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라는 이름은 깡패와 스타에 대한 노골적인 직유지만 동시에 현실과 영화에 대한 은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는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구사하려 하지만 카메라의 슛이 들어가고,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순간 현실의 탈을 쓴 프레임의 파편으로 변질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혹은 현실이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선언처럼 보인다.
강패는 공갈과 납치,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깡패다. 그는 종종 홀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다. 그가 보는 영화 속에는 칼부림하는 깡패들의 액션이 멋있기만 하고, 심지어 칼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마저도 어딘가 숭고하다. 어느 날, 강패가 관리하는 단란주점에 신작 영화를 찍는 감독과 배우들이 찾아온다. 그 중 유명 영화배우인 수타의 팬이라는 강패는 우여곡절 끝에 수타에게 싸인을 받지만 수타는 강패에게 쓰레기처럼 산다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곧 수타는 강패를 통해 자신의 연기적 허세와 다른 진짜 기세를 느끼게 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얽혀 들어가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고조된다.
영화 속에서 깡패를 연기하는 수타는 강패를 한낱 쓰레기 취급하지만 현실에서 진짜 깡패인 강패는 수타에게 흉내조차 잘 못내는 주제에 주인공 행세하는 건 운이 좋은 것일 뿐이라며 받아친다. 서로의 반대편에서 상대에게 조소를 보내는 두 남자는 아이러니하게 점차 상대의 영역을 동경한다. 수타와 강패의 동선이 교차를 거듭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종종 상대의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수타에게 강패의 언어는 실제로 도달하고 싶은 실존의 대화고, 강패에게 수타의 언어는 언젠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대사다. 강패가 현실에서 내뱉은 문장을 대사처럼 따라 하는 수타와 수타가 읊은 대사를 현실의 대화에 삽입하는 강패는 서로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불분명한 진창으로 끌어들인다. 강패와 수타의 비극은 각각 그 경계를 넘으려는 찰나에서 발생한다.
‘진짜 싸우는 거라면 하겠다’는 강패와 ‘영화란 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타는 엄연히 다른 세계의 구성원이지만 두 사람은 거울의 구도로 서로를 비추는 닮음의 형태와 같다. 가짜와 진짜로서 영화와 현실에서 빛과 어둠처럼 존재하던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의 영역에서 뒤엉킬 때 <영화는 영화다>는 강렬하게 진동한다. 상대방에게 품은 애증을 격발하듯 상대에게 내뻗는 주먹과 발길질은 반대편의 영역을 향해 옮겨진 한발처럼 서로를 잡아당긴다. 반복되는 테이크 안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강패는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하고, 강패를 비아냥거리던 수타는 현실적 주먹에 얻어맞으며 영화적 한계를 체감한다. 점차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던 두 남자가 자리를 맞바꾸듯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영화다>는 철없던 어른아이의 거친 성장기이자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덧없는 호접몽이다. 영화 속 가상에 도취돼 세상을 만만히 내려보던 수타는 현실의 주먹에 얻어맞은 뒤에야 자신의 현실을 둘러보기 시작하고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강패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더욱 절감한다. 결국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침범하지만 그 경계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종래에 뻘밭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두 남자의 얼굴은 진흙이 잔뜩 묻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수타나 강패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국 그건 결국 영화고, 주인공은 끝내 일어선다. 현실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영화라면 영화의 망상을 경계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결말에 다다라 피칠갑을 하고 수타를 바라보는 강패의 날카로운 눈은 궁극적으로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마치 객석을 응시하듯 교묘하다. 만약 어떤 관객이라도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강패로부터 매력을 느낀다면 결국 엔딩이 밀어내는 객석과 스크린의 거리감을 외면해선 안 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국 자신의 영화적 육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마주본 관객을 도발한다. 네 눈이 카메라야, 잘 찍어. 극 말미에 강패가 수타를 향해 던지는 이 ‘대사’는 수타를 매개로 영화 그 자체에 던지는 선언이다. 현실과 영화는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적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애증 어린 시선을 도발적으로 선사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일본 망가의 거장으로 꼽히는 우라사와 나오키는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이상적인 작가군에 속한다. 그리고 영국특수부대 'SAS' 출신의 박학다식한 보험조사원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 ‘마스터 키튼’은 우라사와 나오키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명료하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구축하고 탁월한 장면묘사와 컷의 전환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운다. 또한 그 와중에 공포와 유머가 함께 공존한다.
‘몬스터’와 ‘20세기 소년’, 그리고 현재 연재 중인 ‘플루토’는 ‘마스터 키튼’을 방대한 습작으로 삼은 결과물에 가깝다. 물론 ‘마스터 키튼’ 이전에 발표한 ‘야와라!’나 그 이후에 발표한 ‘해피!’처럼 명랑한 트렌디 스포츠 만화 역시 우라사와 나오키의 진면목이다. 하지만 사실적인 형태의 세계관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심리적 기운을 지닌 인물-요한, 친구, 플루토-이 그 세계를 장악해나가고 그 반대편에서 그 가늠할 수 없는 실체에 접근하는 인간들의 사투-덴마와 안나, 켄지 일파, 게지히트 형사-가 펼쳐질 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거대한 흥분을 일으킨다. 그의 만화는 영화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 묘사에 능하고 장면의 연출에 과감하다.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이 우려와 기대를 동반한다면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다.
<20세기 소년>은 원작의 재연 그 자체를 희망한다. 일단 실사의 인물들을 보자면 완전히 만화 속 캐릭터와 일치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인물의 실사적 형태도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거의 강박적이다.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영화로 구현한다는 형태적 변형에 목적을 두고 있을 뿐, 영화적인 현실 자체를 간과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만화를 본지 오래된 독자들에게도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켜줄 정도로 원작의 상황을 충실히 재연한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만화의 탈을 쓴 채 경직된 흉내를 낼 뿐이고 엉뚱하게 울려퍼지는 음향효과는 기괴한 감상적 태도를 강요한다.
본래 ‘20세기 소년’은 그 기이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익살맞은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지치지 않는 건 그 유머감각이 윤활유의 역할을 한 덕분이다. 영화는 후자보단 전자에 매료된 것인지, 혹은 후자가 일본영화 특유의 썰렁한 정서 연출 속에서 매몰된 것인지 좀처럼 후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약 <20세기 소년>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의 진지함이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면 그 안에서 발생해야 할 유머감각들이 깡그리 결여됐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펜터치에 녹아있던 정서적 인간미가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을 오가는 컷의 전환방식도 간결한 칸과 칸 사이에 발생하던 만화의 상상력을 쫓지 못하는 양상이다. 성년이 된 인물들이 과거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거나 그 시절의 일화를 설명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산만한 인상을 준다. 그건 마치 영화가 만화의 어떤 장면, 혹은 어떤 인물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발견되는 건 원작에 맞춰 영화를 검열하고자 하는 태도다. 단지 이미지를 재연하기 위한 식물적인 목적이 스크린을 생기 없이 지배한다.
원작에 대한 겸손함이 강박적이다. <반지의 제왕>만큼이나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관계적 접점이 중시되는 ‘20세기 소년’은 그런 캐릭터 관계를 명석하게 정돈하거나 과감하게 정리했어야 했다. 서사의 일부를 미약하게 변주했지만 전반적으로 장황한 인상을 남긴다. 한편으로 영화화된 <20세기 소년>은 만화를 예습하지 못한 관객에게 그 흥미로운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만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만 시키는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능동적인 호기심을 원치 않는 관객에게 <20세기 소년>은 거대한 괴작처럼 느껴질 공산이 크다. 3부작으로 기획된 <20세기 소년: 제1장 강림>은 ‘피의 그믐날’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다. 아직 이야기는 두 번이나 남았다. 문제는 ‘제1장, 강림’이 관객들을 남은 시리즈에 대한 흥미와 절교시킬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실사로 구현된 ‘20세기 소년’을 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어떤 원작팬들은 <20세기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이 악몽 같은 현실로 변모하는 흥미로운 과정을 애정이 아닌 애증으로 지켜볼 가능성이 크다면 그것만큼의 비극도 없어 보인다. 남은 두 번의 기회가 갈급해짐을 느낀다.
좋은 작품은 때로 장르적 경계를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뮤지컬에서 영화로 변주된 <오페라의 유령>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와 같은 작품은 너무도 유명하고 활자에서 영상으로 치환되는 유명 소설의 예는 방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비틀즈(Beatles)의 음악과 삶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나 퀸(Queen)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얻은 뮤지컬 ‘We will rock you’처럼 그 영향력은 형태의 판이함조차 무난하게 극복한다.
텍스트와 이미지, 무대와 스크린, 음악과 연기, 그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제반 조건은 컨텐츠의 육체를 입고 변형되는 소스의 기본 자질이다. 특히 오늘처럼 하이브리드와 크로스오버의 유통이 활성화된 시대에서 훌륭한 작품은 장르의 형식을 초월해 다양한 양식으로 거듭 재생산될 가능성이 크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의 전설적인 그룹 ‘아바(ABBA)’의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유명 뮤지컬 ‘맘마미아!’ 역시 훌륭한 컨텐츠의 변형 유통 생산과정을 거친 모범전례라 할만하다.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된 이후로 160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공연된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가 이제야 비로소 무대 공연이 아닌 스크린 상영의 단계로 옷을 갈아입었다. 게다가 2004년 국내에서 초연된 이후로 7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례가 있는 만큼 <맘마미아!>의 영화화 소식은 결코 국내 관객에게도 무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오래된 호텔을 경영하는 도나(메릴 스트립)의 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버지로 추측되는 어머니의 옛 연인 세 명에게 결혼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 그들을 초대한다. 결국 중년의 세 남자가 섬을 방문함으로써 그들과 그녀들 사이에 묘한 사건들이 펼쳐진다는 <맘마미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 뮤지컬만큼이나 발랄한 넘버들로 채워진 유쾌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리스 섬을 둘러싼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만큼이나 싱그러운 뮤지컬 넘버들이 유명세만큼이나 연기되고 노래되는 배우들의 목청으로 재탄생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 역시 눈과 귀가 즐거운 호사임에도 틀림없다. 게다가 캐스팅 자체가 이 영화의 야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미 근래 <프레리 홈 컴패니언>을 비롯한 과거 여러 작품에서 발군의 노래 실력을 뽐낸바 있는 메릴 스트립을 비롯해 피어스 브로스넌, 콜린 퍼스, 줄리 월터스와 같은 배우들이 관록 있는 보컬을 선사하고 소피 역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비롯한 젊은 배우들이 청량한 화음을 더한다.
연출의 평이함은 이 뮤지컬의 유명세에 따른 기대감을 다소 중화시킨다. 넘치는 야심에 비해 특별함을 과시해야 할 몇몇 장면들이 지극히 안일해 보인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현란한 율동을 영화적으로 재연해보고자 한 야심들은 스크린의 평면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인지 다소 비약적인 상황만을 제시할 뿐 정리되지 못한 산만함을 드러낸다. 평면적인 스크린에 무대의 입체적 양식을 구사하지 못하고 강요하는 꼴이다. 특히 급작스러운 전개와 함께 펼쳐지는 초반부엔 극중 몰입이 쉽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배우의 개인적 동선이 군무로 확장될 때 종종 세련된 무대 매너가 연출되지 못하고 스크린을 채운 배우들의 수적 우위만이 확인된다.
그 모든 악재를 무시하고 싶은 건 끝내주는 뮤지컬 넘버들 덕분이다. 걸출한 배우들의 목소리로 레코딩된 사운드 트랙은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당한 물건이다. 장면 연출에 대한 아쉬움이 상쇄되는 건 그 음악들이 발군의 엔터테인먼트적 충족감을 주는 덕분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은 가히 독보적이다. 물론 때때로 말괄량이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함을 유발하지만 그런 극히 일부의 상황을 배제한 대부분의 장면들은 장면의 평이함에 깊은 감흥을 불어넣는다. 특히 샘 카마이클(피어스 브로스넌)을 바라보며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르는 후반부는 잊을 수 없는 관록의 깊이를 발산한다. 생기발랄한 에너지가 충만하게 뒤엉키던 초반부의 어지러움은 덕분에 후반부로 접어들며 안정을 찾는다.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목소리로 불려지는 좋은 노래들 덕분에 <맘마미아!>는 뮤지컬의 명성을 따라잡지 못해도 사랑스러운 영화로 거듭난다. 특히 결말부 엔딩 크레딧과 함께 펼쳐지는 특별한(?) 공연은 흥겹다. <맘마미아!>는 지중해의 푸른 바닷물처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해맑은 감격을 줄만한 영화다. 그리고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을 미소 짓게 한다면 충분한 값어치는 있다.
‘롤링 스톤즈’가 길 바닥의 구르는 돌멩이만큼의 관심거리도 안 되는 이에게 이 영화를 권하기란 힘들지 모를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담긴 공연이 어떤 극영화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무대가 롤링 스톤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런던의 클럽에서 데뷔해 ‘비틀즈(Beatles)’와 함께 브리티쉬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의 신화를 쌓아 올린 로큰롤의 악동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며 여전히 패기만만하게 살아있다. 2005년, 13번째 정규앨범 타이틀 ‘A bigger bang’을 발표하며 이뤄진 월드투어이자 최다수익을 기록한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Bigger Bang tour’ 중 뉴욕의 비콘 극장(Beacon Theater)에서 이뤄진 공연실황을 담아낸 <샤인 어 라이트>는 이 밴드의 거창한 역사를 뜨겁지만 담백하게 소개하는 스포트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 마이클 워드라이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촬영한 20시간 분량의 필름을 4시간 가량으로 편집해 <우드스톡>을 완성한 장본인이 마틴 스콜세지임을 제시한다면 <샤인 어 라이트>의 설득력은 더해진다. 게다가 밥 딜런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생생히 기록하며 뮤지션의 모호한 내면을 들춤으로써 그 아우라를 강건하게 재생하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2005)을 경험한 누군가라면 소통이 난해한 뮤지션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이룬 마틴 스콜세지의 내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샤인 어 라이트>의 무대가 변변찮은 라이브 클립에 불과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공연실황 라이브클립으로 치부(?) 당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이 공연실황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 이가 뉴욕의 필름 거장 마틴 스콜세지라는 점이 든든한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공연을 앞둔 롤링 스톤즈 멤버들의 여유로움과 공연 셋리스트를 기다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초조함을 대비시키며 출발하는 <샤인 어 라이트>의 초반부는 긴 세월 동안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은 뮤지션과 영화감독의 치열한 대립구도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밴드의 생존력을 여전히 무대에서 증명하는 뮤지션의 풍모와 필름을 관통한 시선으로 긴 세월을 관조한 영화감독의 치열한 자의식은 중후한 관록의 형태로 융합되어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결국 공연을 기다리는 공연장의 관객들만큼이나 카메라를 통해 무대를 보게 될 관객들의 긴장을 불어넣는데 적합한 역할을 한다. 라이브 무대가 펼쳐지기 전, 마틴 스콜세지는 공연 이전의 풍경들을 끌어와 무대의 열기를 이루기 위한 발화점의 온도를 찾는다. 비로소 롤링 스톤즈의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무대를 향한 객석의 열기는 적절한 온도로 상승하고 이내 마틴 스콜세지의 슛 사인과 함께 시작되는 첫 번째 넘버 ‘Junpin’ Jack Flash’와 함께 세차게 가열된다.
19곡의 셋리스트로 이뤄진 공연은 관객들의 열광만큼이나 멤버들의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무대에 넘치는 활력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끝내주는 공연이다. 앙상하지만 섹시하게 하늘거리는 몸동작으로 열정적인 보컬을 선사하는 믹 재거의 무대 장악력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의 모델로 알려진 키스 리차드의 독특한 패션만큼이나 시선을 빼앗는 기타연주와 무대매너는 단연 훌륭하다. 또한 키스 리차드의 기타를 보완하는 로니 우드와 그들의 뒤에서 차분하게 드러밍에 집중하는 과묵한 찰리 와츠는 파수꾼처럼 무대를 든든하게 이룬다. 또한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잭 화이트, 블루스의 장인 버디 가이와 팝의 뮤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게스트로 등장하며 특별한 즐거움을 더한다. 총 16대의 카메라는 세련되면서도 박력 있게 무대 너머로 흐르는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특히 곡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롤링 스톤즈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비롯한 기록들은 롤링 스톤즈의 오랜 여정을 서술하며 무대의 저력에 깊은 감상을 부여한다. 오랜 관록으로 카메라를 조율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깊은 음악적 조예는 인물에 대한 탁월한 접근적 시선을 더하며 <샤인 어 라이트>에 깊이 있는 열광을 부른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을 예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지켜봤던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이 무대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그저 롤링 스톤즈의 명곡들이 담긴 라이브 실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무대를 재현하는 일종의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링 스톤즈의 무대와 그것을 바라보는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은 거대한 관록의 시너지를 이룬다. 연륜 있는 필름거장은 위대한 라이브 제왕의 무대에 영원을 헌정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바라볼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비로소 2시간 여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하늘로 솟아올라 뉴욕의 거대한 야경을 비춘다. 그 풍경과 함께 흐르는 넘버 ‘Shine a light’의 가사, ‘shine a light on you’처럼 조명은 무대를 비추지만 그건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을 위해 비춰지는 빛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VIP석이다. 실로 그 무대를 즐길 줄 아는 관객에게 <샤인 어 라이트>는 실로 비좁은 상영관의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몸을 흔들며 환호하고 싶을 만큼 전율적인 흥분을 선사한다.
지난 2000년, 인터넷에 유포된(?) 류승완 감독의 중편영화 <다찌마와 LEE>를 보며 방구석에서 낄낄댄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주소지를 옮긴 자기 복제작,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품종 개량작이라 명명해도 좋다. 버전업된 ‘일백푸로 후시녹음’과 ‘정통 액숀’, 그리고 상하이와 만주, 스위스, 미국까지 이어지는 다국적 비(非)현지(?) 로케이숀으로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디지털 푸로젝트’ 액션협객물 <다찌마와 LEE>를 글로발 스케일의 잘빠진 첩보액션물로 확장시킨 또 한번의 문제작이다.
과장된 수사를 남발하던 한국고전액션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원형 그대로 영화에 활용한 <다찌마와 LEE>는 구시대적 촌스러움을 복고적 유희로 승화시키는데 전략적으로 성공했다. <다찌마와 리>역시 그 전략을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답습한다. 다만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인지 의도적 규모가 넓어졌다. 자신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류승완 감독이 추가한 메뉴의 정체는 박노식 감독의 1977년작,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에 ‘급행’의 추임새를 넣어 변주된 긴 부제로부터 음미할 수 있다. 권선징악의 목표가 뚜렷한 6~70년대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만연했던 수사남발 장문대사를 익살스럽게 배치하던 <다찌마와 LEE>의 전략적 응용사례를 헌사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그 영역을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동아시아 첩보활극까지 확대했다. 게다가 유희적 스킬이 추가됐다. TV에서 종종 개그맨들이 구사하던 엉터리 외국어 음차가 거리낌없이 도입됐고, 그와 함께 무단 배포 형식의 인터넷 영화자막을 활용한 풍자적 개그까지 가미된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적인 화장실 개그도 종종 눈에 띤다. 극장판은 과거 인터넷판보다 분량이 늘고 스케일이 확대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희적 너비의 폭을 더욱 발전적으로 확충했다.
<다찌마와 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아이러니한 영화다. 쌈마이 정체성의 구시대적 B급 유희를 발산하지만 때깔은 최신판 세련미로 충만하다. 어찌 보면 이건 굉장히 실험적이다. 낡아빠진 구시대적 유물에 현대적 회화기법을 채색하는 모험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지러진다면 그 의도적인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시대를 배반하는 언어가 유희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된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수긍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찌마와 리>는 모든 것이 헐거워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계산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흥적으로 발생한 애드립을 추임새로 넣어도 상관없을 듯한 장문대사들의 희극성은 실제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의 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쯤 나사 풀린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실제론 확실한 의도를 품고 조율된 경로로써 진행되는 영화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모든 경로를 추적하는 배우들의 역할 몰입이 중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임원희의 연기는 애초에 <다찌마와 LEE>로 잉태된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국경 살쾡이 역을 맡은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웃음을 발생시키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의 희생양은 진상 8호 역의 정석용이 맡았다.-이건 보면 안다.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를.- 게다가 박시연의 일관성있는 후시 연기도 꽤나 눈길을 끈다.
하지만 뼈 속까지 유치 찬란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비범함은 있다. 코믹과 액션은 <다찌마와 리>의 양 날개나 다름없다. 전자가 관객과 스크린을 끼워 맞추는 너트라면 후자는 그것을 조이는 볼트나 다름없다. 웃음은 관객을 <다찌마와 리>로 응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감상적 매개체라면 액션은 그 감상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적 지점이다. 최근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실제 만주를 카메라에 온전히 보존하며 호쾌한 활극적 기운을 담아낸 것과 비교했을 때 영종도를 눈 딱 감고 만주로 치환한 <다찌마와 리>의 성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에 실제로 접근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대범함은 <다찌마와 리>가 단지 퍼포먼스 위장술에 능통한 혹은 우격다짐이 강한 영화라서가 아니다. 다찌마와 리가 자신을 찾아온 국경 살쾡이와 마적단 일행에 맞서는 일대 다수의 평원 결투씬은 만주 평원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놈놈놈>의 그 장면 못지 않게 스펙터클한 감상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류승완 감독은 세월 너머로 희미해진 한국고전액션영화에 새로운 육체를 대입해 재생하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다찌마와 리>가 품은 비범한 액숀 로망이 한없이 분출된다.
<다찌마와 리>는 마치 막 꾸며낸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언변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싸구려 유희의 의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찌마와 리>는 그저 열라 유치한 삼류영화로 몰락해버릴 공산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는 순간적인 컷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감탄할 정도다. 특히 거대한 자막을 패기만만하게 앞세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흑룡강 씬을 예로 들만하다. 누가 봐도 성수대교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차가 앵글에 포착되고 뒤편으로 아파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영화는 그 곳이 압록강이라고 시치미를 떼더니 후에 두만강과 흑룡강까지 재활용하면서도 딱 잡아뗀다. <다찌마와 리>의 다국적 로케이숀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커밍아웃이다. 하지만 그 우격다짐이 실소 대신 폭소를 유발하는 건 실제공간을 대리 출석한 그 짝퉁 공간들의 기능성이 기발하게 발휘되는 덕분이다. 순발력있는 유희를 그 순간에 확실히 소비하되 그것을 토막내지 않음으로서 전체적인 리듬을 해치지 않는다. <다찌마와 리>는 상당히 노련하면서도 민첩하고 성실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 경험에서 잉태된 의욕적인 시도들이 상당수 엿보인다. <다찌마와 리>의 뻔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 의욕이 남기는 잘생긴 호감 덕분이다.
멀더의 방에 들어서면 항상 그 문구를 먼저 봐야 했다. I WANT TO BELIEVE, 나는 믿고 싶다. 그것은 ‘엑스파일’의 정신을 대변하는 슬로건이자 이 TV시리즈에 애정을 아끼지 않던 이들의 신념처럼 숭고한 것이었다. <엑스파일>의 테마는 진실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미지의 정체를 추적하는 멀더와 스컬리는 각각 반대의 영역에서 신념의 물음표를 던지곤 했지만 이는 각각 진실이란 종착역을 향한 귀납과 연역의 레일로서 서로를 보완했다.
1993년 9월 10일에 시작해 2002년 5월 19일까지,-한국은 1994년 10월 31일부터 2002년 10월 25일까지- 장장 9시즌에 걸쳐 방영됐던 <엑스파일>은 ‘미드’의 원조 혹은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에 기획된 첫 번째 극장판 <엑스파일: 미래와의 전쟁>(이하, <미래와의 전쟁>)이 만족할만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지 못했음에도 TV시리즈의 종결 이후 6년 만에 새로운 극장판 <엑스파일: 나는 믿고싶다>(이하, <나는 믿고싶다>)가 기획된 건 여전히 그 TV시리즈의 아우라가 잉태한 신앙심의 유효기간이 존재하리란 믿음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지막 에피소드가 종료된 지 6년이 지난 새로운 시대에도 <엑스파일>이란 제목이 눈길을 끄는 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의문이 강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믿고싶다>는 외계인 음모설과 기괴한 미스터리라는 두 개의 불가사의를 주요한 소재로 삼았던 <엑스파일>에서 후자의 맥락을 선택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전자를 바탕으로 했던 지난 극장판이 ‘엑스파일’이란 밑그림을 통해 완성한 블록버스터에 가까웠다면 후자를 선택한 이번 작품은 외양적 스케일보단 공포와 신비라는 내실에 주력한 모양새다. 형체가 모호한 의문을 제시하며 출발하는 특유의 방식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하며 그 의문을 해소하는 여정에서 새어 나오는 미묘한 긴장감의 돌발적 리듬도 TV시리즈의 그것과 유사하다. 미묘한 의문을 끌고 가던 기존의 <엑스파일>시리즈에 익숙한 이라면 이는 분명 반가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어떤 빈틈을 만든다. 1시간 미만의 분량이던 한 회 분량의 에피소드를 90여분간 지속시키는 방식은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구조로 작동한다. 동시에 틀의 문제가 발생한다. 방대한 외형적 규모라는 레시피를 얹어 구워낸 <미래와의 전쟁>이 시리즈 특유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평범한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어진 전례와 같은 맹점이 <나는 믿고싶다>에도 존재한다. <나는 믿고싶다>는 기존의 TV시리즈가 지닌 미스터리의 신비를 부각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지만 그것을 비범함의 영역으로 승화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그건 아무래도 기존의 에피소드 분량보다 넓은 극장판의 너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과론적으로 <엑스파일>이 지니고 있었던 미해결과제의 신비를 폭로해버리는 까닭이다. <엑스파일>의 에피소드는 그것이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의 결말로서 완전한 아우라를 보존했다. 하지만 <나는 믿고싶다>는 그저 평범한 범죄스릴러의 그것처럼 <엑스파일>의 새로운 과제에 확실한 마침표를 찍고야 만다. 특유의 신비로운 아우라는 끝내 증발한다. 또한 에피소드와 함께 진행되는 멀더와 스컬리의 미묘한 드라마 라인은 팬서비스에 충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신비스러운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단서라고 지적될 땐 어딘가 구차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나는 믿고싶다>가 눈길을 끄는 건 그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어졌던 마지막 이후를 다루고 있는 까닭이다. FBI수사관을 그만두고 자신의 전문분야인 의사로써 살고 있는 스컬리와 FBI의 음모에 휘말려 역시 FBI수사관직을 박탈당한 채 잠적한 멀더의 이야기는 분명 이 시리즈에 대한 신앙심이 충실했던 팬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하지만 문제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나는 믿고싶다>는 팬덤이란 신앙심에 의존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후의 이야기란 점은 최소한 그 이전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가 감상에 작용할 확률이 크다는 의미다. <나는 믿고싶다>를 포함한 두 개의 극장판이 TV시리즈의 서사를 영화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기존 시리즈를 섭렵하지 못한 이들과 괴리감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지닌 가능성임과 동시에 한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확실한 건 멀더와 스컬리가 다시 진실을 쫓는다는 것이다. 그저 멀더와 스컬리의 얼굴을 죽은 듯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엑스필(X-Philes)들에겐 스페셜 에디션(Special Edition)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신앙심이 관건이다. <엑스파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일말도 없는 이들에겐 이해할만한 의무감을 부여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범죄스릴러에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결국 믿는가, 믿을 수 없는가, 라는 문제의 양갈래 길에서 관객의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이건 충분한 계기가 부족한 이들에겐 과도한 학습의 장이다.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해도 그 진실을 보기 전에 선행돼야 하는 건 그것을 넘고자 하는 의욕의 고취다. 흥미를 자극할 만큼의 특유의 신비를 자체 발광시키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반사시키려는 <나는 믿고싶다>는 결국 향수를 복기하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의 기능성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그들만의 잔치가 화기애애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쨌든 더욱 확실한 건 더 이상의 <엑스파일>이 없을 것이란 예감이다. 적어도 이 시리즈와 한 시대를 건너왔다고 자부하는 당신이라면 특별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P.S>당신 스스로가 엑스필(X-Phile)임을 자부한다면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야 한다.
뉴욕의 한 지하철, 졸고 있던 승객 하나가 눈을 뜬다. 늦은 새벽의 지하철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가 문득 옆 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서서히 옆 칸으로 통하는 문을 향하던 그의 발이 무언가를 밟고 세차게 미끄러진다. 그가 밟은 것은 바닥에 흥건한 붉은 피, 당황하는 남자는 지하철 기둥을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난다. 심히 경악할만한 광경을 앞에 둔 남자가 무언가에 홀린 듯 옆 칸으로 통한 문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 쪽으로 서서히 다가선다. 그 창 너머를 바라보는 남자의 경직된 동공이 향한 곳에 놓인 건 누군가의 뼈와 살을 가르는 어느 살인마의 뒷모습이다.
클라이브 바커는 <헬라이저>(1987)나 <캔디맨>(1992)과 같은 작품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잔혹성을 과감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전시하는 감독이나 기획자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단 그 작품들의 원작자로서 더욱 확고한 유명세를 자랑한다. 공포소설의 대가 클라이브 바커의 유명한 공포단편집 '피의 책'에 수록된 동명원작단편을 영화화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Midnight Meat Train>(이하, <트레인>)이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이것과 무관할 리 없다. 도시의 기원에 얽힌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은 실로 순수한 공포심을 자극하면서도 도시의 참혹한 내면을 고찰하고자 하는 정치적 혐의와 맞닿아있다. 도시의 기원이었던 오래된 존재들에게 인육을 바치기 위한 제단으로써 운행되는 새벽의 지하철은 가히 그 공간 자체만으로도 괴기한 초현실의 공포를 소환하는 자질이 된다. 또한 그 비밀스런 제례를 위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희생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치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도시의 이면에 놓인 계층적 갈등과 착취적 질서를 살피는 계기로 해석될만하다.
97분 러닝타임의 기원이 된 40페이지 분량의 단편원작은 모티브의 출발점이라기 보단 구심점으로서 명확하게 영화 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트레인>은 원작의 질감을 보존하면서도 형태적인 변주를 통해 새로운 양식의 작품을 재생산한다. 두 인물의 대칭적 구도를 한 점으로 맞닿는 방식으로 전진시켜나가던 원작의 평행적인 캐릭터 배열방식과 달리 <트레인>은 레온(브래들리 쿠퍼)과 마호가니(비니 존스)의 접근성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이는 방식으로 긴장감의 수축과 이완을 거듭한다. 또한 짧은 단편 분량 속에서 미니멀하게 소개되던 인물의 성향은 약간의 변화를 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졌다. 특히 영화에서 최대한 변주된 건 마호가니인데 그는 원작에서 보이던 최소한의 인간미마저 벗겨진 무신경한 광신적 살인마로서 재창조됐고, 결국 그는 영화상에서 절대적인 공포를 발산하는 주체로서 군림한다.
인물의 심리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직접적인 긴장감을 던지던 원작에 비해 진원과 진앙 사이가 멀어진 영화는 그 거리감을 통해 긴장감을 조율한다. 특히 변주된 캐릭터와 함께 뼈대에 살을 붙이듯 서사적 너비를 넓힌 영화는 인물간의 동선에 따라 긴장감도 함께 넓혀나간다. 사진작가로서 도시의 진짜 풍경을 담고자 하는 레온이 우연히 지하철 실종사건의 단서를 얻은 뒤, 사건의 현장을 포착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마호가니에게 접근할 때마다 마호가니의 굳은 얼굴만큼이나 지배적인 공포가 두려움이 역력한 레오의 표정을 통해 감지된다. 특히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두 인물의 추격씬은 가려진 시야를 헤매는 레온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그 긴장감의 포석은 거대한 망치로 무자비하게 사람의 머리를 내리치는 마호가니의 무자비한 행위에 대한 목격에서 비롯된다. 등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마호가니가 목표로 삼은 대상의 등뒤에서 당사자도 모르게 망치를 들고 뚜벅뚜벅 다가서는 광경을 지켜보는 심정은 심장을 움츠리게 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이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면 연출력의 탁월함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시야적인 맹점을 확보함으로써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순발력이 아니라 차근차근 대상에 접근하는 살인마의 전진을 바라보는 앵글의 무기력한 목격행위는 알면서도 대처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예견된 공포를 지배적으로 진전시킨다. 물론 그 살인 이후로 벌어지는 마호가니의 인간도축행위와 고기처럼 매달린 인간의 초라한 육신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에 도전하듯 적나라하여 되려 먹먹할 지경이다. 영화는 심리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진원지가 다른 공포의 발전적 양상을 성공적으로 조합해나간다.
영화는 도시의 이중적 내면을 고찰하던 원작의 함의적 공포와 다르게 선을 넘어서버린 어느 인간의 욕망을 그에 결부시키며 파괴적으로 변질된 인간의 내면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살인마 마호가니를 추적하던 레온이 그의 무시무시한 인간도살행위를 카메라로 담은 뒤 점차 변해가는 모습은 도시의 풍경이 인간에게 끼치는 거대한 영향력을 직감하게 한다. 결국 사진작가의 순수한 열망은 도시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와중에 예기치 않게 거대한 변질을 맞닥뜨리게 되고 이는 결국 그 남자의 삶을 거대한 파국으로 몰고 간다. <트레인>은 원작만큼이나 과감한 결말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미묘한 변화를 감당하게 만들고, 그와 무관한 이들에겐 이질적인 백색공포를 강권하지만 세계관이 머금은 기운 자체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공포를 선사한다. 결국 파멸적이면서도 묵묵한 엔딩은 원작의 그로테스크한 세계관을 보존하면서도 영화적으로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수능을 약 170여일 남긴 어느 토요일, 전교 1등부터 20등까지의 성적을 기록한 학생들이 엘리트 수업을 받기 위해 학교로 모인다. 그러던 중 수업 도중인 교실 스피커를 통해 '엘리제를 위하여'가 흐르고 영어교육 DVD가 플레이 되던 TV화면에 물이 차오르는 수조에 갇힌 전교1등 혜영의 모습이 등장한다. 스피커의 목소리가 제시하는 문제를 맞춰야만 함정에 빠진 친구가 살 수 있다. 학생들과 선생들은 동요하지만 곧 친구를 구하기 위해 해답을 찾는다. 하지만 문제는 만만찮고 수조는 점점 목덜미까지 차오른다. 게임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사: 피의 중간고사>(이하, <고사>)는 밀폐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지능적 게임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밀폐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 성공적인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의 밀폐성을 관객에게 철저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공간의 원초적인 폐쇄적 공포가 확실한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쏘우>가 그랬고, 최근 <디센트>나 <REC>가 그랬다. 물론 단순히 잔인 무도한 학대적 살인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관객을 위협하는 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공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 자체의 의미를 확실히 되새기게 만들어야 한다. 폐쇄적 공포의 잠재력을 지닌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본래 의도에서 가장 현명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고사>는 명백한 실패작이다. (추후에 밝혀지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학교 밖을 나가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통제되는가라는 물음은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공간의 밀폐성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 무엇이 그들을 그 학교로부터 나갈 수 없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고사>의 밑천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것을 대체하는 건 <쏘우>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잔혹한 고문기구들이다. 학생들을 하나씩 장치 안으로 유인하거나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을 눈뜨고 바라보게 하는 악취미가 (의도한 바가 아닐지 몰라도) <고사>의 본질에 가깝다. 하지만 그 공간에 대한 공포가 형성되지 않는 지점에서 기이하게 그 공간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무지한 캐릭터들의 혼란에 몰입하기란 여간 귀찮고 언짢다. 게다가 고등학생들을 몰아넣은 지적 게임의 수준 또한 극히 불공평하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고사>는 일종의 컨닝으로 이뤄진 오답이다. 공포라는 물음에 대한 핵심을 짚어내는 똑똑함도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성실함도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 와중에 산만한 캐릭터들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한다. 덕분에 이야기도 산만하다. 장르적 형태와 구조적 활용 역시 두서가 없다. 스릴러적인 태도를 보이다 어느 순간엔 호러로 돌변한다. 그나마 정체불명의 범인이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게임을 속행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앞뒤 분간이 된다. 하지만 그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단서들이 이미 부실한 게임에서 정답을 맞추는 게 중요한 문제 같지 않다. 전체적인 틀이 엉성한 영화는 이미 시퀀스마다 갈피를 못 잡고 미로를 헤맨다. 애초에 의도했던 폐쇄적 공포가 일찌감치 증발된 상황에서 발견되는 건 덧없는 잔혹극의 두서 없는 불편함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고사>가 정치적 자의식까지 욕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칭찬이 아니라 안도에 가깝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
새까맣게 울렁거리는 도입부 화면이 너무도 유명한 그 신비로운 시그널과 함께 브라운관을 메우면 마냥 가슴이 설렜다. ‘미드’란 유행어도 없던 그 때 그 밤에, 한국어로 더빙된 멀더와 스컬리를 만나는 건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매 번마다 아리송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고이 떠나는 엔딩에 사무쳐 TV가 있는 마루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처럼 다시 보기도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어제 봤던 그 장면의 전율을 언어로 되새김질하는 게 소일거리였다. 어느덧 그 시절을 지나왔고, 멀더와 스컬리도 <엑스파일>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역시나 울렁거리는 화면 속에서 신비롭게 흩날리던 시그널로 안녕을 고했다.
좀더 나이를 먹고 나니, 멀더와 스컬리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준 이하의 음모 앞에서 무력해져야 하는 현실이 때론 두렵다. 차라리 그것이 UFO나 외계인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 주문은 누굴 위한 것이었나. 그 화면 너머에서 알게 모르게 이지러지던 진실의 그림자는 누구를 향해 달아나고 있었나. 그 시절, 가늠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초현실은 차라리 천박한 권력적 음모가 난무하는 현실보다 거룩한 것이었다. 진실의 벽을 넘어가고자 분투하는 멀더와 스컬리와 함께 난 하나의 세월을 넘어왔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나. 나는 믿고 있었나.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을.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나는 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위해,그리고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