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을 위해 피어났던 궁중채화는 왕실의
몰락과 함께 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다시 궁중채화가 피어나고 있다. 조선의
임금이 아닌 만인을 향해서, 정성 어린 손끝에서 다시 피어난다.
채화는 어느 계절이 되면 자연스레 피어나는 꽃이 아니다. 사람의 손
끝으로 피우는 꽃이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드는 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쉽게 조화라고 말하기가 꺼려진다.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피고 지는,
나름대로 생의 주기를 지닌 꽃이기 때문이다. ‘비단 채’자와
‘꽃 화’자, 풀이하자면
비단으로 만들어진 꽃. 그래서 채화다. 하지만 조선 시대
궁궐에선 ‘꽃 화’자 대신 ‘빛날 화’자를 썼다고도 한다. 궁중을
장식했던 채화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채화가 단순히 궁궐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으로서만 존재했던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8일부터 2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아름다운 궁중채화’ 기획전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궁중채화 기능 보유자인
황수로 장인이 재현한 궁중채화들을 전시했는데 단순히 채화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서 궁중 속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던 채화의 진경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기획전은 기축년(1829년) 순조 즉위 30년을 기념하는 궁궐에서의 잔치를 축약해서 재현하며
그 풍경 곳곳에 자리한 궁중채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창경궁 명정전에서의 낮 잔치를 재현한 임금의
잔칫상 앞에 좌우로 자리한 건 하얀 벽도화준과 붉은 홍도화준이다. 여기서 화준이란 쉽게 말해서 꽃병이란
의미에 가깝다. 하지만 왕의 주변을 장식하는 꽃답게 꽃나무 자체를 병에 세웠다. 그 크기와 화려함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벽도화준과
홍도화준의 꽃은 오얏꽃이다. 오얏꽃은 ‘오얏 이’자의 한자어로 표기되는 조선의 이씨 왕조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에 이 두 화준은 그야말로 왕을 상징하는 실수목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크고 화려한데 꽃잎과 잎사귀 사이마다 자리한 나비와 벌, 꿩과 공작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고 화준의 꼭대기에 자리한 한 쌍의 봉황도 올려다 보인다.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오얏꽃에 몰려든 군신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두 화준 자체가 조선왕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 화준 너머로 1500명의 문무백관들이 쭉 앉아있었는데 이들
모두 ‘잠화’라는 머리꽃을 꽂고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악사나 무희들 심지어 시중을 드는 이들까지도 모두 머리에 잠화를 꽂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의
진찬상 위의 고임음식에도 ‘상화’라 불리는 꽃이 장식돼 있었고, 문무백관들의 독상에도 모두 이와 같은 꽃장식이 돼있었다고 한다. 물론
잠화나 상화는 모두 생화가 아닌 채화였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절대권력을 자랑하는 임금의 어명을 통해서 전국의 다양한 생화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굳이 채화를 제작해서
사용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유교를
숭상했던 당대의 조선의 왕실이니만큼 솔선수범해서 유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존중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꽃을 꺾어서 궁궐의 장식물로 쓸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의미를 담은 꽃이 시든다는 건 그만큼 불경한
의미로 읽힐 수 있으니 생화 대신 불변하는 채화를 제작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사실 채화의 제작 과정은 만만치 않다. 일단 조선 시대 기록의 고증에
따르는 만큼 천연 재료 기반의 제작방식을 고수한다. 천연 재료로 만든 천에 천연 염색은 물론 3년 동안 숙성시킨 밀풀을 바르고, 본드 대신 아교로 접착한다. 그래서 염색한 천은 다듬이로 두드린다. 이는 천연 소재의 천을 가위로
자르면 올이 쉽게 풀릴 수 있기 때문에 다듬이로 두드려서 씨줄과 날줄의 결을 으깨어 천을 단단하게 만드는 거다.
게다가 윤기도 더해져서 보다 자연스러운 빛깔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단단해진 천을 열
겹 정도 겹쳐서 꽃 모양의 본을 뜬 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한번에 가위로 오린다. 그렇게 오려낸 한
장 한 장에 밀랍을 발라 코팅한 뒤 인두로 지져서 자연적인 꽃잎의 형태를 만드는데 그야말로 채화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인 셈이다. 그렇게 완성된 꽃잎을 네다섯 겹으로 겹쳐서 모아 한 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꽃잎들을 네다섯 장씩 모아서 꽃 한 송이를 조립하고 거기에 꽃술을 붙이면 꽃이 완성된다. 본래
꽃술은 노루 꼬리털로 만들었다지만 지금은 구할 수가 없으니 모시나 삼베로 만든다. 모시나 삼베를 꼬아서
가느다란 꽃술의 형태를 만든 뒤 꿀과 아교를 발라 송화가루로 채색한다. 이렇게 완성된 꽃을 평균적으로
다섯 송이 정도씩 가지 하나에 달게 되는데 이를 한 타라고 한다. 이때도 대나무로 만든 죽실을 이용해서
꽃송이를 가지에 고정시킨다. 홍도화준이나 벽도화준은 2000개
가량의 타가 모여서 완성된다. 화준 하나마다 대략 만 송이에 가까운 꽃으로 이뤄지는 셈이다.
채화의 꽃과 잎은 모두 만들어낸 것이지만 채화를 매단 가지는 자연 가지를 꺾어다가 쓴다. 오래된 매화의 가지를 구해서 바싹 말려서 쓴다. 조화와 채화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조화와 달리 채화는 생사의 경계가 존재한다. 마치
생화가 시들듯이 채화도 시든다. 천연염료를 썼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바래지고, 습도가 높으면 꽃잎이 힘을 잃는다. 채화가 사람의 손에 닿아야 피는
꽃이라는 건 그래서다. 사람의 손으로 지속적으로 관리해줘야 한다. 조선시대
궁궐에선 채화를 만드는 장인인 화장이 15명 정도 있었다는데 상시적으로 궁궐의 채화를 관리했다고 한다. 게다가 꿀을 채취하는 꿀벌의 분비물인 밀랍으로 꽃잎을 코팅하고, 송화가루를
꽃술에 바르는 만큼 채화 역시 작게나마 생화의 생기를 품고 있다. 실제로 2007년 덕수궁에서 열린 채화 전시에선 문을 열어놓자 벌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궁중채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자연스레 그 명맥이 끊겼다. 지금은 가까스로 그 명맥을 일부나마 재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오늘날엔 일상에서의
실용성을 완전히 상실한, 박제화된 전시품에 가깝다. 그만큼
황수로 장인은 현시점에서 모색할 수 있는 채화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그 힌트를 찾은 건 먼 프랑스에서다. 19세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실크 소재의 꽃을 만들어온 프랑스의 르제롱 가문은 4대가 지닌 지금도 꽃을 만드는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격변기를 거치며 몇 번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그 명맥을 이어온 건 시대와 어울리는 방식으로서 전통적 기술을 실용화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탐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다양한 모자의
장식품으로서 유행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엔 크리스찬 디올, 지미 추 등의 오트쿠튀르와의 파트너십을
통해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채화 역시 현시대에 어울리는 실용적 가치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재현해야 할 채화의 종류가 많다는 건 일종의 기회다. 그만큼
채화의 실용성을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용적인 가치 창출이야말로 전통을
보존하는 최선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조선에서 피어났던 채화를 다시 피워내는 노력은 어쩌면 불멸의 상징이길
바랬던 채화에 진정한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