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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를 위협하는 리얼리티와 풍만한 색채가 보편화된 동시대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린다면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다. 극의 대부분이 흑백 컬러로 채색되고 앙상한 선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띄운 셀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가 말이다. 하지만 2000년에 출간된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인 유명 그래픽 노블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페르세폴리스>는 상상력의 유희와 드라마틱한 구성,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대적 단상을 통해 기술이 충만할 수 없는 감수성의 깊이를 보여준다.

독재정권인 팔레비 왕조의 오랜 탄압에 반발한 이란 국민들의 대대적인 항거는 무력진압을 맞이하고 이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페르세폴리스>는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혁명이 발발한 1970년대 이란에서 시작된다. 마르잔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활발한 아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소녀는 혁명의 기운이 증폭되는 테헤란에서 지인들과 자유를 논하는 부모님들의 성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스스럼없이 혁명을 외친다. 결국 혁명은 이뤄지고 독재왕권은 몰락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세상을 기대한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마호메니 정권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정권의 기치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이로 인해 국민들은 혁명 이전의 정권보다도 더욱 극심한 탄압에 시달린다.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던 여성들에게 챠도르를 씌우며 극심한 보수로 들어서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마르잔은 펑크락을 듣고, 강압에 저항한다.

혁명과 독재, 그리고 전쟁까지, 강압의 알레고리들이 넘실대는 굴곡이 심한 시대적 상황을 견디기에 마르잔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하다. 결국 마르잔의 부모는 딸의 왕성한 혈기가 지독하게 폐쇄적인 이란의 현실을 인내하기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마르잔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타국에서 삶을 꾸려야 하는 소녀는 끝없이 방황하다 결국 피폐해지고 나서야 다시 이란의 부모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여전히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강압적 폐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란의 정치적 현실을 단순하지만 명쾌한 이미지로 그려낸 <페르세폴리스>는 간단히 말하자면 마르잔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가 격변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육체라는 점이 간과될 수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쾌하고 활기차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녀가 자조적이고 망연자실한 눈빛의 여인으로 자라나기까지, 그 순탄치 않은 삶이 이란의 격동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했던 민중의 외침이 또 다른 견고한 형태의 억압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는 소녀의 성장기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개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부여한다. 국가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듯 파리로 출국한 마르잔이 그곳에서 느끼는 생경함은 결국 자기 정체성의 자각기회를 박탈당한 인간의 고독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체제적 오류는 끝내 수정되지 않으며 결국 그 안에서 개인은 고통을 인내해야 할 따름이다. 마르잔은 오류적 믿음을 강압하는 폭력적 체제 속에서 방황하고 인내하는 과정을 거치며 문득 깨닫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세상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심플한 영상은 때론 재기발랄한 웃음을 유도하며 때때로 뭉크의 ‘절규’와 같은 표정으로 경악을 표출한다. 단순하지만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캐릭터들의 명확한 표정만큼이나 뚜렷한 가치관을 지닌 <페르세폴리스>는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통해 올곧은 정치적 자의식을 강건하고도 유연하게 전달한다. 대부분 흑백컬러의 영상으로 이뤄진 <페르세폴리스>는 (8만장의 드로잉 작업 덕분인지 몰라도) 아날로그적인 호감을 부여하며 때론 기록처럼 읽히는 이미지에 설득력을 더한다. 긴 고난의 여정 속에서 어느 새 성숙해버린 마르잔은 다시 한번 파리에 홀로 서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성을 잃게 하고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는 할머니의 충고처럼 마르잔은 ‘항상 정직하게 살라’는 의미를 드디어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이란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소망한다. 그렇게 소녀는 거대한 비겁한 체제의 폭력에 대항하는 건강한 방식을 터득하며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다. 그리고 우리는 소망(해야) 한다. 그녀에게 금지된 것들을.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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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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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happiness), 기쁨(pleasure), 슬픔(sorrow), 사랑(love). <내가 숨쉬는 공기>에서의 공기(air)란 기화된 원소의 질량을 가늠하기 위한 명명이라기 보단 부피로서 상정되는 공간성에 대한 공유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의 접촉으로 이뤄지는 타인간의 관계 맺기. 일정한 시공간의 공유로 인해 교차되는 동선의 필연적인 접촉은 활성화된 원소들의 충돌이 이루는 개인의 삶이 지닌 질량을 재기 위한 것과도 같다.

네 가지 감정의 문구들로 경계를 정한 뒤, 제 각각의 동선을 배회하는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은밀한 접점을 이루는 옴니버스 형식의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의 결과를 도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시작에서 명명되는 테마에 맞는 이야기를 수행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의 중심 인물도 각각 달라진다. 미묘하게 맞닥뜨리거나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들의 개연성은 적당한 이해심을 동반한다면 그만큼의 설득력을 지닐 만큼은 된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스토리텔링으로 보자면 옴니버스라는 분절된 형식에서 일관된 맥락을 놓치지 않는 어리석은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역량이 충분한 배우들이 포진한 만큼 그들을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부를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각의 사연이 담고 있는 테마는 이야기의 내면에 비해 과잉의 인상을 부른다. 말 그대로 행복이라 부르기 애매한 것을 행복처럼 위장하는 전술처럼 <내가 숨쉬는 공기>는 자신이 내건 테마에 이야기의 구색을 맞추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끔 유도한다. 구체적인 주제 의식에 비해서 모호한 의미로 여운을 남기는 각각의 이야기는 결론에 이르러 명확한 상을 남기지만 그만큼이나 전자의 주제들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 애매하게 만든다. 그건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겉멋이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숨쉬는 공기>는 이야기의 개연성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이지호 감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만든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걸출한 배우들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다는 그의 시나리오가 궁금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필연을 가장한 우연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는 이야기를 특정한 주제의식으로 엮어 넣으려는 의도는 다분히 무리수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녹록하지 않은 연기를 지켜보는 것으로 상쇄되지 않는 싱거운 뒷맛은 아무래도 이 때문이다.

(씨네서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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