던 아이들과 친구가 됐다. “내게 쓸만한 상상력이나 창조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에 그에게 진짜 꿈을 안긴 사건이 일어났다. 배우 데이비드 헤이먼이 연기 강연을 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것. 학생들 대부분이 심드렁해있는 사이, 맥어보이는 완전히 그의 말에 매료됐다. 그리고 헤이먼을 찾아가서 묻는다. 자신에게 기회를 줄 수 없느냐고. 6개월 후, 맥어보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헤이먼이 제작하는 영화의 단역 오디션 참여를 알리는 것이었고, 맥어보이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훗날 회상했다. “나는 쓰레기였다.” 이는 결국 그가 왕립 스코틀랜드 노래 연기 학교에 입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 스쿨을 졸업한 맥어보이는 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 라이트가 그를 발견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점차 브라운관과 스크린 등장횟수가 늘었고, 폴 애보트가 만든 두 편의 TV시리즈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와 <셰임리스>로 확실한 잔상을 남겼다. 9살 연상인 아내 앤 마리 더프와의 만남을 주선해준 <셰임리스>는 몇 가지 수상 경력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2005)에 참여하기 위해서 뉴질랜드 촬영장까지 날아갔다. 그가 선택한 건 반인반수의 파우누스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다.” <윔블던>(2004) 촬영 당시, 맥어보이는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에 출연한 버나드 힐에게 헬름계곡 전투에 관해서 몇 번이고 묻고 또 물었다. 그는 판타지 광이다. 하지만 그는 다분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배우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특별히 그 분야에 지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저 시작하니까 하나에 그 다음이 따라왔다. 연기가 죽을 만큼 재미있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지만 직업으로서 진지하게 생각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맥어보이에게 연기는 일종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연기한 캐릭터 대부분에 그런 성향이 반영돼 있다. 멀쑥한 이웃 청년처럼 보이는 맥어보이에게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 구석이 있다. 맥어보이의 도약을 위한 구름판 역할을 해낸 <라스트 킹>(2006)의 게리건은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캐릭터처럼 보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어보이와 게리건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적지 않다. 눈을 감고 지구본을 빙빙 돌려 손가락으로 짚은 우간다행을 택한 신출내기 의사의 혈기는 직업의사와 아프리카 봉사를 꿈꿨던 맥어보이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무엇보다도 게리건은 시작과 끝의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라스트 킹>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바로미터다. 맥어보이는 그 역할을 해냈다. 혈기왕성한 청년의 유쾌한 미소가 점차 당혹감으로 창백해질 때, 불길한 예감은 현실화된다. 기본적으로 어느 독재자에 관한 고발극인 이 작품이 한 청년의 뼈저린 성장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맥어보이의 그런 표현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어톤먼트>(2007)의 로비나 <비커밍 제인>(2007)의 톰처럼 맥어보이의 캐릭터들은 비천한 신분이나 상황을 긍정적인 태도로 견뎌내곤 한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부터 긍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항상 어떻게든 다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행복해질 거라고.” 유년시절의 불우한 환경을 견뎌내기 위한 반대급부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긍정적인 인물이 강한 비극에 쓰러질 때 더욱 강력한 페이소스가 형성된다. 애초에 비극적인 예감을 담보로 미소를 짓던 캐릭터들이 끝내 그 현실에 매몰될 때 그만큼 비극적인 것이다. <어톤먼트>와 <비커밍 제인>은 신분차가 빌미가 되어 이루지 못한 로맨스라는 공통점이 있다. 맥어보이의 미소는 그 로맨스의 상실감을 더욱 강하게 증폭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원티드>(2008)에서 직장 스트레스로 신경쇠약 증세마저 보이던 웨슬리가 정체성을 깨닫고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서 킬러로 변모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강력한 쾌감이다. 이는 이 배우가 지닌 극단의 양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캐릭터가 겪는 이후의 삶을 납득시키는 역할을 해내기도 한다. <스타트 포 텐>(2006)은 어려서부터 퀴즈쇼를 동경하던 소년이 값비싼 실수 끝에 교훈을 얻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근작인 <음모자>(2010)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에서는 각각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이상적인 패배자로 등장한다. 링컨 암살 공모 누명을 쓴 여인의 변호를 맡게 된 남북전쟁 영웅 에이컨과 돌연변이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 인간과의 화합을 시도하지만 분열과 갈등으로 붕괴되는 조직의 리더 자비에의 영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닮은 통증이 느껴진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맥어보이에게 이상과 현실의 양면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결과였다. 유년시절 즐겨보던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며 그의 대출금을 갚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그는 말한다. “스릴과 재미를 기준으로 일을 고를 수 있다니 적어도 지금의 나는 운이 좋다. 영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앞일을 누가 알 수 있나.” 확실한 건 지금 맥어보이가 수배 물망에 활발하게 오르내리는 배우라는 사실이다. 직업배우의 정체성이 공고한, 이상적인 현실주의자가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한 것이다.
유려하다가도 몰아치게, 고요하면서도 가열차게, 조 라이트는 특유의 감각적 재능으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초월한다. 사운드와 비주얼의 공감각적인 여정, 조 라이트의 길을 돌아본다.
1972년 런던에서 조 라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5세였다. 그는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은 라이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꼭두각시 인형극 극단을 설립하고 극장을 운영했다. 그 극장에서 본 인형들의 연기는 살아있는 라이트의 삶을 흔들었다. 사실 소년 라이트는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난독증이 있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슈퍼 8미리 카메라로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국 예술학교에 진학한 라이트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한 예술대학에서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크로코다일 스냅>(1997)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주목을 얻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맨이나 디자이너, 혹은 배우가 될 수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들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평범한 삶에 어울리는 법을 잘 알 수 없었던 대신 촬영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행운을 얻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행운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됐다. TV미니시리즈로 연출 경력을 쌓으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2003년 BBC에서 방영된 4부작 시대극 <찰스 2세>로 영국 아카데미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오만과 편견>(2005)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려한 문체로 시대를 풍자한 당대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떤 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게 각본이 보내지기까지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다.”놀랍게도 그는 잘 모르는 제인 오스틴을 필사하는 대신 각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라이트는 대학시절의 수업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매우 이론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를 만들길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론 수업에 의지하기 보다 방과후와 주말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현역 배우들의 강습에 참여하며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는 법을 깨우쳐 왔다. 원작에 비해서 자립적인 현대의 여성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보다 로맨틱한 감수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런 자질 덕분이다. 특히 서정적인 음악과 고풍스러운 영상의 결합은 로맨틱한 기운을 한껏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원작의 유명세보다도 라이트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필름 데뷔 이후, 그의 두 번째 행보는 다시 한번 유명 원작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영화화 작업은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할만한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과 달리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나는 내 심리의 등에서 뛰어다니는 피해망상을 얻었다”고 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리를 압박하듯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타자기 소리, 발자국처럼 찍히는 활자의 행렬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해낸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감에서 출발하는 <어톤먼트>(2007)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융화시키는 라이트만의 공감각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의 공은 일차적으로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돌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악과 영상을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킨 라이트의 재능도 간과할 수 없다. 서정적인 운율의 클래식한 넘버 위가 흐르는 가운데 투명하게 떨어져 분산되는 자연광은 파국적인 로맨스에 깃든 처연함을 더욱 애잔한 여운으로 밀어 보낸다.
과거 시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라이트는 <솔로이스트>(2009)를 통해서 현대극에 도전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정신적 질환으로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을 발견한 <LA타임즈>의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관찰자로서 그를 찾아가다가 끝내 그와 교감을 이루고 서로의 치유를 돕는 과정을 기술한 칼럼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단조처럼 우울한 삶 속에서 무기력과 피로감을 느끼는 탓에 쉼표 같은 삶을 찾던 스티브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착란에서 헤어나올 마침표가 필요한 나다니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솔로이스트>는 영화와 실화의 협연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사실 라이트의 비범한 전작에 비해서 <솔로이스트>는 상대적으로 범작에 가깝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현 위에 떨어진 몇 줄기의 빛을 포착해낸 감각적인 클로즈업 샷과 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현악기의 유리 같은 선율, 베토벤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표현해낸 환상적인 컬러는 라이트만의 진수를 드러낸다.
마치 경력의 전후를 가르듯 라이트는 연이어 현대적인 작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톤먼트>로 데뷔한 시얼샤 로넌을 타이틀 롤로 앞세운 <한나>(2011)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나>는 그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다른 문법을 지닌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공간의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극을 전개하고 진전시키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원작 소설도, 실화적 모티프도 없는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라이트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선택한 건 라이트가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이 확정된 로넌의 추천을 통해서 라이트가 보다 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지닌 공감각을 폭발시키듯 분출해낸다. 특히 노이즈와 전자음에 어울리는 만화경 비주얼은 사이키델릭 그 자체다.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는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이는 가능성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시대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그리고 라이트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그것이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운명과도 같았던 영화는 여전히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다. 그의 공감각적 여정은 그렇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2008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로 오른 시얼샤 로넌은 불과 13살의 나이였다. 최연소 노미네이트 기록이었다.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을 구경하곤 했던 어린 소녀는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2007)와 함께 매우 빠르게 전세계로 전파됐다. 피터 잭슨이 연출한 <러블리 본즈>(2009)에서 주인공 소녀 수지를 연기하며 또 한번 무르익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처럼, 푸른 에메랄드 바닷빛의 눈과 고운 금발을 지닌 로넌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설원과 사막 속에서 고된 강행군을 거듭했던 <웨이 백>(2010)의 촬영장에서 로넌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액션 스릴러물 <한나>(2011)에서 그녀가 펼친 연기적 도전의 결과물을 예상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점차 성숙해지는 로넌이 장차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것. 지금 그녀에게서 여신의 징후가 보인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빛은 이미지를 낳았다. 영화는 이미지의 예술이다. 영화는 빛이 낳은 예술이다. 그 빛을 통해 보다 밝게 영화를 밝힌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를 통해 세상은 빛난다.
이명세
이명세의 연출데뷔작 <개그맨>은 안성기의 대사로 시작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이는 이명세가 추구하는 영화적 세계를 짐작하게 만드는 언어나 다름없다. 그는 마치 실재와 환상에 두 발을 걸친 것처럼 현실의 스크린에 자신의 꿈을 투영해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단편적인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고유한 창작적 세계관으로서 자리매김하는 비주얼리스트로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가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디테일하게 연출된 명암의 대비를 통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M>과 같은 근작들의 인물들은 뚜렷한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허구를 오가고 이를 통해 실재와 환상이 스크린에 투사된다. 영화는 이명세가 꾸는 꿈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을 산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영화를 꿈꾼다. 선명한 빛이 내리고 그림자가 드리울 때 꿈이 시작된다.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와 같이, 사랑과 기억에 관한 애틋한 송시와 같은 멜로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는 사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표현이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전달에 놓일 수 있었던 것도 그 토대에 있다. 특히 ‘이와이 월드’라는 팬덤을 구축하게 만든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는 그가 단순히 로맨틱한 감성주의자에 불과하지 않은 감각적인 스타일리스트임을 증명하는 단초와 같은 작품이었다. 이와이 슌지가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들은 창백할 정도로 극대화된 명도를 통해 영상을 밝히는데 이는 하나같이 그가 묘사하는 세계에 자리한 인물들의 순수한 내면을 보조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순수한 심성을 지닌 인물들로 구축된 백색의 도화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때로 연필로 흑칠을 해내듯 어두운 단면들을 그려내기도 하지만 이내 지우개로 지워버리듯 인물들의 순수를 보존하고 감성을 정화시킨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감수성으로 자신의 세계를 향해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빈다.
구스 반 산트
구스 반 산트는 <굿 월 헌팅>과 같이 드라마틱한 성장드라마를 연출하며 스토리텔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유려하고 심오한 영상미를 구사하는 시네아스트로서 확고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실화를 스크린에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구스 반 산트는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을 소재로 <엘리펀트>를 완성했고 이를 통해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구스 반 산트는 “추악하고 화창한” 그 날의 기억을 종용하고 근본을 추궁하는 대신, 풍요로운 광량을 바탕으로 여전히 생이 자리하던 그 곳의 공기를 묵묵하게 환기시킨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 <파라노이드 파크>를 관통하는 건 죽음이 내려앉기 직전까지 그곳에 생이 있었다는 흔적들이다. 그는 죽음을 되묻는 것보다도 그 죽음에 앞서 선행된 생의 시간을 먼저 살피고 죽음에 앞서 생의 의미를 짚는다. 죽음 앞에 삶은 무력하다. 하지만 죽음이 멈출 때 삶은 나아간다. 그래서 구스 반 산트는 언제나 추악한 죽음보다도 화창하게 삶을 응시한다.
왕가위
“나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화에 드러내고 싶다.” 스스로의 말처럼 왕가위는 결코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풍경의 공기에 담아 관객의 기억 속에 뿌리내린다. 그의 시간 속에서 모든 이들은 사랑하고 또 아파하며 다시 그리며 살아간다. 몇 마디의 대사로도 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찰나의 풍경으로 번져 스크린을 채운다. 애틋한 그리움, 진한 갈망, 깊은 상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갖은 심정들이 찰나를 메우다 영원으로 흘러간다. 서서히 달아올라 뜨겁게 달궈진 뒤,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들은 왕가위의 시간 속에서 단단한 결정과 같은 컷의 연속으로서 물결처럼 흐른다. 오래된 사진처럼 퇴색되어 가는 지난 기억 가운데서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아련한 로맨스의 추억들이 점멸하는 이미지가 되어 그의 영화 속에서 흐르고 또 흐른다. 사랑은 변한다. 그리고 왕가위는 기억한다. 지난 시간 속에 절경처럼 자리한 ‘화양연화’를, 기억 위에 내려 앉은 먼지마저도 애틋한 감정처럼 붙잡고 싶던 그 시절을.
조 라이트
제인 오스틴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으로 스크린에 입문한 조 라이트는 문체 속에 담긴 우아한 기품과 감정의 체온을 이미지로 승화시키며 성공적인 데뷔를 이뤘다. 그리고 이언 매큐언의 <어톤먼트>를 영화화하며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한다. 사실적인 시대상을 묘사하는 동시에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고, 인물의 내면적 심리와 감정의 흐름을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텍스트에 담긴 의미를 넘어 그 감정 자체를 완벽하게 스크린에 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근작인 <솔로이스트>는 내용면에서 주춤하지만 인물 간의 심리적인 조율을 묘사해내는 그의 능력은 유효하다. 그는 풍부한 자연광을 통해 영화 속에 감정의 결을 새겨 넣는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영원을 다짐하는 남녀가 마주한 저택의 정원 잔디 위로, 해변 위를 걷는 남녀의 발등 위를 적시는 푸른 바닷물 위로, 도심 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연주음을 좇아간 신문기자 앞에 모습이 드러난 노숙자가 키는 바이올린 위로, 빛이 떨어진다. 저마다 다른 감정의 결정체가 되어 빛을 발한다.
모든 인생은 결국 운명처럼 귀속되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운명이란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지표들을 거쳐서야 다다르는 종착역일 뿐, 인생에 정해진 지도는 없다. 우린 인생이란 길 위에서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한 결과로서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내다본다. 인생이란 운명을 향한 선택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선택과 여정을 그린 다섯 편의 운명이 여기 있다.
<원스>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에서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던 ‘그’는 그 거리에서 운명적으로 ‘그녀’를 만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그와 그녀는 순간의 만남을 인연으로 넓혀나간 뒤, 서로를 향해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스며들어가는 사랑을 노출하지만, 점차 어둡게 내려앉는 땅거미처럼 현실을 체감하고, 서서히 희미해지는 황혼처럼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일상의 너머로 내려 보낸다. 탁월한 음악영화이자 애틋한 멜로영화인 <원스>는 모든 사연의 시작이 운명적인 찰나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한 남녀는 운명적인 예감을 꿈꾸지만 서로에 대한 진심을 추억으로 떠내려 보내며 각자의 길로 다시 걸어나간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우리가 부딪히고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When you’re mind made up. There`s no point trying to change it.’마음을 정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운명은 선택을 통해 완성되고, 마법 같은 시간은 그 길 위에 놓여 있으니.
<더 로드>
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의 앙상한 풍경이 살아남은 인간들을 더없이 무력하게 치장한다. 끝나버린 세계, 의미 없는 삶, 그곳에서 생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 폐허 속을 걷는 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그리고 아이는 묻는다. “우리는 착한 사람들인가요?”인간의 이성이 더없이 무력해진 세상의 끝에서 부자는 선을 짊어지고 남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이미지로 승화시킨 듯한 <더 로드>는 비범한 원작을 비범하게 재현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그 황폐하고 참혹한 세계의 길 위로 걸어나가는 부자의 뒷모습이 마음에 불을 지피는 힐링 시네마다.
<어톤먼트>
찰나의 파문이 만들어낸 동심원의 너비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이언 매큐언의 원작소설 <속죄>를 동명 원제 타이틀 그래도 스크린에 옮긴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는 어느 한 순간의 충동에서 비롯된 소녀의 선택이 남녀의 삶을 지울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유려한 화법으로 그려나간다. <오만과 편견>을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시각적인 심상으로 연출하는데 대단한 감각적 재능을 보인 조 라이트는 <어톤먼트>를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진 감정적 여운을 선사한다. “소설에서는 상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연극에서는 배우에게 달렸다.”하지만 현실은 무대도, 배우도 없다.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적인 삶으로서 나타날 뿐이다. 오해는 현실을 왜곡하고 삶을 파괴하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늦고 속죄는 더디다. 결국 삶이란 허구로 귀결될 수 없는 실존의 엔딩을 향하고 있으며 찰나로부터 번져나간 파문은 때로 비극과 희극을 꿈꾸거나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을 수면 밖으로 밀어 보낸다. 삶이란 그만큼 허망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이다. 단 한 순간의 출렁임으로 예기치 않게 떠밀려 보낸 타인의 삶에 대한 속죄가 여리고 시리다.
<미스 리틀 선샤인>
육두문자 섞인 식단 투정을 내뱉는 할아버지, 자신의 커밍아웃과 자살 경험담을 털어놓는 외삼촌, 이를 비꼬며 완강한 흑백논리로 대화를 경직시키는 아버지, 염세주의적인 경향으로 묵언수행 중인 아들, 미녀 선발대회에 집착하는 딸까지, 식탁 앞에 모여 앉은 이 가족, 콩가루다. 그 가족들이 덜컹거리는 밴에 구겨 앉아 여행을 떠난다. 막내딸이 원하는 소녀미인선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륙을 횡단한다. 순탄치 않은 여정 속에서 가족들은 서로를 꼬집고 할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낸다. 서로를 힐난하던 가족은 예기치 못했던 상실감을 공유하고, 누군가의 좌절감을 목격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나가며 관계를 기워나가기 시작한다. 예측불허의 상황을 연출하며 소소한 웃음을 끌어내는 <미스 리틀 선샤인>은 감동적인 로드무비 가족드라마다. 콩가루처럼 흩날릴 것 같던 가족들은 험난한 여정 속을 공유하며 찰진 반죽처럼 서로를 끌어안는다. 클러치가 고장난 고물 밴을 함께 밀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하는 밴을 좇아 달려오는 이들을 붙잡아 차 안으로 끌어주는 가족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따뜻한 가족애를 선사한다.
<가을로>
봄이 여름으로 피어나는 소생기라면 가을은 겨울로 저무는 소멸기다. 완연한 초록잎들이 고개를 떨구고 갈색으로 낙하하는 하강의 계절. 마치 저물어 가는 인연의 끝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처럼 이별을 준비하는 쓸쓸하고 고요함처럼, 거친 바람을 견뎌내기 위한 대자연의 섭리처럼 보다 강인하게 1년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 <가을로>는 예감할 수 없었던 연인과의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한 남자가 연인이 남기고 간 다이어리에 기록된 자취를 홀로 더듬어 가는 여행기다. 소생과 소멸을 반복하며 윤회하듯 돌아오는 계절처럼 침전되고 퇴적되는 기억 안에서 인연은 지고 핀다. 죽은 연인이 남긴 유품과 같은 여정을 따라 걷던 남자는 그 길 위에서 상처 입은 시간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돋아난 희망을 마주 하며 비로소 내일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잡고 걸어나간다. 울퉁불퉁한 길을 포장하듯이 지난 추억 위로 내려앉은 추억은 삶을 매만지고 보살핀다.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을 견뎌야 하듯, 아픔도, 슬픔도, 이겨내야 할 시간이 있음을 말하는 <가을로>는 마치 단풍처럼 곱고도 절실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