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그날까지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계신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원제 <I come with the rain>은 rain을 pain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제목이다. 클라인(조쉬 하트넷)과 수동포(이병헌), 그리고 시타오(기무라 타쿠야)의 은밀하고도 긴밀한 삼각관계를 통해 서사를 굴려나가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세 남자의 고통을 죄의식과 속죄양의 두 바퀴 위에 얹혀 구원을 향해 힘겹게 밀어 올리는 긍휼한 사연이다.
적막과 어둠 속에서 조심스레 전진하는 클라인을 측면샷으로 건조하게 비추는 도입부 시퀀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시공간을 가늠할 수 없는 영역에 내던져진 듯 속내를 알 수 없는 상흔과 비명을 통해 강렬한 물음표를 남긴 채 불쑥 2년 후 로스앤젤레스로 점프해버린다. 그곳에서 클라인은 제약업체 대부호로부터 1년 전 불쑥 집을 나가 필리핀에서 연락이 두절됐다는 아들 시타오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얻게 된다. 시타오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됐다는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도착한 시타오는 그곳에서 시타오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이의 증언을 듣게 되지만 홍콩에서 시타오가 발견됐다는 제보를 얻게 된 클라인은 다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른다. 홍콩에서 오랜 친구인 형사 조멩지(여문락)를 만난 클라인은 우연히 악명 높은 마피아 수동포와 마주치게 되고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긴밀한 운명적 자장 안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논리적인 서사적 전개를 기대할 수 없는 영화다. 개인의 의식적 흐름 안에서 제각각 흩어져 유랑하듯 흐르던 파편적 서사가 한 점에서 맺히거나 불균질하게 응고된다. 싸이키델릭(psychedelic)한 사운드와 이미지를 통해 질환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유령과도 같은 이방인들 속을 떠도는 중심캐릭터의 몽유적 동선과 상념을 불완전하게 따라잡고 조율해나간다. 예민한 육체적 곡선을 지닌 세 배우의 몸을 훑는 관음적 시선의 카메라와 함께 입자가 눈에 띄는 거친 질감의 화면 속에서 마치 악몽과 몽유가 교차되는 삶을 떠도는 것 같은 인물들은 스크린 너머에 황량하게 전시된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고의적으로 디자인된 착란과 공황적 상징 속에 갇힌 인물들의 가늠할 수 없는 동선을 통해 이어나가는 이미지적 수난이다. 영문을 모르고 서로를 쫓거나 쫓겨야 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의 동선을 통해 개별적인 플롯을 이루고 그 동선에서 발생하는 교차적 접점을 통해 관계를 구체화시키지만 좀처럼 그 관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수순까지 나아간다 말하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양가적 테두리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동원되는 후반부는 자연스럽게 상징성을 해석하게 만드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기 보단 단지 그러한 직설적 이미지가 동원되는 전시적 효과에 불과해 보인다.
수난과 재림, 그리고 구원으로 나아가는 예수의 형상화는 비범한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단 단순히 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것마냥 공허하다. 세 인물과 함께 제각각의 흐름을 지닌 플롯은 개개인의 심리를 방황하고 사건에 쫓겨 다니듯 독립적인 노선을 걷는다. 동선의 교차나 관계의 맞물림은 단지 그 순간적 현상 이상의 지속성을 파악할 수 없도록 철저히 단절의 수순으로 되돌아온다. 사실상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그 모호한 제목만큼이나 속내를 희미하게 감추는 영화다. 어떤 특정한 의미를 위해 상징적 이미지를 동원하기보단 그 상징성을 직설적으로 전시하기 위한 이미지를 동원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고통의 낙인을 얻은 자와 타인에게 고통을 내리치는 자는 결국 고통을 치유하는 자를 향해 간다. 트라이앵글 속에 놓인 세 인물은 고통이라는 공통적 속성 안에서 서로 다른 통증의 기억을 품고 간다. 손에 피를 묻히고 가는 수동포나, 상흔과 같은 기억을 향해 가는 클라인이나, 타인의 고통을 제 몸에 전이하는 시타오는,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안고 간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탐미적 영상을 통해 이런 관계적 이미지를 전시해나가고 마는 영화다. 그 이미지 너머엔 특별한 실체가 없다. 그저 강렬한 이미지 속에서 캐릭터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고통을 호소하거나 안으로 삼킬 뿐이다. 몽환적인 사운드와 몽유적인 영상이 공허하게 들려지고 펼쳐진다. 궁극적으로 주제 자체가 하나의 허상처럼 전해진다. 난해함을 넘어 과하게 치장된 싸이키델릭 영상의 홍수적 수난을 지나면 씻겨 내리듯 텅빈 감상이 감지된다. 마치 의도한 듯 지배적인 정적을 순간적으로 파열시키는 압도적 이미지와 사운드로 선혈적 악몽에 시달리게 만든 뒤 한여름 소나기처럼 증발해버린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유일한 실체는 세 배우의 연기다. 저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연기적 입지를 다져온 세 배우는 각자 자신의 역할 안에서 인상적인 표정을 통해 강렬한 내면을 전달한다. 물론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단순히 세 배우의 이름값을 믿고 선택했을 관객에게 배신감을 안겨주기 좋은 영화다. 혹은 느와르 필름처럼 위장된 예고편을 믿고 상영관에 들어섰다간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큰 작품이기도 하다. 마치 한 여름의 불면증처럼 곤혹스러운 피로와 직면하게 될, 고통과 구원의 굴레적 악몽이 될 것이다. 좀처럼 그 내면에 잠재된 야심을 미화하는 것마저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지나치게 잠재적인 의미에 갇힌 이미지의 수난에 불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