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인 ‘팔레비 샤’왕가가 서독을 방문한다. 베를린에서 그들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발생하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반정부적 조직 ‘독일적군파(RAF: Red Army Faction)’가 창설된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리입트로이)와 그의 연인 구드룬 엔슬렉(요한나 보칼렉)을 주축으로 한 이 청년단체는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폭탄테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직의 방향성을 알린 뒤 시민들의 지지마저 얻는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지만 이듬해에 가석방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진보적 언론인 울리히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는 독일적군파를 행위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 헤롤드(브루노 간츠)는 이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그들의 심리를 추적한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이 증명하는 건 폭력의 전진이다. 이란의 전제군주를 맞이하는 서독 정부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정부에 반발한 시민의 일부는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자행한다. 대립의 형태로 맞선 신념의 구도는 점차 극단적 행위의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는 독일적군파는 점차 그 행위적 명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극단적 행위를 통해 신념을 관철하려는 바더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며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방식의 설득을 중시하는 마인호프는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며 바더와 대립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올가미에 걸려 검거되거나 이에 맞선 총격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단원이 늘어가고 조직은 점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과 테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역사의 몸통 위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자리한 독일적군파에 대한 가치평가를 걷어내고 건조하고 묵묵한 다큐적 질감의 영상을 가미하며 의문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 물론 <바더 마인호프>를 온전한 리얼리즘 필름의 시선으로 주장될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저서 ‘신화의 시간(국내 출판명, 원제 ‘The Baader Meinhof Complex’)’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기 보단 그 주변부에서 제기된 하나의 가설적 형태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을 때 보다 정당해진다. 동시에 <바더 마인호프>가 역사적 증언을 목표로 둔 영화라기 보단 그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서 논의의 진전을 꾀함으로써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작품이라 정의할 때 이런 배후에 대한 설득력이 보다 힘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자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외부자가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록에 근거를 둔 형태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건 그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증인들을 양산해낸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장을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한다는 것이 <바더 마인호프>의 궁극적인 가치다. 혁명과 테러를 오가는 역사적 정의 가운데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현상의 근본을 탐구하게 만든다. 특히 <바더 마인호프>가 그리는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이 단지 그들에게 국한된 역사적 장면이라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더욱 중요하다. 혁명이냐, 테러냐,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쉽게 논하기 어려운 건 그 시대가 머금은 광기가 선의를 악의로 잠식하고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진전시키는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이 폭력의 또 다른 주체가 되길 결심하고 죽음과 파괴를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 커다란 대의의 전진이 아닌 세계의 또 다른 몰락이 목격된다. 양극단으로 몰린 세계의 두 축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순간 또 한번 세상은 어지럽게 들뜬다.
시민들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자행하는 반국가적 테러를 묘사하는 영화적 시선엔 당위를 따져 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관객들은 혁명의 기운에 도취되다가도 테러의 현장 가운데서 깨어나야 한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물음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만 영화는 그저 혼란의 도가니로 관객을 끌어들이고 방치한 채 무심하게 서사를 전진시킬 뿐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 역사의 가치를 설득하거나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자란 괴물의 형태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인간들의 대립은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 대상의 파괴로 변질되어 나간다. 본질은 훼손된 채 극악하게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만약 <바더 마인호프>의 곳곳에서 기시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건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가치관의 명분과 동떨어지게 발생하곤 하는 극단적 성질의 폭력은 좌우의 개념으로 편을 가른 이념의 극단적 대치 상황이 예감되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쉽게 연결될만한 풍경이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권한이다. 무엇이 괴물을 잉태했나. <바더 마인호프>가 발생시킬 궁극적 가치는 그 물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독일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하게도 그 현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미 우리 주변에 잉태되고 자라나기 시작한 괴물의 흔적들을 인지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