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냉정하다. 태건호(정재영)는 유능한 채권추심원이다. 그물을 던지듯 추심 대상자들을 포획하고 그들로부터 걷을 돈을 확실하게 건져낸다. 그가 냉정해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채권추심원이 되어 남의 빚을 대신 받아내며 자신의 빚을 청산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빚보다도 무거운 간암 진단이 떨어진다. 누군가의 간을 기증받아야만 그는 삶을 연장할 수 있다. 채권을 추심하듯 간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찾는다. 한 여인이 그의 목숨을 덧댈 수 있는 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차하연(전도연)은 정재계의 거물들을 상대로 한 탕을 노리는 지능적인 팜므파탈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교도소에서 출감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출감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그녀의 간을 얻기 위해서는 그녀를 노리는 적들을 대신 헤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녀도 믿을 수 없다. 그 여자 위험하다.
<카운트다운>은 수궁가 같은 스릴러물이다. 간을 얻고자 생명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가 그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한 여자와 얽히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쫓아간다. 남자나 여자나 시간이 없긴 매한가지다. 남자는 당장 간이 급하고, 여자는 당장 돈이 급하다. 우직한 거북이처럼 목표에 접근하는 남자와 달리 날렵한 토끼처럼 임기응변에 강한 여자는 언제나 달아날 길을 찾는다. 잡으려는 자와 달아나는 자의 입장은 확연하고, 그 명확한 관계를 수식하는 주변의 관계가 꼬리를 물고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그 명료한 관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담보로 융통된 것이다. 대출과 입양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현실을 대변하는 문제적 소재들이 복잡한 관계의 인과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장르적인 리듬감을 환기시킨다.
기본적으로 두 인물을 중심에 두고 가지를 뻗어나간 듯한 영화다. 태건호와 차하연이라는 두 인물은 <카운트다운>의 심장을 구성하는 심방과 심실과 같다. 태건호가 일종의 들숨이라면 차하연은 날숨과 같다. 정재영이 영화의 균형추라면, 전도연은 흔들림을 낳는 무게추에 가깝다. 그만큼 두 배우의 연기가 이 영화를 저울질하는 핵심이라는 것. 그리고 이미 이름값만으로도 기대를 모을 만한 두 배우는 신뢰할만한 연기력을 선사한다. 우직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정재영은 전반적인 영화를 관통하는 밑그림을 완성하고, 전도연은 능수능란한 리듬으로 영화를 채색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이후로 다시 만난 두 배우의 호흡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전도연의 연기는 대단하다. 클리셰에 가까운 팜므파탈로 분하는 전도연은 자신의 캐릭터에게 그 어떤 팜므파탈 캐릭터보다도 프로페셔널한 설득력을 얹는다. 단지 관능적인 매력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능력적으로 뛰어난 프로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에 대한 신뢰를 더한다.
중후반부에 다다르기까지 영화에 특별한 흠은 없어 보인다. 플래쉬백의 사용도 그 흐름의 측면에서 과하지 않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나치게 감상적인 결말은 다소 의외다. 간단하게 말해서 과하다. 흡사 앞선 부분까지 다른 영화를 봤나 싶은 결말부는 맥락 안에서 사족처럼 머물러 있다. 과잉의 감정과 과욕의 설명, 이미 상황 자체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직접 필요 이상으로 떠먹이다 보니 거북한 감상이 밀려온다. 물론 결말을 맺는 방식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앞서서 축적된 감상의 리듬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신파적인 결말의 여운은 수긍할만하다. 단지 그 여운을 강요하는 인상이 안쓰럽다는 의미다.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며 점차 자신의 리듬을 확보해내던 영화가 스스로 감정을 방전시키고 정체되는 듯한 결말로 다다른다는 건 가히 미스터리다. 성공적인 롱레이스 끝에 다다른 결승선 앞에서 머뭇거리는 선수를 보는 심정과 같이 맥이 빠진다.
마카오 출장을 다녀온 아내의 감기 증상이 심각하다. 남편은 지독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내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역시 감기 증세가 발병했던 아들도 일순간 세상을 떠났다. 죽은 건 아내와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전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각국 정부와 보건기구는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할 수 있는 건 발병의 근원지를 찾고 환자들을 격리 수용시키는 것뿐,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정부의 음모를 선동하고 나서고, 급속도로 확산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요동치던 불안은 결국 거대한 폭동으로 이어진다.
전염(contagion)은 신체의 접촉이나 공기 중의 확산을 통해서 침입한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는 과정을 의미한다. <컨테이젼>은 제목 그대로 전염에 관한 이야기다. 순식간에 숙주가 된 인간의 몸을 점령하고, 신체를 무력화시킨 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고 숙주와 접촉하거나 근접한 또 다른 숙주들에게 빠르게 침투하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영화를 본다면 당장 어딘가 자신의 손이 닿고 있다는 것마저,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기침을 하는 것마저 신경을 쓰일 정도로 예민한 경계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컨테이젼>이 묘사해내는 정황이 현실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컨테이젼>은 질병과 맞서 싸워나가는 이들의 극적인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하듯 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전염으로 삽시간에 무너진 인간의 면역 체계가 공포와 불안으로 확대되어 이성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이 세계의 시스템이 유린당하는 과정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포착하듯 연출해낸 작품이다. 담담한 시선으로 일관된 이 영화는 마치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서 이 세계를 동시간에 관찰해낸 누군가의 시점숏으로 수집되고 정리된 리포트를 보는 것 같다. 홍콩과 일본, 미국, 영국 등 서로 동떨어진 그 세계 위에서 저마다의 사연이나 임무를 안고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은 이 거대한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의 스케일을 대변한다.
<컨테이젼>은 극적인 감정을 고양시키기 보단 스크린 너머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가히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정보적이고, 체계적으로 진전되는 극적인 양상은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밖의 현실을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리얼리즘을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죽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아노미에 가깝게 사회의 체계가 붕괴되고 급속도로 혼란에 빠져드는 정국의 형태가 묘사되는 광경은 그만큼 공포스럽고 충격적인라 할만하다. 포석을 두듯 세계 곳곳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전세계적인 상황을 수집해나가는 편집술이 힘을 발휘해나가는 가운데 그 얼굴을 자처하는 스타 배우들이 본래의 인상을 지우듯 평범하고 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이 극적인 논리와 설득에 기여한다.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 거대한 스케일을 구축하는 소더버그 특유의 연출력과 편집술은 슈퍼 캐스팅이라 불릴 만한 출연진 리스트를 평범한 그 세계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며 보다 생생한 현실 감각을 끌어낸다.
영화가 시작되는 건 발병 두 번째 날부터다. 발병 135일째가 돼서야 마감되는 서사의 뒤를 잇는 건 바로 그 모든 현상의 시작점이었던 발병 첫 날의 사연이다. 결코 극적일 수 없는 충격과 공포의 정황의 시작을 이 모든 카오스의 끝에서 드러내는 방식은, 그리고 그 방식을 넘어서 그 진실 자체는 충격이랄 것 없이 그저 그 초현실적인 진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거대한 혼돈으로 치닫던 인간 사회를 목도한 뒤에서야 전달되는 진실은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의 여운을 남길만한 것이기도 하다. <컨테이젼>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거대한 현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붕괴되고 다시 회복하는가를 살피는, 사회적 면역 체계에 관한 생생한 리포트다. 전염병은 하나의 수단에 가깝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공포가 인간의 이성을 어떤 방식으로 마비시키고 사회의 붕괴가 어떤 방식으로 진전되는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컨테이젼>의 공포는 바로 그 우리가 지닌 이 세계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인 면역 체계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재앙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안전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문제제기,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