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은 기록이 묘연한 실체다. 그림은 전해지나 그에 대한 삶은 알 길이 없다. 고증이 불가능한 신윤복의 실체는 상상을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신윤복에 대한 관심은 그의 풍속화가 조선후기 양반들의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신윤복의 화폭에 담긴 조선의 에로티시즘이 과연 남성적인 관점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TV시리즈 <바람의 화원>과 동명원작소설은 그 의문에 상상력을 동원한 바다. 불분명한 역사적 실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전이됐다.
팩션(faction)은 테두리가 모호한 밑그림에 색감을 넣은 결과물이다. <바람의 화원>과 마찬가지로 신윤복에 여성성을 대입한 <미인도>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지만 이는 ‘만약’이라는 의심을 위한 반어적인 자기 방어에 가깝다. 여성으로 치환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둔다는 점에서 <미인도>는 <바람의 화원>과 비교군이나 대조군의 영역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인물에 접근하는 양식이 비슷하다 해도 두 작품은 엄밀히 다른 태도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신윤복의 여성성을 조명하는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만큼 두 작품의 연관성이 연동된다는 걸 애써 배제하긴 힘든 노릇이다.
<바람의 화원>과 <미인도>의 차이는 단적으로 신윤복이 ‘단오풍정’을 그리는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만으로도 여실하다. 도화서 시험을 보는 과정에서 머릿속으로 구상한 광경을 화폭으로 구현하는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문근영)과 실제로 눈 앞에서 마주한 현실을 화폭으로 옮겨 담아내는 <미인도>의 신윤복(김민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 그려내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열려 있던 인물이 그려내는 눈을 대변한다면 <미인도>의 신윤복이 그리는 풍속화는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인물이 만난 세상의 창과 같은 구실을 한다. 그만큼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을 갇혀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바람의 화원>보다 <미인도>가 두른 세계관의 스케일이 작게 느껴지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는 물론 단점이 아니다. <미인도>가 <바람의 화원>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만큼 인물을 해석할만한 여지를 더욱 넓힌 바가 분명 존재한다. 허구의 텍스트가 어떤 상상을 걸치는가에 대한 호불호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미인도>는 신윤복이라는 소재의 특이성을 소비하는 내러티브가 실질적으로 평이하다. <미인도>는 특별한 인상으로 치장된 인물의 평범한 내면을 드러내겠다는 <황진이>와 비슷한 야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황진이>만큼이나 <미인도>의 성과도 미약하다. 조선의 에로티시즘을 조명하는 직설적인 표현양식들은 나름대로 파격적인 면모가 있지만 신윤복을 제물로 삼아 시대를 조명한 양상이다. 결국 신윤복이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기회비용을 고려하자면 수지 맞은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강무(김남길)와 신윤복의 로맨스로 돌입하는 순간, <미인도>는 뻔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사제지간인 김홍도(김영호)와의 치정 관계 또한 불미스럽고 불필요하게 가지를 친다.
<미인도>는 신윤복을 전시할 뿐, 신윤복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다. 신윤복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단 굳이 왜 신윤복인가, 라는 의문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수화 같은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보다도 조선의 은밀한 에로티시즘 욕망보다도, <미인도>에 얹혀질 만한 기대감은 신윤복이란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다. 갓 쓰고, 도포 자락 휘날리는 신윤복에게 보고 싶었던 건 단지 저고리를 풀어헤친 속살의 섹슈얼리티만은 아니었을 터. 결국 <미인도>는 무책임한 욕망을 덧씌운 무심한 자화상에 불과하다. 그 안에 신윤복은 없다. 그저 편애하기 쉬운 이야기와 소모되는 캐릭터들이 즐비할 따름이다. 그나마 설화를 연기한 추자현이 종종 눈에 띤다. 소재의 비범함은 지나치게 평범한 관점을 거듭 확인시킬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