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빗: 다섯 군대 전투>를 축약하자면 점입가경이라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을 통해 한차례 증명된 바 있지만 피터 잭슨이 물리력을 총동원해서 전투신을 뽑아냈을 때의 스펙터클은 볼거리 중의 볼거리다. 아이맥스에서 봐야 한다는 말을 아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여러 종족이 엮어서 발생하는 공명심과 이기심의 복마전과 물리력의 차이를 바탕에 둔 전투적 정황의 다양성은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입체적인 감상 구조를 제공하고, 켜켜이 틈이 없는 감상적 지층을 만들어내는 덕분에 딱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롤러코스터. 어떤 식으로든 아이맥스에서 보시란 말밖에 할 수가 없다. 피터 잭슨이 다시 중간계로 끌려 들어가 <호빗> 트릴로지, 심지어 원전에도 없는 내용을 확장해 가며 3부작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살짝 혀를 차는 입장이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으로 다시 한번 갈무리된 트릴로지를 봤을 땐 대사업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스타워즈>의 살짝 민망한 3부작 프리퀄과 대조적으로 언급될 만한 프리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올 겨울에 이만한 볼거리는 없다. 무조건 극장에서, 이왕이면 아이맥스다.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의 24부작 어드벤처 시리즈 <땡땡의 모험>은 소년 저널리스트의 전세계적인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1929년 어린이 신문에서 연재가 시작된 이 코믹 스트립은 1930년 첫 단행본 발간 이후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80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대장정을 이루는 이 어드벤처 시리즈가 영화화된 건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비롯해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전례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스크린 진입을 지휘하는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라는 두 대가라면, 게다가 그것이 퍼포먼스 캡처를 통한 CG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이하, <틴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애니메이션 연출작이기도 하다.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세심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실제적인 캐릭터의 감정을 새겨 넣을 수 있는 동시에 카메라가 쫓기 힘든 앵글의 한계를 뛰어넘는 애니메이팅의 표현력을 함께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디테일과 스케일을 함께 수확할 수 있다는 것. 평면 위에 그려진 세계 속을 활보하던 땡땡을 비롯한 다수의 캐릭터들을 양감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방식으로서 이는 유용해 보인다. 실사에 가까운 캐릭터를 구현하고 감정을 불어넣는 동시에 전세계를 비롯해서 달까지 착륙하는 땡땡의 모험에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가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원작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에 대한 욕망으로 읽힌다.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자 스크린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세계 자체를 안착시키는 시도로서의 야심을 품고 있다. 땡땡으로 알려진 틴틴을 비롯해서 모든 캐릭터의 이름은 영어권 이름으로 통일되거나 변형되고, 원작 시리즈 가운데 세 편의 에피소드를 엮어 넣으며 스토리텔링을 재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초석을 다지고 본격적인 어드벤처 시리즈의 새로운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다. 호기심을 동력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저널리스트 틴틴이 우연히 발견한 유니콘호의 모형을 통해서 새로운 호기심을 작동시키고, 모험을 펼쳐나가는 서사, 그 여정 가운데서 만난 선장 하독은 극적인 위트를 추가하고 버디무비의 활력을 부추긴다. 추리물이라는 장르 안에서 인과에 대한 서술적 강박이 때때로 미스터리를 식상하게 무너뜨리는 감은 있지만 어드벤처 장르 안에서 전시되는 비주얼의 쾌감이 그 빈틈을 압도적으로 메운다.
무엇보다도 <틴틴>의 가장 큰 성과는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해내기 어려운 스펙터클의 맹점까지 밝혀낸다.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이 지닌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증명하는 현재의 기술적 척도에 가깝다. 물론 <틴틴>은 완벽하게 언캐니밸리를 뛰어넘은 작품은 아니다. 실사와 유사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주는 이질감의 불쾌가 <틴틴>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발전 속에 자리한 기술적 결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균형이 맞지 않는 캐릭터 묘사로부터 기인하는 바도 크다. 이를 테면 실제 사람의 형상에 가깝게 변주된 틴틴의 외양과 달리 하독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생김새로 구현되고 있는데 이런 묘사의 조합이 때때로 그 세계의 실제적인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는 감상을 부여한다. 이는 어쩌면 애니메이션의 양식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도적인 실험이 묵인하고 있는 고의적인 현상 같기도 하다.
어쨌든 <틴틴>은 어드벤처 장르물로서 극한의 체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원신 원컷 롱테이크 추격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형으로 회자될만한 성취에 가깝다. 고전코믹스 원작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해냈다는 새로운 의미와 함께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을 묘사해내는 기술적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개발해내는 테크니션 장인들의 면모가 반영된 새로운 전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이라는 카피가 단순히 홍보용 문구로서 유용한 것이 아닌, 새로운 어드벤처 시리즈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제작을 맡은 피터 잭슨과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리를 바꾼다는 속편을 비롯해서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공동 연출을 계획한다는 세 번째 속편까지, 트릴로지가 항해할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는 점만으로도 <틴틴>은 분명 탁월한 출항인 것이다.
<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일찍이 <데드 얼라이브>나 <고무인간의 최후>와 같은 작품을 통해 B급 유희와 특수분장에 일가견을 보인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과 <킹콩>과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이런 재능을 유감없이 확장하며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또 다른 장기를 제시하는 영화다. 순수와 불안이 중첩된 소녀의 감수성을 영적인 판타지 세계관과 연동시키며 스릴러적인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을 연상시킨다. 동성애의 감정을 공유한 소녀들이 자신들의 애정관을 비이성적인 행위로서 극단으로 밀고 나갈 때 이성적인 이해를 무력화시키는 질환적인 긴장감이 조성된다. <천상의 피조물>이 연출한 서스펜스의 형태는 전형적인 기승전결의 형태보다도 그 기질의 불완전함과 그 형태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러블리 본즈>도 마찬가지다. <러블리 본즈>는 불안정한 선형의 서사 속에 매복된 서스펜스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관객을 위협하는 작품이다.
“나는 14살에 살해당했다.” 애틋한의미의제목-갑작스런 시련으로부터 자라나는 유대감-처럼 <러블리 본즈>는 극 초반부터파국적인 상황을 제시하고 그 비극적 상황으로부터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프닝과 같은 작은 갈등을 건너며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가족은 그 평화를 난도질하듯 갑작스럽게 침입한 비극을 맞이하며 자신들이 누리던 평온한 일상의 가치에 대해서 뒤늦게 깨닫는다. 전반적으로 스릴러적인 색채감이 깃든 사연의 본질은 사실상 가족드라마로서의 감동에 무게중심을 둔 채 진전된다. 날카로운 서스펜스로 방점을 찍는 부분적인 신을 제외하면 <러블리 본즈>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은 가족의 분노와 연민을 응시하고 그것이 결국 치유와 회합으로 갈무리된다는 서사의 골격이 주를 이루는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앨리스 세볼드의 동명 원작 베스트셀러의 텍스트를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고스란히 차용한다. 원작에서 화자 역할을 하는 수지 새먼(시얼샤 로넌)은 <러블리 본즈>에서도 극을 설명하는 시점의 중심에 선다. 동시에 서사적 기승전결도 원작의 판본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분명 원작과 다른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원작의 재현보다도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의 창조에 방점을 찍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수지 새먼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 두고 서사를 밀고 나가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시점과 직접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극적 전개를 꾀하는 <러블리 본즈>는 분명 서사적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본질은 유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피터 잭슨은 원작과 달리 수지 새먼이 내려다 보는 이승보다도 그녀가 자리한 저승의 이미지들을 표현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덕분에 종종 <러블리 본즈>는 그녀가 바라보는 외세의 현실이 묘사되는 시퀀스와 그녀가 자리한 내세의 풍경이 묘사되는 시퀀스 사이에 어떤 구획이 자리하는 것과 같은 구별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이미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의 특이점이 아니다. 이는 전반적인 영화의 리듬에도 결과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는 영화의 전반적인 리듬감을 훼손한다. (그것이 본래 피터 잭슨이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을 스크린에 펼쳐놓은 듯 인공적인 색감이 즐비한 내세의 이미지들은 때때로 환상적이기 보단 식상하다. 이질적인 공간을 접합시키듯 연결하는 이미지의 구현은 때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 너른 풍경에 담긴 인공적인 색채감은 신비하다기 보단 지나친 창작적 강박을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그 내세적인 풍경에 담겨진 철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언어의 무게에 비해 무력하게 느껴진다. 실제적인 생에서 비극을 체감하며 삶을 마감한 소녀가 내세의 평온 속에서 그 나이에 걸맞은 호기심을 안고 자신의 죽음 이후의 외세를 관찰한다는 소설의 설정에는 적당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러블리 본즈>는 생과 사를 가로지르는 소녀의 감수성에 대한 설득 이전에 그 세계관을 전시해내는데 여념이 없다.
물론 이런 불균질한 공간의 전이는 영화에서 예측할 수 없는 정서적 이상 기후를 연출하며 잠재된 서스펜스와 페이소스를 극대화시키는 장치적 도구로서 효과적인 빛을 발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용된 이미지는 서사의 균형감각을 훼손하는 동시에 영화가 고스란히 끌고 온 원작의 교훈극적인 성격마저도 본질적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소녀의 성찰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헐겁게 형태적 유지만을 거듭하고, 그 끝에 걸리는 운명적인 징벌마저도 사족과 같은 의무적 첨부처럼 보일 뿐이다. 본래 영화에 깃들어 있던 잠재적 의미들은 이미지의 과시 속에서 온전히 제 빛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취향이영화를 관장해버린개인적 만취이거나 일말의 시행착오처럼 보인다. 현재 그의 감각을 지배하는 영감의 원천을 추측한다거나 시각적흥미를 자아낼 만한 편린적인 이미지는찰나적으로존재하지만 그 모든 조합은 지극히보는 이를불편하게 만들정도로 형태적으로 불완전하다. 이는 단순히 전형적인 완전함을 이야기한다기 보단 말 그대로 기본적인 형태적 완성도를 의미한다. 배우들의 열연도그런 결과물 속에서온전히 잠식된 탓에 특별한 의미를 자아내지 못한 채사장될 운명에 처하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러블리 본즈>는 피터 잭슨의 대표작이 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분명 그의 어떤 야심을 드러내는, 혹은 피터 잭슨이라는 창작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관객에겐 분명 관통할만한 소품으로선 유용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에 대한 이해가 동반될 때나 가능한 일이 될 게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위장된 극영화적 오락물. 도입부부터 인터뷰와 취재 영상을 동원하며 사실적으로 위장된 정보를 방대하게 쏟아내는 <디스트릭트9 District9>은 기존의 SF영화들이 제시한 상상력을 고스란히 녹여낸 도가니에서 온전히 판본이 다른 형태로 주조된 독창적 산물이다. 작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 어떤 성과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실험적 소품이자 기존의 할리우드발 상업영화들의 방법론을 하이브리드(hybrid)하게 응용한 SF변종이다.
거대한 우주선이 출몰한 건 맨하튼도 아니고, 시카고도, 뉴욕도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이다. 이를 대사로서 읊조리기까지 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할리우드 SF영화들의 관성을 배반하는 유희적 조롱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이 요하네스버그에 우주선을 출몰시키고 외계인 수용소를 설치한 건 단순히 할리우드에 대한 안티테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디스트릭트9>은 요하네스버그를 지배했던 과거의 부조리한 역사적 공기를 환기시킨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남아공 안에서도 ‘디스트릭트6’라는 백인전용 출입공간이 실제로 존재했던 요하네스버그에 28년간 외계인 격리수용소 ‘디스트릭트9’이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영화적 진술은 요하네스버그를 점하고 있었던 어떤 과거와 깊게 연동된다. <디스트릭트9>을 연출한 닐 블롬캠프가 남아공 출신이란 점은 이런 추측을 강력하게 보좌하는 사안이다.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한 외계인 수용소 ‘디스트릭트9’의 안팎에서 인간과 외계인은 28년간 공존해왔다. 그 28년간 인간과 외계인은 많은 사건과 사고를 공유했고 그 과정에서 상대와의 갈등은 불거져왔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객관적 형태의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편집한 영상에 담아 일목요연하게 단시간에 과거사를 정리해 전달한다.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외국도 아닌 외계에서 온’ 이방인을 멸시와 적대로 맞이한다. 지도층을 전염병으로 잃었으며 사고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탓에 인간의 질서에 섞이지 못하고 요하네스버그를 무법천지로 만들어버리는 외계인은 시민들과 잦은 충돌을 빚게 된다. 결국 외계인에게 살해당하는 사람까지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요하네스버그의 시민들은 정부를 향해 외계인의 추방을 요구하는 소요사태까지 벌이게 된다.
외계인을 적대하고 그들의 수용소 이전을 요구하는 요하네스버그 시민들의 행위는 일종의 ‘님비(NYMBI)’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 사태에서 발효되는 핵심적 의문은 좀처럼 공존을 모색하기 어려운 인간과 외계인이 어째서 맞닿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어째서 외계인은 지구를 떠나지 못하는지, 반대로 어째서 인간들은 외계인을 지구에 붙잡아두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발생한다. 영화는 이에 대해 대사로서 직접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 <디스트릭트9>은 궁극적으로 SF적 상상력으로 디자인된 음모론이다. 영화적 허구로 치장한 현실의 우화다. 외계인과 인간의 우열적 관계와 이를 통해 빚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의 형태는 실상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인종 분쟁의 모습과 가깝게 닮아있다.
닐 블롬캠프가 2005년에 발표된 6분 23초 분량의 단편 <얼라이브 인 요하네스버그 Alive in Joburg>는 <디스트릭트9>의 기본적인 자질이 어디서 구축되고 비롯됐는가를 보여주는 기본적인 소스나 다름없다. 이를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와 선명한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닐 블롬캠프는 그만큼 견고해진 정치적 의식을 완강하게 밀어붙인다. 3인칭 시점의 보도적 영상과 인터뷰 컷을 스트레이트하게 이어 붙여 나열하며 객관성과 현장성을 확보하는 <디스트릭트9>은 이를 통해 극영화적 연출력을 선보이는 후반부 이미지를 위한 설득력마저 확보해낸다. 객관적(으로 위장된) 이미지의 나열로서 거침없이 서사적 줄기를 뻗어나간다. 주요한 맥락의 중심에 선 인물 비커스(샬토 코플리)의 주변인물들을 인터뷰하며 비커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도입부는 영화가 도달해야 할 모종의 결과에 대해 예측하게 만듦으로써 극적 호기심을 부풀린다.
제3자들의 진술로서 회자되곤 하던 비커스를 등장시키며 서사를 정상궤도로 진입시키는 영화는 3인칭의 다큐적 시점에서 극중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의 관찰에 치중해나간다. 다국적 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Multi-National United)에 근무하는 비커스는 디스트릭트9에서 요하네스버그로부터 200km떨어진 새로운 수용소로 이전하겠다는 조항에 대한 동의서에 180만 외계인의 싸인을 받아야 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된다. 비커스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그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비커스의 행위를 관찰자 시점에서 따라잡으며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의 객관성과 극영화로서의 연출력을 중첩시킨다. 현장감을 더하는 핸드헬드 영상과 거친 편집을 통해 사실성을 획득한 영화는 이를 통해 허구적 상상을 과감하게 현실세계에 안착시키고 점차 극영화적 진전을 거듭해나간다.
중반부에 다다를 때 즈음 묘사되는 비커스의 신체적 변이는 <디스트릭트9>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던 영화는 이를 통해 인물과의 거리감을 해소하고 인물의 심리를 극적 감정으로서 포용해나간다. 신체적 변이를 경험하는 비커스의 심리적 변화는 점차 객석에 앉은 관객의 감상을 지배할만한 감정적 형태로 번져나간다. 동시에 <디스트릭트9>은 인간보다도 외계인의 입장을 배려한 관점과 감정이입을 고수할 수 밖에 없는 영화다. 영화에서 약자의 위치를 점하는 외계인들은 인간이 행사하는 다양한 폭력의 형태에 노출됨으로써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그 형태적 우열관계 속에서 관객의 감정을 점유할만한 동정심을 이끌어낸다. 디스트릭트9에 수용된 외계인들이 인간에 의해 받게 되는 다양한 폭력을 인종차별적 형태에 가깝게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인종적 분쟁과 갈등을 외계인과 인간의 대립으로 치환한 우화나 다름없다.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디스트릭트9>은 사실상 상업영화로서도 손색없는 오락성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현실이란 밑바탕을 훼손하지 않는 수순에서 SF적 상상력을 일부 수용해 넣은 <디스트릭트9>은 역동적인 액션을 연출하고, 캐릭터와 이미지를 활용해 서스펜스와 위트를 유발하기도 하며, 외계인과 인간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는 동시에, 휴머니즘과 멜로적 감정마저 이입하는, 장르적 도가니나 다름없다.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기 보단 이미 갖춰진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형태를 조립해나간다. 궁극적으로 정치적 우화로서의 자의식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극영화적인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종종 껑충거리듯 내러티브를 건너는 플롯은 영화적 단점이라기보단 의도된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디스트릭트9>은 새로운 형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적 혁신이다. 저예산으로 완성된 영상의 조악함이 되레 현장성을 극대화시키고 극적 설득력을 더해나가는 수순을 지켜보면 흡사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월등한 의식마저 전복되는 기분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디스트릭트9>은 고도로 위장된 인종주의적 갈등을 치환한 정치적 우화다. 다국적연합 외계인 관리과 MNU가 사실 세계2위의 군수업체이며, 바이오기술을 적용해 외계인DNA에만 반응한다는 외계인의 레이저건을 활용하기 위해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디스트릭트9에 수용한 외계인들에게 생체실험을 자행한다. 심지어 인간과 외계인의 중간자로 변이된 비커스마저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디스트릭트9>은 반인류적 이미지로서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창조적인 소재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신선한 화법이 강렬한 인식을 남기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변종적 상상력을 동원한 세계관은 다양한 영화적 환상을 바탕으로 새롭게 설계한 하이브리드 이미지로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우화적 주제의식을 품고 재생된다. 정확한 목표의식을 품고 거침없이 전진하는 영상은 그것이 월등한 오락적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보다 효과적인 주제 전달을 가능케 한다는 걸 안다는 듯 강인하고 묵직하게 전진한다. 그만큼 <디스트릭트9>은 도전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작품으로서 오락성마저 포획한다. 이는 분명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인상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물론 3년 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전제 정도는 필요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