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시 한번 거대로봇들이 지구를,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 도심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지구를 구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간이 왔다. <트랜스포머 3>는 지구를 링으로 삼아 벌이는 살아있는 로봇들의 불꽃 튀는 전투 영화다.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그 대형 변신 완구 로봇들이 펼치는 치열한 몸싸움에 있다. CG기술의 진화를 통해서 완구 로봇에 숨을 불어넣고 LA도심 한복판에서 벌이는 육탄전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적 롤러코스터 장난감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할리우드발 롤러코스터는 또 한번 살아 움직이는 로봇의 위용을 앞세워 전세계 관객을 현혹시킬 채비를 하고 있다.
짚고 넘어가자.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언 갑옷을 피부로 입고 있는 거대 변신 로봇들이 격돌하는 스펙터클한 액션을 볼 수 있다는 것. 사실 시리즈의 시작점이 된 <트랜스포머>가 공개될 당시에는 매끈한 스포츠카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광경만으로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변신 로봇이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소재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센세이션한 이벤트였다. 이 보기 드문 볼거리를 두르고 있는 서사의 병풍 따위는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 CG의 발전으로 개척된 이 신세계적인 볼거리는 서사의 수준 따위를 깡그리 무시하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또 한번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정복해내겠다는 야심으로 무장한 이 세 번째 속편의 맥락은 지난 전편들과 딱히 다를 게 없으며 새로울 리 없다. 중요한 건 무엇을 또 보여줄 수 있을까라는 관객들의 기대감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3편에 다다르기까지 이 시리즈에서 극명하게 업그레이드된 건 변신 로봇들의 가짓수를 늘려 새로운 볼거리의 너비를 넓히고 그 로봇들의 기능과 성능을 충분히 전시하며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키는 것보다도, 지구 방위대로 전락한 외계 로봇들의 지구 수호에 관한 서사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작업이었다. 2시간이 넘는 첫 작품 이후로 두 편의 속편이 2시간 30여분에 달하는 거대한 러닝타임을 얻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 로봇들이 평화주의자와 호전주의자로 갈려 지구를 걸고 결투를 벌인다, 는 1편의 서사는 점차 친지구인 로봇 오토봇과 반지구인 로봇 디셉티콘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는 2편으로 나아갔고, 3편에 다다라 달의 표면과 지구인 숙주론까지 닿는 외계 음모론의 수준으로 확장된다.
팔릴만한 볼거리의 생명 연장을 위해 서사의 연결고리를 이어나가는 기획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고민의 몰두가 시리즈의 연속적인 기획 위에서 필요 이상으로 판을 벌리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특히 <트랜스포머 3>가 이런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제공하는 정보량은 과부하 수준에 가깝다. 음모론에 얹힌 서사의 설정은 흥미롭다. 인류의 달 진출이 비확인물체의 달 불시착을 확인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며 그것이 외계 로봇들과 깊은 연관이 있었노라는 서사의 착안은 이 세 번째 시리즈의 필요성을 어필할만한 흥미로운 떡밥이다. 문제는 이 시리즈가 자신들이 지닌 최고의 장점 대신 불필요한 설명과 설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단적으로 말해서,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에서 인간들의 위치란 로봇들의 한판 승부를 위한 작은 조연들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들, 더 정확하게 지목하자면 샘 윗윅키(샤이아 라보프)의 활약상이 로봇들의 활약에 비해 보다 도드라지는 이번 시리즈의 서사 안배는 달의 뒤편에 대한 의문보다도 미스터리하다.
무엇보다도 같은 것을 거듭해서 재확인하고 있다는 시각적 피로감 역시 <트랜스포머>라는 시리즈가 지닌 오락적 흥미의 한계를 확신하게 만든다.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로봇들의 스펙터클의 첫 번째 목격 이후로 두 편의 시리즈를 통해 얻어낸 건 보다 거대한 파괴적 행위로 나아가는 로봇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딱히 로봇들의 육박전 시퀀스의 물리적 너비가 늘어나지 않은 가운데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러닝타임이 확대된 이번 작품에서는 그만큼 상대적으로 그 특별한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인내력이 보다 요구된다. 심지어 <트랜스포머 3>는 본격 로봇 영화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헷갈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디셉티콘의 모선들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시키고, <트랜스포머 3>의 끝에 가 닿는 감상은 <인디펜던스 데이>의 그것과 유사하다. 육중한 로봇들이 화끈하게 뒤엉켜 구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재미는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동어반복적이라 식상해진 감이 없지 않으며 그 결정적인 볼거리를 즐기기 위해서 감내해야 할 시간이 길다. 낭비적으로 확장된 서사 속에서 시간 죽이기가 이처럼 어렵다는 것을 거듭 체감하게 된다.
3D비주얼은 어쩌면 새로운 이미지를 개척하기 어려워진 이 시리즈의 유용한 도피처였을 것이다. 때때로 이는 효과적이다. 커다란 아이맥스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입체적인 비주얼로 구현되는 로봇들의 위용은 분명 이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볼거리다. 하지만 역시나 로봇이 빈 자리에서는 3D도 무용지물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는 <트랜스포머>라는 이름 아래 사족과 같다. 그러니까 샘 윗윅키의 삼각 관계나 디셉티콘에 맞서서 비범하게 활약하는 인간들의 무용담 따위보다는 로봇의 변신 시퀀스 하나라도 더 보는 게 관객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라는 것이다. 소총부대와 토마호크 미사일을 동원해서 로봇을 사냥하는 감동적인 인간 승리 따위를 바라는 게 아니지 않나. 오른팔을 내주고도 지는 법이 없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간지나는 결투 장면을 보기까지 너무도 오랜 인내력을 요구한다니, 심지어 그것은 전편에서 옵티머스 프라임이 펼치는 3:1 결투 장면보다도 짧고 밋밋하다. 그러니 보는 입장에서 지치고 피로해질 수 밖에.
살아있는 완구 로봇들의 혈투, <트랜스포머>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문제는 이제 볼만큼 봤다는 것. 아니, 볼만큼 봤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이 시리즈 안에서 이 볼거리가 발전이 없다는 것. 3편에 다다르기까지 이 시리즈에서 극명하게 업그레이드된 건 변신 로봇들의 성능이나 로봇의 캐릭터가 아니라 낭비적인 서사의 몰두였다. 그 끝에서 나온 혜안이 (나름 숨겨진 야심이 있는) 로봇 손바닥만한 인간들의 삼각관계요, 소총부대와 토마호크 동원한 로봇 사냥이요. 그러니까 2시간 30분에 다다르는 러닝타임 동안 당신이 기대하던 로봇 간의 다찌마와리 스펙터클 몇 뼘을 보기 위해서 더디게 진행되는 러닝맨을 인내하기에는 기회비용의 손해가 너무 막심하다. 인간을 노예로 삼겠다는 센티널의 공언이 스핑크스를 뛰어넘는 세계 7대 미스터리의 리스트 추가인지 헷갈릴 무렵, <트랜스포머>에 대한 기대가 무엇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3편에 다다른 <트랜스포머>는 스스로 <터미네이터>인지 <인디펜던스 데이>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볼만했다, 별로였다, 는 둘째치고, 이제 지친다. 시간 죽이기가 이리도 힘들어서야 되겠나. 살아 움직이는 완구 로봇들의 스펙터클 액션이 재미를 안기던 1편 이후의 2편은 그저 사족 같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등장하는 위성사진의 부감이 심상치 않다. 이어지는 장면은 버지니아 CIA본부의 복도, 그리고 뚜벅뚜벅 이어지는 누군가의 발걸음. 엄청난 예감을 일으키는 오프닝이 환기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예감은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반 박자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비범한 척하기 좋은 농담과 같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프닝은 결과적으로 ‘얻을 게 없는’결말로 종착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번 애프터 리딩>의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CIA분석가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의 해임 장면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상할 수 없는 범위로 사건을 부풀려나간다. 오스본과 이혼을 고민하는 케이티(틸다 스윈튼)는 국무부 연방 보안관 해리(조지 클루니)와 내연의 관계이며 그와 전혀 무관한 스포츠센터엔 전신성형을 꿈꾸는 린다(프란시스 맥도먼드)와 낙천적인 동료 채드(브래드 피트), 인자한 상사 테드(리차드 젠킨스)가 있다. 동떨어진 구석에 자리한 두 맥락의 인물들이 동일한 문단에 포섭되는 건 우연한 계기 덕분이다. 스포츠센터에서 발견한 CD한 장이 채드와 린다의 손에 들어가며 거창한 음모론이 꿈틀댄다. 작은 오해는 불미스런 갈등으로 발전하고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들은 이상한 방식으로 서로의 자장 안에 들어선다.
실상 사건의 맥락엔 어떤 본질 자체가 없다. 그저 그 허무맹랑하게 커지는 어떤 사건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도가 발견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관계도 속에서 맞닥뜨린 개개인들은 불필요한 해석을 덧씌우며 종잡을 수 없는 지경의 수순에 이르고 만다. 사건의 핵심에 놓인 사람도, 사건을 스스로 확대하는 사람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의 총합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으로 산출된다. 그러나 그 해프닝은 명백한 인과관계를 통해 설득력을 갖춘다. <번 애프터 리딩>은 구심점이 없는 인과관계만으로 온전한 스토리텔링을 형성한다.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재능이 녹록하다. 허풍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그 구술엔 어떤 허세가 없다. 빈틈도 군더더기도 없다. 흘러가는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이 커다란 해프닝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과장된 음모론에 도취된 이들은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거나 그 무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이라도 결국 본질은 없다. 결국 그 모든 악화일로는 그저 실없는 상상력의 결과에 불과하다. 망상을 통해 음모론을 확장하는 인물들과 그 추이를 관찰하는 건 CIA정보부다. 그들은 린다나 채드의 상상처럼 대단한 음모의 중추가 아니라 그저 퇴임한 정보분석가의 뒤처리나 하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영화는 묘사한다). 결국 그 망상의 음모론은 어떤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 될 것 같지 않은 상태로 끝난다. 마치 살상무기 없는 이라크 전처럼, 그건 그저 해프닝이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속이 빈 형태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블랙코미디의 자격을 거머쥔다. 실체가 없어서 완벽한 해프닝을 이루는 <번 애프터 리딩>은 그 자체를 통해 거대한 음모론의 지지자들을 완벽하게 조롱한다.
'모든 것은 사소한 법(It is all small stuff)’이다. 다만 그 사소함이 때론 대단한 해프닝을 낳는다는 것. 물론 심각할 필요는 없다. <번 애프터 리딩>은 그저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를 즐기는 바보들의 향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저 그들의 어이없는 해프닝을 즐기면 된다. 하나같이 이름값이 대단한 배우들의 부조리한 앙상블 역시 또 다른 백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코엔형제는 <번 애프터 리딩>를 통해 깊이와 너비를 모두 갖춘 이야기꾼임을 입증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를 통해 재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재능이 스스로의 삶을 위한 유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어머니가 직장에 간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실종신고를 하니 경찰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24시간 이후에 현장 방문이 가능하다. 24시간이 지났다. 5달이 지났다.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집으로부터 먼 외딴 곳에서 발견된 아이가 돌아온다는 기차역으로 발을 구른다. 그리고 모자는 상봉한다.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어머니의 표정이 굳는다. 우리 아이가 아니에요. 이를 지켜본 경찰의 표정이 굳더니 입을 연다. 당신이 잘못 본 거에요. 생전 아이를 본 적도 없는 경찰이 평생 아이를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 됐음을 지적한다.
<체인질링>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이 짧은 문장은 눈물겨운 신파를 예상케 하지만 실상 <체인질링>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드라마다. 단지 아이를 그리워하는 모성이 중심이 아니다. 아이를 찾았다고 자위하는 경찰은 제 아이가 아님을 알아보는 어머니를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어머니는 이에 끝까지 저항한다. 이는 실화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사라진 아들 월터 콜린스(게틀린 그리피스)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에 관한 사연이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호흡을 지닌 <체인질링>은 전형적인 선악 구도와 약자의 승리를 꿈꾸는 전형적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를 기반으로 둔 사연은 허구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엔 강렬한 투쟁의 연대기가 꿈틀거린다. <체인질링>의 모토는 신파가 아니라 저항이다. 모성에서 비롯된 감정적 호소와 함께 권리를 찾기 위한 소시민의 이성적 선언이 내재돼 있다. 물론 기반은 모성이다. 하지만 모성애는 투쟁심으로 나아간다. 부패한 경찰과 착복하는 정치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언질이 한 어머니의 모성애로부터 고발되고 발가벗겨진다.
사연의 형태는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새로운 애완견을 사주듯 실종된 아들 대신 찾아온 다른 아이를 모성애로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경찰의 모습은 권위적인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크리스틴을 되려 몰아세우는 경찰의 만행은 분노를 머금게 한다. 그 종래에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권리를 묵살하고 되려 억압한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어머니의 승리는 감동을 자아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사연은 슬프다. 진실은 조작이 가능하다. 그 조작된 진실엔 진실의 외벽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절한 사연이 짓눌려있다. 단순히 순수한 모성애로부터 발생하는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뛰어넘어 권위적 억압에 저항하는 개인의 순수한 양심을 조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1920년대를 조명하는 <체인질링>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진실을 강요하고, 이에 분노하는 소시민들은 저항을 거듭한다. 정경유착이 맞물려 도시를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고 조작된 평화를 전시하지만 실상 기저의 소시민들은 불안에 방치된 채 살아간다. 희생자가 나타나면 잘못을 덮고 되려 희생자를 협박한다. 권력의 지배자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로 소시민을 지배한다. <체인질링>은 슬픔을 동반한 승리를 꿈꾼다. 그 승리는 아픈 만큼 숭고하다. 조작된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선 결국 어느 개인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른다. 조직적인 체제를 통해 개개인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시민은 말한다. 싸움을 걸지 않되,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지. 체제에 굴복한 개인은 약자가 된다. 반대로 체제에 저항한 개인은 강자로 거듭난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시하는 정의란 이렇다. 대한민국의 가짜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의 진짜 보수주의자는 적어도 정의를 안다.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에 찬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혜안에 깊은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