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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