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줄기는 이렇다. 결핍과 불화가 잠재된 가족 내에서 성장하는 소년, 거대한 기차 탈선 사고, 미스터리한 실종과 도난 사고의 연속, 군이 개입된 정부적 음모론, 그리고 무시무시한 미지의 존재. 하지만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을 누군가에게 보다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다. 슈퍼 8mm 카메라로 영화를 촬영하는 아이들. <슈퍼 에이트>라는 제목의 출처는 이렇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슈퍼 에이트>가 품은 갖은 요소들의 변두리를 돌면서도 언제나 그 모든 요소들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은 채 존재하는 행위다. 이는 동시에 이 영화의 태생적인 목표를 대변하고 그 야심을 담고 있는 도구를 겨냥한 제목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슈퍼 에이트>를 이루는 이 모든 줄기들로부터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면, 아마 당신은 최소한 80년대 즈음에 개봉하거나 TV로 상영된 인기 외화를 보고 자란 세대일 것이다. <슈퍼 에이트>는 80년대를 주름잡던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다양한 자양분을 뿌리 삼아 자라난 오마주 덩어리다. J.J.에이브람스가 연출을 맡았지만 제작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이 더욱 농후해 보이는 앰블린의 21세기적 재현에 가깝다. <E.T>나 <구니스>와 같이, SF와 어드벤처의 자양분이 가족영화라는 테마 안에서 귀결되고 적절한 성취를 거두던 그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서스펜스와 현대적인 스타일이 결합된 오늘날의 감각을 자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J.J.에이브람스는 이 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다. 이 작품에서 에이브람스는 스필버그의 자장 속에서 자란 자신의 추억을 환기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그 오랜 추억의 재현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과 감각을 동원해 그 오래된 세계를 오늘날의 취향에 걸맞은 것으로 치장해낸다. <E.T>와 <클로버필드>의 조우라고 불릴 만한 이 작품은 고전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감수성을 현대적인 엔터테인먼트의 감각으로 끌어올린다. 타이틀 시퀀스로부터 15분여 만에 등장하는 기차 탈선 사고의 스펙터클 이후로 관객들에게 정체불명의 의문을 쥐어준 영화는 이를 방치한 채 아이들의 영화 찍기에 관한 사연에 집중하면서도 종종 그 의문을 좀처럼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미끼를 던져나간다.
일명 ‘떡밥의 제왕’이라 불리는 에이브람스의 술법은 <슈퍼 에이트>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달아나버리는 맥거핀으로 집중되기 보단 다채로운 영화적 요소들을 한 자리에 엮어내는 매듭의 역할을 해낸다. 아이들의 영화 찍기는 거대한 사고의 목격으로 이어지고, 이는 거대한 음모론에 관한 의문과 추적, 미스터리한 존재에 관한 서스펜스로 확장된 뒤, 미지의 세계로 탈출해버린 뒤, 그 모든 요소들을 감싸고 있던 인물들의 화해로 귀결된다. 에이브람스가 단지 관객의 호기심을 낚아내는데 능한 재주꾼 정도로 인식했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해도 좋을 것이다. 조각처럼 펼쳐진 소재들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나가는 에이브람스의 화술은 <로스트>나 <프린지>와 같은 ‘미드’에서도 유효했으며 새로운 <스타트렉>시리즈를 프리퀄과 시퀄의 평행우주로 띄우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바 있다.
대단한 스펙터클을 전달하는 기차 탈선 사고는 미스터리한 의심과 연동되고, 어떤 식의 추측은 가능하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미지의 존재의 파괴적 행위를 의문스럽게 전시하며, 이 모든 사건에 개입하는 군의 행위는 음모론적인 추측을 낳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슈퍼 에이트>는 한 소년의 성장을 비추는 드라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갈등하던 소년은 자신의 취향과 친구들과의 영화적 작업을 통해서 모험에 뛰어들게 되고, 사랑을 깨닫게 되며 이를 위해 뛰어든 위기 속에서 미지의 세계와 조우한 뒤, 자신을 비롯한 모두를 구원한다.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의, 그 가운데서도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절대명사의 장르를 채운 다양한 양식들로 병풍을 세운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특유의 감각과 화술을 통해 긴장과 유머를 넘나들고 끝내 순수한 감동을 건져낸다.
우연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갖은 사건을 건너는 동안, 필연적인 결과물의 완성에 다다른다. <슈퍼 에이트>에서 액자처럼 자리한 아이들의 영화 만들기는 사실 이 영화의 본체와 같다. 대단한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아이들의 영화는 이 영화의 끝에 다다라 소품처럼 전시된다. 그리고 어쩌면 <슈퍼 에이트>는 이 소품을 전시하기 위해 건너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영화를 되새긴다는 것, 즉 누군가의 과거 속에 자리한 추억의 현시. <슈퍼 에이트>는 추억을 위한 영화다. 그 추억이란 결국 영화관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며 그 행위의 기억을 통해서 추억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작품들에 관한 언급으로 재생되는 것이다. 결국 <슈퍼 에이트>는 바로 당신이 기억할만한 혹은 기억해낼 지난 날의 추억들을 환기시키는 도구인 셈이다. <슈퍼 에이트>는 추억마저 낚아내는 에이브람스의 슈퍼 탤런트로 엮어낸 슈퍼 엔터테인먼트의 재현이자 재해석인 것이다.
왕년에 ‘놀아봤던 언니’는 이제 진짜 재미있게 노는 법을 깨달았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보단 자신을 일으키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됐다. 운명 같은 인생의 반환점을 거칠게 돌아온 드류 베리모어는 이젠 스스로 선택한 반환점을 향해 유유히 질주한다.
지난 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버리 힐튼주 호텔에서 열린 제6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드류 베리모어에게 뜻 깊은 것이었다. 베리모어는 HBO에서 방영된 TV 영화 <그레이 가든스>로 TV 미니시리즈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결국 베리모어는 생애 첫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베리모어의 수상 소감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7살 때부터 이 안에 있었다.” 드류 베리모어는 일찍부터 배우로 살아왔다.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 T.>(1982)의 중심에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가 있었다. 드류 베리모어는 그렇게 불과 6살의 나이로 유명세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부터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리모어는 1984년에 출연했던 <우리 딸은 못 말려>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다. 불과 9살의 나이였다.
유년 시절 대단한 유명세를 경험한 배우들의 성장담은 순탄치 않다. 유년 시절부터 극성스러운 관심을 얻기 시작한 아역 배우들의 지난한 성장스토리는 마치 뻔한 공식처럼 발견되곤 했다. 베리모어 또한 그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75년 2월 생인 베리모어는 생후 11개월 만에 애완견 먹이 광고 오디션을 통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1980년, <올터드 스테이트>에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 데뷔한다. 그녀의 빠른 데뷔는 그녀의 집안 내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베리모어의 아버지 존 드류 베리모어를 비롯해 그녀의 할아버지 존 베리모어와 할머니 돌로레스 코스텔로는 배우의 혈통을 물려줬다. 아이리쉬 혈통의 연기자 가문에서 태어난 베리모어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빠른 유명세가 그녀의 삶에 이른 전환점을 만들었다. “내가 어린 소녀였던 어느 날로부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나는 내 사인을 받기 원하고 함께 사진을 찍거나 나를 만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2년 뒤, <우리 딸은 못 말려>에 출연한 베리모어는 9살의 나이로 생애 첫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노미네이트를 경험한다. 유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베리모어의 연기를 이렇게 평했다. “베리모어는 이 역할에 정확히 들어맞는 여배우다. 그녀는 이미 그것을 엄숙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 경험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 딸은 못 말려>에서 베리모어는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머니 사이의 딸로서 부모의 바쁜 일상과 불화를 관찰하고 그로부터 소외된다. 드류 베리모어는 이미 2년 전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6살의 나이에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경험하며 집 밖에서 피곤한 관심에 시달리던 베리모어는 정작 집안에 들어서면 외로워졌다. “사람들은 7살인 내게 성숙한 29살의 모습을 기대했다.”
9살에 음주를 시작했고, 10살에 담배를 물었으며 12살엔 코카인을 흡입했다. 드류 베리모어의 10대 초반은 (완벽하게 나쁜 의미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자리한 악명 높은 디스코 클럽 ‘스튜디오54’의 유명한 단골손님이었다. 끊임없는 파티를 전전하는 야간생활은 가십 거리로서 유용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녀의 약물과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병원에 베리모어를 입원시킨다. 심지어 베리모어는 14세 시절, 부엌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결국 3개월 간 제한적인 조치로 재활원을 떠나 가수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그의 아내 곁에서 요양하게 된다. “그녀 주변엔 맑은 정신을 지닌 헌신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크로스비의 말처럼, 그녀는 그 3개월 이후 온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더 이상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대 시절 자신의 방황과 극복을 이야기한 자서전 <Little Girl Lost>를 집필한다.
물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약물과 알코올에서 남성 편력으로 옮아간다. 16세와 17세 때 이미 두 차례의 약혼과 파혼을 경험한 베리모어는 19세의에 처음 결혼한다. 상대는 LA에서 바를 운영하는 제레미 토마스였다. 두 사람은 만난 지 6주 만에 제레미의 바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함께 살아보고 나서 결혼한다. 나는 그게 진부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하지만 두 사람은 2달여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2001년 7월, 베리모어는 코미디언 톰 그린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이번만큼은 100여 명의 하객이 모인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나는 톰을 너무 사랑한다. 그가 항상 좋은 친구로 머물며 변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베리모어의 언약은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 해 12월 이혼에 합의했다. 그 사이에도, 그리고 그 후로도 베리모어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거듭했지만 그 남자들은 베리모어에게 영원히 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리모어는 덕분에 더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사랑을 추구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내 삶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야성녀 아이비>(1992)를 통해 남자를 유혹하는 관능적인 십대를 연기한 베리모어는 다시 주목 받는 연기자 대열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출연한 <건크레이지>를 통해 생애 두 번째 골든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된다. 당시 그녀는 과감한 노출을 불사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플레이보이>와 <인터뷰> 매거진 등의 표지에서도 심심찮게 그녀의 누드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1995년에 출연한 CBS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그녀는 책상으로 올라가 상의를 벗고 등을 보여줬다.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녀의 스무 살 생일선물로, 퀼트로 짠 메시지를 보내줬다.“네 자신 좀 가려라.”
그녀는 배우로서 승승장구했다. 우피 골드버그와 함께 한 <보이즈 온 더 사이드>(1995)를 비롯해 카메오로 출연한 <배트맨 포에버>(1995)와 <스크림>(1996)의 성공을 통해 그녀는 흥행보증수표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배우의 삶이 아닌 다른 계획을 도모하고 있었다. 1995년에 낸시 주보넨과 함께 설립한 제작사 ‘플라워 필름즈(Flower Films)’를 통해 기획자로서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플라워 필름즈의 첫 작품은 <25살의 키스>(1999)였다. 당시 베리모어는 <웨딩 싱어>(1996)나 <홈 프라이즈>(1998)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플라워 필름즈의 두 번째 작품 <미녀 삼총사>(2000)를 통해 베리모어는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회사도 탄탄한 밑천을 마련했다. 그 이후 선택한 미스터리 스릴러 <도니 다코>(2001)는 박스오피스에서 처참한 성적을 거뒀지만 컬트 필름으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획자로서 자신의 안목을 평가 받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시리즈물로 거듭난 <미녀 삼총사2: 맥시멈 스피드>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탑승한 베리모어는 또 한번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다. 한 동안 로맨틱 코미디의 영역에 머무르던 드류 베리모어는 HBO에서 방영한 TV 미니시리즈 <그레이 가든즈>(2009)를 통해 호평을 얻어냈다. 이를 통해 골든글로브와 미배우협회시상식(ASG)에서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무엇보다도 2009년은 베리모어의 영역을 한 뼘 넓힌 해라는 점에서 특별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엘렌 페이지가 주연을 맡은 <위핏>(2009)에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나는 가능성을 찾는 소녀들의 영화가 좋다.” 베리모어의 말처럼 <위핏>은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가는 소녀의 도전기다. 경사진 트랙 위에서 롤러를 타고 과격한 육박전을 펼치는 여자들의 롤러 더비는 평범한 소녀의 특별한 질주를 통해 보다 짜릿한 쾌감을 낳는다. “드류 베리모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이 일에 자신을 던졌다. 항상 열정적이고,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다.” 엘렌 페이지의 말처럼 베리모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위핏>에 담았다. 그 자체를 즐겼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첫 연출작에 특별한 소망을 담았다. “나는 그녀(어머니)가 이 영화를 볼 것이라고 믿는다.” <위핏>엔 자신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어머니에 대한, 베리모어의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어머니를 비롯해 나를 둘러싼 관계들과 관련해 많은 목표를 세웠다.”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에서 딸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는 베리모어의 눈빛엔 연기를 넘어선 애틋한 진심이 맺힌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정도로 일상을 탐닉하던 베리모어는 이제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철이 들어 자신의 삶을 일군다. “내 영화의 끝엔 성실이 있고, 진실이 있고, 평화가 있다. 내일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여전히 자문하고 있다. 거기엔 실패나 성공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향해 열려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