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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영화는 항상 김기덕으로 수렴한다. 김기덕의 영화를 논리정연한 서사의 텍스트로 해석하는 건 무리다. 근래 발표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의식의 흐름에서 비롯된 추상적 퍼포먼스를 씬과 씬 사이에 이어 붙이곤 하는 김기덕의 영화를 서사적 논리의 연속성을 염두하고 쫓아간다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은 ‘김기덕’이란 고유명사적 자의식으로 채워져 있다. 지극히 사적인 관념 안에서 응축되거나 확장된 추상적 자의식을 추적하기란 편한 일이 아니다. 때때로 사소한 미장센조차도 잠재적 의미가 존재하리라 의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적확한 해석은 결국 그 해석의 대상만이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찰자의 추론은 그 의식적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기덕의 열다섯 번째 영화 <비몽>도 마찬가지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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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커다란 상실을 겪은 자아로부터 지속된 켄지(아사노 타다노부)와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 삶은 각각 10년과 7년이 지나서야 다시 이야기를 얻었다. <헬프리스>와 <유레카>를 통해 각각 자아의 붕괴를 겪고 척박한 여정을 꾸려나가던 이들의 삶에서 시선을 돌렸던 이오야마 신지 감독은 긴 시간이 지난 뒤 다시 한번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상처 입은 아이들의 여정이야 어찌됐건 그네들의 삶은 현실에 봉착했다. <헬프리스>의 전사를 짧게 응축해버리는 무덤덤한 자막처럼 지나버린 삶은 허망할 겨를도 없이 현실을 들이민다. 중국인 밀항선을 돕는 일을 하던 켄지는 아버지의 주검 옆에 아무 말없이 앉아있던 어린 아춘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산다. 도입부의 자막에서 간단히 소개되는 (<헬프리스>의) 야스오의 동생 유리(츠지 가오리)를 돌보던 켄지는 아춘까지 자신의 식구에 편입시키며 유사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고 가출을 한 (<유레카>의) 코즈에는 마미야 운송을 찾아가 일을 구하고 그 부근의 숙소에 상주하게 된다. 그러다 대리운전을 하던 켄지는 우연히 마미야 운송의 사장차를 몰게 되고 그의 행선지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다름아닌 10년 전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가 그가 모신 사장의 아내가 된 어머니(이시다 에리)다.

10년이 지난 전사(前史)도,(<헬프리스>) 7년이 지난 전사도(<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에서는 서사의 공백이 분명치 않은 과거의 기억일 뿐이다. 켄지와 코즈에가 각자 맞닥뜨려야 했던 삶의 방황은 서로의 운명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교감이었을까. <새드 배케이션>은 공동체의 붕괴가 튕겨낸 파편에 상처 입었던 동시대적 청춘의 삶을 동일한 시간의 흐름 위에 흘려 보낸 뒤 같은 위치에 다다를 때즈음 건져낸다. 하지만 구원 없는 삶에서 반목하던 켄지의 삶과 긴 방황의 길 위에서 갈림길을 체감한 코즈에의 삶은 현재의 좌표가 다르다. 오랜 삶 속에서 분노를 삭이고 갈등에 지쳐버린 남자의 삶과 달리 허망하게 찾아온 삶의 공포를 유랑하다 도피적 삶의 막다른 길을 발견한 여자의 삶은 성숙의 차이로 드러난다.

어머니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세계에 편입되지만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를 교란시킴으로서 복수를 감행하는 켄지와 달리 코즈에는 자신이 머무르는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뿌리내림으로서 삶을 포용한다. 켄지의 응어리진 내면의 분노가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소통되고 이를 통해 그가 완수하려던 일방적 복수는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의 끝없는 자애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변색되며 결국 오랜 방황의 선상을 헤매던 그의 여정이 옹졸하기 짝이 없는 응어리만을 단단히 결속했을 뿐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새드 배케이션>은 삶의 언저리를 돌던 인물들의 인생이란 본질적인 삶의 가치를 호명하기 위한 귀속적 굴레일 뿐임을 생경하지만 선명한 어조로 말한다. 내면으로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상처들에 떠밀려나간 외부적 삶의 여정은 이탈의 경로를 거쳐 다시 궤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자리로 돌아온, 혹은 그 자리를 되찾은 켄지는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삶을 다시 한번 튕겨낸다. 하지만 튕겨나간 삶이 예전과 다른 건 그 삶을 보듬어 안아줄 어머니가 있다는 것. 철없는 남자의 본성은 탯줄의 흔적을 부정하지만 결국 따뜻한 양수의 포근함을 뒤늦게 깨닫고야 만다. 만삭 같은 어머니의 자애심은 결국 남자들의 치졸한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닫게 만든다. 아버지로 인해 붕괴된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남몰래 쌓았던 아들의 비좁은 삶은 결국 모정으로부터 마련된 자궁의 넉넉한 온정을 체감할 따름이다.

결국 그 남자가 애써 부정하려 했던 어머니는 결국 그 남자가 돌아가야 할, 혹은 돌아가길 갈망했던 염원의 지표였다. 비범한 허세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들)의 삶은 비로소 비누방울처럼 덧없이 부서지고 여자(들)의 웃음이 날이 선 남자들의 긴장마저 깎아낸다. 그곳에 가족이 있고, 어머니가 있으며, 아내가 있고, 여동생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코즈에는 사채업자의 횡포에 떠는 고토(오다기리 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렇게 남자의 삶은 여자의 성숙에 안긴 채 안도의 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 쯤해서 이야기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될 것이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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