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이었다. 한낮에 단잠을 자고 있었을 게다. 어느 순간 어렴풋이 눈이 뜨였고, 순간 적막한 기분을 느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음을 직감한 어린 것은 내심 불안해진 탓에 퍼뜩 잠이 깨어 엄마를 불러댔다. 그리 넓지도 않았던 집 구석구석을 돌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돌아오는 건 빈 공간만큼의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을 밀어내려는 것마냥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내며 빽하고 울어내기 시작했다.
울음은 1시간 정도가 지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여전히 기억이 난다. 입안에 물려주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사탕을 우물거리는 내 등을 두드리던 엄마의 손. 달아난 울음. 혼자 남겨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원래 그리도 컸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어린 시절 그 날만큼은 그랬다. <나홀로 집에>(1990)의 케빈처럼 가족들의 빈자리에 쾌재를 부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진짜 먼 나라 이야기였던 거다.
대식구였던 케빈의 가족과 달리 단 네 명에 불과했던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나란히 극장에 앉아서 봤던 영화는 바로 그 <나홀로 집에>였다. 부모님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이 작품이야말로 아이들과 함께 극장에서 봐야할 영화라고 생각하셨던 건지, 내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갔다. 속편이 나왔을 무렵, 또 한번 부모님 손을 잡고 극장을 향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도 그 당시 어린 것이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는 모습이 당신 보시기에 좋으셨나 보다.
그 날로부터 20여 년 정도가 지난 지금 문득 궁금해졌다. 그 시절 홀로 집을 지키던 어린 케빈은 나이가 들어서도 홀로 남겨진 집 안에서 그렇게 유쾌할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말미에서 케빈은 돌아온 가족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내보인다. 생각해보니 그 미소는 내가 기억하는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이었다. 추억이라 불리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사소하고 하찮기만 하던 것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점차 애틋해지고 간절해진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것들이 있다. 내 울음을 멈추게 했던 요구르트 사탕의 단맛, 바로 그런 것 말이다. 나는 이제 혼자 남은 집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날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온 것이다. 더 이상 그 단맛을 맛볼 수 없는, 그런 나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