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임파서블>을 발표한 것이 1996년의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하, <미션 임파서블 4>)은 15년 만에 발표된 네 번째 속편이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는 분명 이단 헌트의, 좀 더 정확하게 이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존재감으로 굴러가는 영화다. 다만 이번 속편에서는 지난 세편의 전작들과 다른 조짐이 발견된다. 전과 달리 전편과의 서사적 연결성이 뚜렷하게 발견되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눈에 띄는 건 이단 헌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상을 전시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단 헌트를 위시한 IMF 팀원들의 조직력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를 비롯해서 프라하와 뭄바이 등 세계 각지의 풍경을 미장센으로 삼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서사 구조는 간결하다. 인류의 멸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재 과학자가 핵전쟁을 조장하려 하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단 헌트는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선악이라는 양진영으로 대립하며 뚜렷한 자기 역할을 얻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미션을 수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안에서 각자 자기 진영의 역할을 코스프레한 배우들이 대단한 물량공세를 등에 업고 스턴트 액션을 전시해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네 번째 속편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위력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 초반부, 크렘린궁 폭파신으로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은 부르즈 칼리파 스턴트신과 이를 잇는 모래폭풍 추격신,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격투신까지, 위력적인 볼거리들을 우월하게 디자인해낸다.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창의력으로 설계된 몇몇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르즈 칼리파 등반 스턴트신의 반중력적인 액션과 거대한 모래폭풍이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적을 추격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뒤엉켜 구르며 펼치는 격투신은 단지 그 위력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인크레더블’한 인상이다. 이런 이미지의 설계는 ‘픽사’ 출신의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중전화의 변신 광경을 비롯한 몇몇 소품에서 발견되는 위트는 전적으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바로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팀원들은 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조직원들의 탄탄하고 유기적인 팀워크를 통해서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양상은 시리즈의 쇄신을 예감하게 만들 만큼 신선한 변화에 가깝다. 덕분에 개개인의 조직원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발생시키는 영향력 또한 증가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차별적인 감정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시종일관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되던 전작들과 달리 극 중에서 심심찮게 유머가 발생한다는 것. 이는 사이몬 페그 덕분인데, 긴박한 순간에도 정색하듯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 안에서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벤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단 헌트 못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는 브란트(제레미 레네)와 함께 새로운 팀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제인(폴라 패튼)은 시리즈의 차기작을 예고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시리즈의 새로운 전환점에 가깝다. 이단 헌트의 원맨쇼 대신 팀워크가 강조된 이번 시리즈는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밑천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체력적 안배가 이 시리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한계도 여전하다. 그만큼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이 시리즈의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드 팔마의 냉소적인 첫 작품을 그리워하는 팬덤 앞에서 이번 작품은 여러 모로 이질적인 결과처럼 인식될 수 있겠지만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다이나믹한 디테일이 공존하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획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장르물이 아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가 등장함에도, 단순히 로맨스물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10대 취향의 하이틴 무비에 가까운 것은 맞지만, 이것이 적확하게 하이틴 무비에 수용될 수 있는 것이냐면 그 역시 아니다. 물론 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장르적 정의가 그리도 중요한 건 아닐 테다. 할리퀸 로맨스? 물론 그쪽이 보다 유력해 보인다. 어쨌든 영화화된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거대한 팬덤을 담보로 시공된 작품이다. 그 맥락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비슷하다. 궁금한 건 그 원작이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건축될 만큼 매력적인 설계도였느냐, 라는 것이다.
일단 시리즈의 결말을 쪼갠 <브레이킹 던 part1>의 내용은 이렇다.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제이콥(테일러 로트너)과의 삼각 관계 안에서 에드워드를 선택한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임신한다. 잠깐,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서 임신이 가능하냐고? 그 전에 섹스는 가능한가? 그 전에 연애는 가능한가? 그 전에 뱀파이어가 사람 목을 물지 않고 버티는 게 가능한가? 이미 이 시리즈를 볼만큼 본 사람이라면 이제 와서 그런 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 중요한 건 벨라의 상태가 위독해진다는 것. 벨라의 뱃속에 든 아이가 인간의 자식이 아닌 탓에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길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생을 위협할 정도로 앙상해진 벨라와 이로 인해 타들어가는 심정의 에드워드의 심정과 분노를 금치 못하는 제이콥의 삼각 관계가 다시 활성화된다. 그것이 이 작품의 요지다.
사실 지난 세 편의 작품만으로도 시리즈는 자신의 할 말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시리즈의 결말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브레이킹 던>은 사실상 에필로그에 가깝다. 벨라의 결혼식은 시리즈의 부록 역할을 할만한 이벤트로서 유용해 보인다. 하지만 시리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결혼식 이후의 사건을 그린다. 물론 팬의 입장에서는 이 시리즈가 밀고 나가는 이야기가 어떠한가, 라는 사실보다는 이 시리즈가 그려나가는 모든 상황이 어떠한들 그저 지켜 보고픈 욕망이 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브레이킹 던>은 그런 팬덤의 심리를 담보로 증축된 사연처럼 보인다. 좋게 말하면 부록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족 같다.
물론 이 시리즈에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연애와 결혼이라는 관념에 대한 소년, 소녀들의 환상과 공포를 장르적 판타지에 이입한 체험적 오락물처럼 보인다. <브레이킹 던>은 이런 특성이 가장 구체화된 지점까지 나아간다. 특히 결혼과 섹스, 그리고 임신까지의 과정이 빠르게 진전되는 과정 속에서 벨라와 에드워드가 겪어나가는 희로애락은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통해서 우화적으로 진전된다. 하지만 이런 의미까지 읽어내기에 이 시리즈의 스토리텔링이, 캐릭터에 관한 깊이가, 지독하게 얕고 가볍다.
물론 이는 이 할리퀸 로맨스를 좋아했던 팬들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문제일 것이다. 단지 이 시리즈에 취향을 포갤 수 없는 외부인의 퉁명스런 투정에 가깝다면 모를까. 게다가 취향의 보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여 이 시리즈가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물론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그 취향의 외벽에 놓인 이들의 호불호가 영화의 취약점을 변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영화를 보고 원작을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발전하지 못할지라도 시리즈로 기획된 영화라면 다음 작품에 대한 호기심 정도는 안겨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단지 살아 움직이는 에드워드와 제이콥, 벨라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팬들의 이벤트물이 돼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팬덤의 위력을 통해서 얻은 흥행작의 지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겠지만.
시리즈의 의미를 떠나서 <브레이킹 던 part1>은 과한 기획이다. 딱히 긴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를 늘리느라 애쓴 흔적인 역력하다. 마치 남의 결혼식에 갔다가 분만실까지 끌려들어가는 것마냥 난감하달까. 물론 이미 세 번의 예시를 통해서 학습기회를 경험한 이가 자신이 이 시리즈를 소화할 수 없는 취향임을 깨닫고도 다시 한번 이 시리즈의 관람을 선택했다면, 문제는 그 당사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게 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삶과 죽음은 어쩌면 평행선에 놓여 있다.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죽음 또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단지 해가 뜨고지는 것처럼 명확하게 그 시작과 끝이 존재할 뿐이다. 불과 27세의 나이에 척추암 판정을 받고 생사의 확률이 50%라는 진단을 얻은 아담(조셉 고든 래빗)의 삶 역시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조깅을 하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그가 자신의 등이 기다란 암세포로 잠식당하리란 예감이 가당한가. 하지만 아담은 암 진단을 받으며 생사 확률 50% 선고를 받는다. <50/50>은 갑작스럽게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 아담이 겪게 되는 암투병기 혹은 암 선고 이후의 일상을 돌보는 이야기다.
<50/50>은 시나리오 작가 윌 라이저가 세스 로건의 권유로 자전적인 암투병 경험을 모티프로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시작된 영화다. 영화 속 사연과 그의 실제적인 경험이 얼마나 매치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화에 부여된 특이성을 비추어 판단했을 때, 그 개인적인 경험의 특수성이 이 영화의 근간이 됐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50/50>은 암투병 중인 주인공을 다룬 영화이지만 신파의 가능성이 농후한 소재에 매몰되는 대신, 인물의 일상을 유쾌하고 산뜻하게 길어 올리는 드라마로 완성됐다. 암투병의 과정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한 남자가 암투병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일상의 가치관에 관한 영화라는 것.
죽을 가능성이 5할이면 곧 살 가능성도 5할이다. 그리고 그 반타작의 가능성 위에서 생사를 예감해야 하는 남자를 비추는 이 영화는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배제한 채 그 일상의 변화를 탐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삶의 변화를 맞이하거나 모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친구의 만류에도 교제를 계속해온 애인과의 관계를 신랄하게 판단하게 되고, 가족과의 애정을 다시 확인하기도 하며, 평소 행하지 않던 일탈에 과감히 빠져들거나 참아왔던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 모든 과정은 일종의 발견이다. 죽음의 암시가 삶을 유지하는 수많은 규칙과 습관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는 삶이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여정임을 명쾌하게 일깨운다. 죽음은 때로 보다 선명하게 생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암투병이라는,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는 과정은 그 자체로 통증일 수 있으나 <50/50>은 이러한 과정조차 연속적인 삶의 진행 속에서 맞닥뜨리는 하나의 여정처럼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는 빤한 교훈을 설파하는 대신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 결국 어떤 삶의 결과를 이루는 총아의 조각임을 되짚게 만든다. 쿨하다기 보단 따뜻하고, 냉정하다기 보단 애정 어린 시선에 가깝다. 이 시선 속에 놓인 인물들, 즉 배우들의 존재감도 탁월하다. 조셉 고든 레빗과 세스 로건이 만들어내는 화학 작용은 <50/50>의 유쾌함과 진솔함을 불어넣는 동력과 같다. 평면적인 안정감을 선사하는 안나 케드릭의 미소와 수직적인 긴장감을 부여하는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의 히스테리는 영화의 감정적인 변화를 직감케 하는 좌표축과 같다. 그리고 <50/50>은 선택과 만족의 상관관계 안에서 직선의 상승 그래프를 예감해도 좋을, 유의미한 일상의 발견이다.
$114,457,768 vs. $39,722,689. 메이저리그의 최고팀과 그 아래에 있는 팀보다도 더 밑바닥에 있는 팀의 간극은 저 수치로 정리된다. 선수 몸값의 총액이 곧 팀의 실력을 대변한다. 수치만으로도 명백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프로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이는 메이저리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세계 모든 종목의 프로스포츠 대부분은 구단의 빈부격차를 통해서 순위의 계층화가 손쉽게 이뤄진다. 뉴욕 양키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통점은 실력 있는 부자 구단이라는 것. 부자 구단들은 한 시즌이 마감되면 자본을 투여해서 스타들을 영입하고, 새로운 유망주를 발굴하거나 스타를 길러낸 가난한 구단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자 구단의 선수 수집을 넋 놓고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듣고 있는 중이다. 2001년, 뉴욕 양키스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디비전시리즈. 3점 차로 앞서고 있던 오클랜드가 양키스에게 역전당하자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그리고 끝내 패배. 그해 오클랜드는 양키스에게 리버스 스윕, 즉 시리즈 역전패를 당했다. 남자의 손에 쥐어졌던 라디오가 멀리 날아간다. 그의 이름은 빌리 빈(브래드 피트), 오클랜드의 단장이다. <머니볼>은 빌리 빈에 관한, 그 빌리 빈이 이뤄낸 메이저리그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다. 세이버매트릭스라는 야구기록 통계 시스템에 빠삭한, 야구 경력이 없는 경제학 전공의 직원을 고용하고 기성 야구계의 편견과 한계에 맞서서 자신의 시스템으로 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적 실화가 담긴 경제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은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옮겨졌고, 베넷 밀러의 지휘 아래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머니볼>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몇몇 인물의 형태가 영화를 통해서 변형됐고, 연출적 감각으로 채워 넣은 영화적 찰나들이 예감되지만, <머니볼>은 드라마틱한 현실에서 길어낸 현실적인 드라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영화, 그것도 현실과의 불협화음을 이겨내고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도식적인 예감을 부른다. 주목할 것은 일찍이 <카포티>로 할리우드 감독상을 거머쥔 베넷 밀러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의 각본가인 아론 소킨이다. 그는 마크 주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또 하나의 화신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그리고 <머니볼>은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주커버그에 관한 전기가 아니었듯이, 오클랜드의 단장 빌리 빈에 관한 전기로 완성되지 않았다.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라는 인물보다도 흥미로운 건 그의 행위적 근간이 되는 경험과 심리의 탐색, 그리고 그 주변을 이루는 풍경의 관찰에 있다.
상실의 에너지를 페이스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 마크 주커버그처럼, 빌리 빈 또한 실패의 에너지를 파격적인 구단 운영의 동력으로 끌어올린다. <머니볼>은 야구 영화라기 보단, 야구가 등장하는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이는 과거의 경험에 기인해서 직접 경기를 관람하지 않는 빌리 빈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효과를 낳기도 하는데 이처럼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서사 속에 내재된 심리를 관객의 감상에 투영해내는데 여념이 없는 작품이다. 탁월한 임기응변과 제스처로 자신의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능한 빌리 빈이 텅빈 그라운드가 바라보이는 객석에 홀로 앉아 고독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 그 단적인 풍경 만으로도 인물의 심리적 간극과 고충이 오롯이 와닿는다. <머니볼>은 리드미컬한 서사적 운용과 탁월한 공간감의 활용을 통해서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추적하고, 광활하게 펼쳐놓는다. 아론 소킨의 스토리텔링을 베넷 밀러가 유연하게 세우고 맞춘다.
배우들의 공헌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머니볼>에서 브래드 피트는 지휘자와 같다. 마치 더 이상 근사한 외모로서 언급되길 거부하듯이 유려한 연기력과 압도적인 장악력을 드러낸다. 또한 빌리 빈을 보좌하는 경제학도 세이버메트릭스 전문가 피터 브랜드 역의 요나 힐과 오클랜드의 감독 아트 하우 역을 맡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극적인 흐름에 긴장과 흥분을 불어넣는 스페셜리스트의 위치를 점한다. 또한 모든 배우들은 훌륭한 화음을 자랑하는 관현악단과 같이 자신의 파트를 군더더기 없이 연주해낸다. <머니볼>은 팀워크가 뛰어난 영화다. 그랜드슬램 한방보다도 팀 배팅을 통해서 끊임없이 진루타를 치고 나가며 출루율을 높여나간다.
<머니볼>은 개혁과 진보에 관한 영화지만 결국 그 과정을 이겨내는 한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를 경험적 밑천으로 삼아서 새로운 사고를 실행으로 작동시킨 남자는 결국 그 신의 변화를 주도해내고 갈등과 불화를 견디며 새로운 답안을 정착시킨다. 물론 그 방안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빌리 빈의 정책에 따라서 오클랜드는 5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결국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또한 빌리 빈의 방식을 응용한 다른 팀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빌리 빈의 방식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이지 않은 듯한 영화적 시선은 어쩌면 공정한 것이다. 의외성의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고 통계에 기대는 기계적인 운영을 통해서 시즌 운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없다는 건 결국 아이러니다. <머니볼>은 결국 그 거대한 아이러니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성취로 환호했던 그라운드의 적막을 홀로 차지한 채 드러누운 빌리 빈의 모습이, 독보적인 스카우팅으로 게임을 지배한 덕분에 거액의 스카우팅 제의를 받게 된 빌리 빈의 선택은, 어떤 통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의외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이 영화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자신이 키우는 개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일러스트 작가인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에게는 45년 동안 부부로 살았던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이 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고백했다. 자신의 진짜 삶을 찾고 싶다고. 할은 게이였다며 아들에게 커밍아웃한다. 40대가 넘은 아들에게 70대 중반을 넘긴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제 삶을 찾아나서는 광경은 심란하듯 놀라운 발견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지인들에게 무료한 삶의 복판에서 스스로의 삶을 방치하듯 사는 그에게 아버지의 고백과 그 고백 이후의 삶은 잔잔하게 물결치는 파문이었다.
일상을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전전하던 남자는 능동적인 선택을 머뭇거린다. 그 선택으로 인해서 얻어질 변화가 그에게는 두렵기만 하다. <비기너스>는 바로 그 결정적인 선택을 통해서 능동적 변화를 맞이하기까지의 한 남자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기습적인 커밍아웃으로 인해서 출렁이던 삶을 담담하듯 받아들인 올리버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인식해나간다. 인생의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기존의 삶에 접어놓았던 진짜 삶을 펼쳐놓고 그 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에게 일종의 배반이면서도 생경한 자극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삶에 새로운 계기가 되는 건 사랑이다. 프랑스 출신의 여배우 애나(멜라니 로랑)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평온한 일상이 들끓기 시작한다.
<비기너스>는 제목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이들에 관한 영화다. 좀 더 정확하게, 새로운 삶의 문턱 앞에 들어선 이들에 관한, 그 시작 직전에 선 연인들의 시간을 살피는 영화다. 하지만 <비기너스>에서의 로맨스는 극의 중심을 관통하는 사연이라기보단 어떠한 전체를 이루는 조각의 요소처럼 보인다. 영화는 올리버를 중심으로 그가 목격하는 아버지 할과, 그와 직접적으로 감정을 교류하는 연인 애나와의 관계를 통해 극의 너비를 확보해나간다. 이 모든 관계는 올리버의 시선을 통해서 목격되고 해석되는데, 이는 곧 올리버의 시선이 <비기너스>에서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눈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올리버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인물의 변화보다도 그 변화를 완성하고 돕는 주변의 관계적 너비를 살피는 것이 <비기너스>의 핵심적인 감상에 가깝다.
물론 그 모든 관찰과 감정의 대상인 올리버의 변화가 <비기너스>의 화두인 건 맞다. 하지만 그 주변 관계에 대한 목격과 그 목격을 통해서 얻어지는 감정적 변화가 <비기너스>의 주를 이룬다는 건 다시 말해서 올리버가 그만큼 능동적인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 이해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중심인물인 올리버의 주변, 그 주변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삶을 목격하는 과정을 통해서 묵묵하지만 묵직한 성찰을 이끌어낸다. 인생의 막바지를 준비하는 나이에서도, 그것도 말기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뒤늦게 자신의 지난 삶을 부정하듯, 반대로 진짜 자신의 삶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듯 확고한 커밍아웃을 알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나가는 여정은 마흔을 넘어서도 확실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지 못하는 아들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자극을 안긴다. 그리고 사랑을 예감하면서도 한발 물러서서 경계선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들의 삶이 변한다. 누군가의 삶이 결국 가까운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키고 나아가게 만든다는 것. <비기너스>는 삶의 주체가 되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주변인의 삶을 비춤으로써 어느 개인의 삶이 단지 그 개인의 너비에 국한된,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14년 동안 소식을 모른 채 살아왔던 아들이 돌아왔다.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술병을 내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아들이 되레 놀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덕분에 집안은 파탄이 났다. 부부는 이혼했고, 형제는 헤어졌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유능한 트레이너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것.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형의 소식을 듣는다. 형은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형은 현재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있다. 그러던 중,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격투기 대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워리어>는 그 단도직입적인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영화다. 가정의 붕괴로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된 형제는 그로 인해서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그렇게 반목하게 된 형제가 링에서 해후해서 주먹을 맞대다가 결국 화해하게 된다.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관객을 교란시키기 보다 묵직한 주먹과 같이 직설적인 감정으로 감상을 두들긴다, 물론 시종일관 난타전만 벌이는 건 아니다. 가족과 형제의 관계를 둘러싼 인과가 천천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탐색전의 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인과는 단명하고, 서사는 직선적이다. 그만큼 인과의 말판 위에 놓인 말의 역할이 중해진다. 그 인과 위의 캐릭터를 대신하는 배우들의 기량이 중요하다는 것.
영화의 양 팔이나 다름없는 톰 하디와 조엘 에저튼은 자신들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공격력을 지닌 토미(톰 하디)와 인내와 끈기로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브렌든(조엘 에저튼)은 그 판이한 경기 운영 방식만큼이나 뚜렷한 갈등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각자 나름의 책임감을 안고 링에 오른 형제가 맞붙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불판 위에 열기처럼 점차 달아오른다. <워리어>는 형제와 가족의 갈등과 해후를 그린 단순 명료한 내러티브의 영화이지만 미군 해외 파병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미국 내 사회의 문제적 화두들을 건드린다. 단순한 주제에 현실적인 설정을 더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에 사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여느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격투기나 복싱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워리어>의 경기 장면들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특별한 수준을 자랑한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워리어>에서 거듭되는 경기 장면은 링에서 맞붙는 두 형제의 경기, 그 피니쉬 블로우를 위해 거치는 라운드일 뿐이다. 개인적인 명예를 걸고, 혹은 가족의 평화를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마주설 때, 그 공간은 가혹한 생존의 터전이 됨과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오해의 장벽을 깨부술 수 있는 화해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형제애와 가족애라는 명료한 감정이 곁가지를 최대한 쳐내고 몸통을 드러내듯 우직하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인스텝으로 서서히 걸어나가는 인파이터가 상대 선수의 사정권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듯 단도직입적이다. 그 한 방이 제대로 먹힌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했고 하나의 삶으로 융화되길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 한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한 아이가 생겼고, 다시 한 아이가 생겼다. 그들은 가족이라 불렸고, 더욱 너르게 삶이 분열하고 팽창했다. 하나하나의 생이 모여들어 더욱 커다란 삶의 영역이 자라났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분열하고, 생장하며, 격동하다, 소멸된다. 생명의 태동은 곧 삶으로 자라나 저마다의 세계를 이룬 뒤, 언젠가 사라진다. 단층과 같이 쌓인 시간들은 지층의 역사를 이루고 적층과 균열을 거듭하며 고유의 영역으로 멈춰서다 서서히 풍화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 사소하고도 거대한 생, 그 자체에 관한 영화다.
과작의 거장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를 통해서 현묘한 생의 철학을 우주적인 심연으로 띄워 보낸다. 엄격한 아버지와 그 아래서 자라난 아들의 반목,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들은 늙어가며,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나간다. 영화는 그 삶의 단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밀하고 광대하게 이 세계의 풍경들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느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다가도, 그 주변에 잠재돼 있던 광대한 대자연의 이미지들을 관조하듯 떠내려 보낸다.
사실 이는 형식적으로 지나친 과장이자 확대에 가깝다. 사소한 일상을 비추던 카메라가 초자연적인 감상을 부르는 광대한 몽타주들과 맞붙어 거대한 접점을 형성해내는 과정은 인위적이며 생경하다. 하지만 그 무분별한 몽타주들의 흐름에는 일정한 약속이 있으며 운율의 운동이 느껴진다. 탄생과 생장, 쇠락과 소멸의 여정이 뒤엉켜 완성된 세계가 스크린에 떠오른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의 이미지들을 거듭 지켜보다 보면 그것이 끝내 탐미적인 극치로 가 닿아 감상을 부풀어오르게 만듦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고, 거시적인 자연을 관조하는 영화의 전지적 시점은 끝내 이 세계의 모든 생의 너비를 아우른다. 탄생과 사멸의 예정 속에서도 꾸준히 생장하는 생은 흩어져 부유하다 한데 엉켜 돌다 덩어리져 구축되고 끝내 소멸하는 우주의 원리와 다르지 않음이 그 끝에 다다라 체감된다. 신앙적인 영험과 자연적인 신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경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저 이 세계를 채우는 모든 존재에 관한 역사를 응시하고 되찾아 짚게 만드는 영화다. 악상처럼 흐르는 유려한 이미지들은 사소하게 자리한 모든 세계를 유려하고 장엄하게 아우른다.
생의 영역은 거대한 우주에 예속된 먼지처럼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저마다 맞잡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 이룬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세계와 이 세계를 보존하고 움직인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연주하는 경건하고 장엄한 심포니다. 일상의 단면이 모여 하나의 생을 이루는 여정 안에서 우리는 마주하거나 마주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경의 일원으로 자리한 채 생의 너비를 이룬다. 우리는 결국 음표다. 이 세계의 연주 안에서 고유의 음을 내는 음표로서 완전하고 불완전하다. 그렇게 뿌리 내린 저마다의 생이 이 세계를 울리는 생장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딸은 어머니의 과거를 명예롭게 여겼다.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 모사드의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레이첼(헬렌 미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에게 실험이란 미명 하에 잔혹한 학살을 주도했던 어느 박사를 처단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녀의 한 쪽 볼을 가로지른, 깊은 창상이 짐작되는 긴 흉터는 일종의 훈장과 같다. 딸은 어머니의 애국적 활동을 기리고자 책을 집필했고 이를 헌정했다.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표정에는 감격보다도 근심의 기운이 역력하다. 사라지지 않는 지난 날의 상흔처럼 레이첼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있다.
2007년에 개봉된 이스라엘 영화 <Ha-Hov>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언피니시드 The Debt>는 원작의 뿌리로부터 복제된 동일한 뿌리의 영화다. 90년대의 텔아비브와 60년대의 동베를린을 오가며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환기시키는 영화는 위장된 진실로 서서히 접근해 나간다. <언피니시드>는 양심적 부채를 청산하지 못한 어떤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덮고, 명예로운 공적을 위조한 뒤, 그 명예를 안은 채 살아가는 어떤 이들에 관한 사연이다. 논픽션에 가까운 픽션, 현실을 반영한 은유적인 대체 현실, <언피니시드>는 결국 이 세계의 어떤 불미스런 단면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인 셈이다.
<언피니시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버지의 깃발>과 폴 그린그래스의 <본> 트릴로지, 그리고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과의 접점이 발견되는 영화다. 조작된 역사 속에서 영웅으로 위장된 인물이 양심적 가책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깃발>을, 비밀 첩보 조직의 부품처럼 활용되던 어느 개인의 양심적 발로가 내부 고발을 자행한다는 점에서는 <본> 트릴로지와 같은, 그리고 독일 나치에 의한 제노사이드를 경험한 유태인들의 피해 의식이 가해자로서의 동일한 경험에 놓인 죄의식과 맞물린다는 점에서 <바시르와 왈츠를>을 연상시킨다. 다만 앞서 나열한 세 영화들에 비해서 사적인 심리를 긴밀하게 조명한다는 점에서 <언피니시드>는 좀 더 개인적인 드라마에 가깝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모종의 진실에 접근해 나가는 영화는 그 진실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밀착하며 보다 깊은 호흡을 얻어낸다. 민족적인 명예 회복이라는 거대한 조직적 임무를 떠안은 개인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파괴되듯 그 임무의 폭력성에 노출되며 점진적인 심리적 붕괴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의 대의를 수긍하고 있지만 저마다 목적이 다른 세 인물은 점차 조직적인 와해를 직감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공황 상태로 스스로 빠져든다. 자신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파괴자들에 대한 응징과 보복을 감행하던 이들이 스스로 동일한 가해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며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첩보물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지닌 <언피니시드>는 거시적인 역사에 매몰된 개인의 미시적인 심리에 밀착한 심리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극적인 서스펜스를 자아내기 위한 연출을 지양하고 리얼리즘에 가까운 상황 묘사를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보다 객관적인 위치로 안내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영화 속에 자리한 인물들의 심리가 보편적인 현실의 삶 안에서 인식되도록 유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치장된 영화적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어느 개인의 삶이 발견되는 방식으로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 인물의 전후를 차지한 제시카 차스테인과 헬렌 미렌은 동일한 흐름 속에 놓인 서사의 호흡을 서로의 위치에서 유연하게 이어받으며 극적인 흥미를 더하고 설득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특히 상처 입은 채로 복도를 걸어나가는 헬렌 미렌의 뒷모습은 폭력적인 역사의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짊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던 어느 개인들의 고독을 대변하듯 쓸쓸하고 아련한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