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 1 40초 정도면 가능하지. 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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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화화된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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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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