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가릴 수 없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배우들과 달리 어떤 배우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에밀리 블런트, 바로 그녀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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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소년 빌리 엘리어트에게 소녀들의 발레복은 날개였다. 사내에게 어울리는 건 권투 글러브라던 아버지의 고집도 그의 발레복을 벗기지 못했다. 그리고 빌리는 날아오른다. 수줍던 소년의 아름다운 비상, <빌리 엘리어트>(2000)는 전세계에 감동을 실어 날랐다. 댄서의 집안에서 자라나 여섯 살부터 춤을 연마했던 제이미 벨도 새로운 날개를 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역량을 키우는 것이 거액을 얻는 것이나 큰 로봇으로부터 달아나는 것보다 중요했다.” 더 높고 멀리 날기 위해서는 자신의 날개가 온전히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역할의 크기나 비중을 가리기보다도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에 기꺼이 몸을 던져야 함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의 체공시간을 서서히 넓혀왔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꿈 많은 소년이 아니다. <더 이글>(2011)에서 무르익은 남성미를 뽐내는 그가 자신의 성숙한 날개를 펼 날도 머지 않았다. 기다림은 끝났다. 이제 다시 날아오를 차례다.

(beyond 6월호 Vol.57 'TAKE ON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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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얼굴만큼이나 그 표정을 둘러싼 풍경으로 기억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와 그녀의 사연이 담긴, 방이 있는 영화 속 풍경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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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과 소녀의 과도기에 자리한 듯한 한 여자가 어느 저택을 뒤로 한 채 덧없이 걸음을 옮겨 나간다.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한 언덕에 멈춰선 뒤, 황망한 얼굴로 세상을 응시하다 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껏 습기를 빨아들인 먹구름으로부터 매서운 비가 쏟아지고, 그녀는 폭풍의 언덕을 벗어나 비를 피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정처 없이 나아가던 그녀는 외딴 집의 불빛을 발견하고 대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들긴다. 이를 발견한 한 남자는 그 여자를 집 안으로 들이고 두 여동생과 함께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준 뒤,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는 답한다. “제인 에어그녀가 제인 에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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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조연상 부문 후보로 오른 시얼샤 로넌은 불과 13살의 나이였다. 최연소 노미네이트 기록이었다.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를 따라 촬영장을 구경하곤 했던 어린 소녀는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2007)와 함께 매우 빠르게 전세계로 전파됐다. 피터 잭슨이 연출한 <러블리 본즈>(2009)에서 주인공 소녀 수지를 연기하며 또 한번 무르익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처럼, 푸른 에메랄드 바닷빛의 눈과 고운 금발을 지닌 로넌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설원과 사막 속에서 고된 강행군을 거듭했던 <웨이 백>(2010)의 촬영장에서 로넌은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액션 스릴러물 <한나>(2011)에서 그녀가 펼친 연기적 도전의 결과물을 예상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점차 성숙해지는 로넌이 장차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를 꿰찰 것이라는 것. 지금 그녀에게서 여신의 징후가 보인다.

 

(beyond 4월호 Vol.55 'TAKE ON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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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콜린 퍼스)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말더듬이였다. 문제는 그가 사회지도층 혈통을 타고난 영국의 로얄패밀리였기에 종종 영국 왕실을 대표해서 국민들을 고무시킬 연설을 행해야 했다는 것. 부친이자 전왕인 조지 5(마이클 갬본)는 이런 아들이 못마땅해 득달 같은 성화를 내곤 했지만 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버릇이 아니었다. 그의 자상한 부인 엘리자베스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남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수소문을 해보지만 좀처럼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언어치료사를 소개받고 그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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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넘긴 여배우에게도 전성기가 찾아왔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변신이라는 단어로 수식될 수 있는 결과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헬렌 미렌은 지금 새로운 변신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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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으로 덮인 언덕 위로 상의가 벗겨진 곳곳에서 상흔이 발견되는 남자가 두 팔이 묶인 채 달리고 있다. 본래 그 남자는 용맹한 로마군의 백인대장이었다. 그의 두 다리가 박차고 밀어내는 땅은 로마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국이다. 로마군은 영국 땅을 점령했지만 픽트족이라 불리는 현지 민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며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로마 최강의 군단이라 불리던 제9군단은 그 저항을 누르려 하지만 픽트족은 결코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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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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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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