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데드 얼라이브>나 <고무인간의 최후>와 같은 작품을 통해 B급 유희와 특수분장에 일가견을 보인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과 <킹콩>과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이런 재능을 유감없이 확장하며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또 다른 장기를 제시하는 영화다. 순수와 불안이 중첩된 소녀의 감수성을 영적인 판타지 세계관과 연동시키며 스릴러적인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을 연상시킨다. 동성애의 감정을 공유한 소녀들이 자신들의 애정관을 비이성적인 행위로서 극단으로 밀고 나갈 때 이성적인 이해를 무력화시키는 질환적인 긴장감이 조성된다. <천상의 피조물>이 연출한 서스펜스의 형태는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형태보다도 그 기질의 불완전함과 그 형태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러블리 본즈>도 마찬가지다. <러블리 본즈>는 불안정한 선형의 서사 속에 매복된 서스펜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관객을 위협하는 작품이다.
“나는 14살에 살해당했다.” 애틋한의미의제목-갑작스런 시련으로부터 자라나는 유대감-처럼 <러블리 본즈>는 극 초반부터파국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그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프닝과 같은 작은 갈등을 건너며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가족은 그 평화를 난도질하듯 갑작스럽게 침입한 비극을 맞이하며 자신들이 누리던 평온한 일상의 가치에 대해서 뒤늦게 깨닫는다. 전반적으로 스릴러적인 색채감이 깃든 사연의 본질은 사실상 가족드라마로서의 감동에 무게중심을 둔 채 진전된다. 날카로운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부분적인 신을 제외하면 <러블리 본즈>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은 가족의 분노와 연민을 응시하고 그것이 결국 치유와 회합으로 갈무리된다는 서사의 골격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앨리스 세볼드의 동명 원작 베스트셀러의 텍스트를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고스란히 차용한다. 원작에서 화자 역할을 하는 수지 새먼(시얼샤 로넌)은 <러블리 본즈>에서도 극을 설명하는 시점의 중심에 선다. 동시에 서사적 기승전결도 원작의 판본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분명 원작과 다른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원작의 재현보다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의 창조에 방점을 찍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수지 새먼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 두고 서사를 밀고 나가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점과 직접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극적 전개를 꾀하는 <러블리 본즈>는 분명 서사적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유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피터 잭슨은 원작과 달리 수지 새먼이 내려다 보는 이승보다도 그녀가 자리한 저승의 이미지들을 표현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덕분에 종종 <러블리 본즈>는 그녀가 바라보는 외세의 현실이 묘사되는 시퀀스와 그녀가 자리한 내세의 풍경이 묘사되는 시퀀스 사이에 어떤 구획이 자리하는 것과 같은 구별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이미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의 특이점이 아니다. 이는 전반적인 영화의 리듬에도 결과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는 영화의 전반적인 리듬감을 훼손한다. (그것이 본래 피터 잭슨이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을 스크린에 펼쳐놓은 듯 인공적인 색감이 즐비한 내세의 이미지들은 때때로 환상적이기 보단 식상하다. 이질적인 공간을 접합시키듯 연결하는 이미지의 구현은 때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너른 풍경에 담긴 인공적인 색채감은 신비하다기 보단 지나친 창작적 강박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그 내세적인 풍경에 담겨진 철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의 무게에 비해 무력하게 느껴진다. 실제적인 생에서 비극을 체감하며 삶을 마감한 소녀가 내세의 평온 속에서 그 나이에 걸맞은 호기심을 안고 자신의 죽음 이후의 외세를 관찰한다는 소설의 설정에는 적당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소녀의 감수성에 대한 설득 이전에 그 세계관을 전시해내는데 여념이 없다.
물론 이런 불균질한 공간의 전이는 영화에서 예측할 수 없는 정서적 이상 기후를 연출하며 잠재된 서스펜스와 페이소스를 극대화시키는 장치적 도구로서 효과적인 빛을 발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용된 이미지는 서사의 균형감각을 훼손하는 동시에 영화가 고스란히 끌고 온 원작의 교훈극적인 성격마저도 본질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소녀의 성찰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헐겁게 형태적 유지만을 거듭하고, 그 끝에 걸리는 운명적인 징벌마저도 사족과 같은 의무적 첨부처럼 보일 뿐이다. 본래 영화에 깃들어 있던 잠재적 의미들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온전히 제 빛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취향이영화를 관장해버린개인적 만취이거나 일말의 시행착오처럼 보인다. 현재 그의 감각을 지배하는 영감의 원천을 추측한다거나 시각적흥미를 자아낼 만한 편린적인 이미지는찰나적으로존재하지만 그 모든 조합은 지극히보는 이를불편하게 만들정도로 형태적으로 불완전하다. 이는 단순히 전형적인 완전함을 이야기한다기 보단 말 그대로 기본적인 형태적 완성도를 의미한다. 배우들의 열연도그런 결과물 속에서온전히 잠식된 탓에 특별한 의미를 자아내지 못한 채사장될 운명에 처하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대표작이 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분명 그의 어떤 야심을 드러내는, 혹은 피터 잭슨이라는 창작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관객에겐 분명 관통할만한 소품으로선 유용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때나 가능한 일이 될 게다.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뉴문>을 보기 위해선 전제가 있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뉴문>의 전편인 <트와일라잇>은 분명한 취향의 호불호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누군가는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등마저 굽어버릴 판인데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거리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적 만듦새에 대한 불평이 좀처럼 합당하게 먹힐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뉴문>이 보고 싶은 이라면 그에 따른 명확한 취향의 확신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셈이다.
전형적인 뱀파이어 영화를 상상했다간 화들짝 놀라다 못해 십자가를 그을 만큼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는 정통 팬들에게 불순하다 못해 이단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여기서 뱀파이어란 단지 10대 취향 팬픽의 비범한 주인공에 가깝다. 태양빛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린다는 스와로브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들과 이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황홀한 시선엔 환상이 어른거린다. 뱀파이어라고 쓰고 아이돌이라 읽어야 한다. 단지 뱀파이어는 거들 뿐, 중요한 건 사랑이고 로맨스다. 그러니까 결국 뱀파이어란 존재는 태생이 다른 인간과의 로맨스에 난관을 부여하기 위해 마련된 이종교배의 삼부능선인 셈이다.
초반부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읊조리는 <뉴문>은 이윽고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와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치환한다. 자신이 곁에 있을수록 벨라가 위험해진다는 판단을 내린 에드워드가 결국 벨라를 떠나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벨라가 탈선을 시도하고 자살마저 결심한다. 그 지난한 여정에 동원되는 건 삼각관계다. 남몰래 벨라를 사모하던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내며 자신의 마음을 종종 어필하지만 에드워드를 향한 벨라는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벨라는 제이콥의 비밀을 알게 되고 벨라도 모르는 위기가 다가온다.
사실상 <뉴문>은 진지하게 눈뜨고 볼 수 없는 영화다. 만약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소재에 이끌려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팔자를 탓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귀여니 소설을 읽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얻어맞은 듯한 개념적 충격을 체감했다면 <뉴문>을 보는 130분 간 자기성찰을 하다 못해 득도라도 할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건 이 영화의 태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뉴문>은 유아적인 환상으로 점철된 원작 텍스트의 태도를 온전히 이미지로 재생하고 있는 영화다. 열광과 혐오의 기준도 그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수 없는 취향의 현상인 셈이다.
확실한 건 <트와일라잇>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면 <뉴문>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됐거나 그 오그라듦을 하나의 개그 장르로 이해해버렸던 당신이라면 조만간 티켓을 손에 쥘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고, 늑대인간이고, 로맨스고, 멜로고, 다 해당사항 없다. 그 절실한 대사와 그윽한 눈빛을 의도적인 개그로서 즐길 수 있던가, 슈퍼스타적인 뱀파이어의 외모에 매혹당하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130분을 견딜 재간이 없을 게다. 물론 여자친구 손이라도 잡고 보게 될 남자라면 극장 문을 박차고 나와서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해 불평하는 건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반짝이는 뱀파이어에 도취된 여자 친구의 상향평준화된 눈높이를 고려해본다면 조만간 찾아올 크리스마스에 TV리모컨이나 붙잡게 될 확률이 커질 테니까.
누군가는 오그라들어 등마저 굽어버릴 판에 어느 누군가는 잘도 깔깔대며 마냥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극장을 나와서 난 못 보겠네, 난 보겠네, 38선을 긋고 총뿌리를 겨눠본들 부질없고 하찮은 짓이다. <트와일라잇>을 보고 그 때 오그라든 손가락이 여전히 펴지질 않아, 라는 관객이라면 <뉴 문>은 꿈도 꾸지 말고 머리맡의 달이나 봐라. 하지만 태양을 받으면 온몸이 반짝거리는 스와브로스키 협찬 태생의 뱀파이어를 보고 마음이 두근거렸다면 티켓을 사라. 결국 취향의 문제다. 결국은 그 오그라듦을 감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의 문제다. 귀여니 소설을 보고 헥토파스칼 킥이라도 맞는 것과 같은 개념적 충격을 느꼈다면 <뉴 문>은 130분 간 자기 성찰을 거듭하다 득도하는 시간이 될 게다. 만약 <뉴 문>이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피 튀기는 사투 즈음으로 알고 극장을 찾았다면 팔자를 탓해라. 물론 거기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취향의 신세계를 발견하고 커밍아웃을 외치게 될진 모를 일이다만 그것이 장담하기 어려운 도박의 확률임을 깨닫는 게 보다 당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를 일이라는데 내 전재산과 오른손을 건다, 는 훼이크고, 그러니까 그렇단 말이다. <뉴 문>을 보고 할 수 있는 건 이런 말 장난에 불과하다. 그냥 그런 영화일 뿐이란 말이지. 그러니 그냥 웃지요. 화내면 지는 거다.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밤만 되면 박물관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고 난장판을 이룬다.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요소를 두루 갖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돌팔이 조제법으로 융해한 난장판을 연출하는 기획상품이었지만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있었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와 어드벤처는 결국 이 작품을 효자상품으로 만들었다. 속편은 그흥행성을 담보로 내놓은 매물이다. 좀 더 규모는 커지고 캐릭터는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실상 전작의 엉터리 같은 상황을 확장해서 답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2>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던 속편의 전형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에 아담한 규모로 맹점을 가리던 전작의 단점들이 오히려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탓에 때론 유치하며 스토리는 더욱 부실해졌다. 개체 수가 늘어난 전시물들은 다채롭기보단 산만하다. 전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던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새로운 캐릭터들은 매력을 보충하지 못한다. 플러스가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부른다. 그나마 매력적인 에이미 아담스가 유일한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