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상은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메마른다. 참혹한 세태 속에서 시구는 마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씨앗처럼 감성을 잊은 듯 단단하게 메마른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것마냥흩날려 간다.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버린 세상 속에서 시쓰기를 절실히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시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어느 여인은 그 대신 험악한 세상의 단면만을 거듭 목격하고 체험해 나갈 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강가에서 흙을 만지는 아이들, 그 중 한 아이의 시선이 강물 위로 머문다. 그 시선을 따라잡은 카메라 너머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점차 스크린 너머의 객석을 향해 떠밀려온다. 한적한 자연풍경과 대비적인, 참혹한 광경이 눈앞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시>는 대사 한마디 없는 풍경만으로 유려하고 명징하게 이 세계의 단면과 이면을 발췌해 관객의 눈 앞에 들이민다. 안온한 풍경 안에서 쉽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참담한 실체의 고요한 등장. <시>는 직설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운율이 동반된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에 담긴 끔찍한 직설과 비통한 은유를 찌르고 머금는 영화다.
직장문제로 부산에 내려가 지내는 딸 대신 홀로 손자(이다윗)를 키우며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어꺠결림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미자는 강으로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녀의 어머니가 넋나간 듯 딸을 찾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하던 미자는 그것이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으로 투신한 소녀가 대면해야 했던 폭력은 끔찍하게 매듭지어졌지만 그 폭력의 당사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가해를 쉽게 희석시키고, 그 당사자들의 부모는 위로나 슬픔의 감정보단 해결과 처리의 이성적 방안을 마련한다. 그 이성적인 해결방안은 미자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시상에 몰두해나간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 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진동시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일상의 풍광을 고스란히 지켜봄으로서 감정을 억누른다. <밀양>이 일상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일상으로 덮여가는 삶의 진행적인 너비가 결국 가닿을 수 밖에 없는 생의 영토를 살피는 영화다. 담담하게 떠밀려 내려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 위로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실상 그 삶은 쉽게 내려앉지 않은 채 켜켜이 시간의 중력 위로 떠밀려 내려가 새로운 일상을 쌓아나간다.
그 어떤 날, 우연히 스쳐 지난 타인의 일상이 제 일상의 발목을 붙잡듯 운명은 어떠한 예감도 없이 너비를 펼쳐 생을 덧없는 것으로 몰아가고 일상은 당연스럽게 생의 너비를 밀어낸다. 그 흐름에 순응하듯 인간의 생은 무력하게 유지되지만 그 삶의 흐름마저도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처럼 차분히 이 세계 속으로 안착한다. 아름다운 일상의 총합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삶의 너비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일상 속에서 점차 정화될 수 밖에 없는 기억처럼 고요히 흐름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시>는 <밀양>처럼 어떤 종교적인 엄숙함을 감지하게 만드는 영화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적 체험이 아닌 갈망적 의지로서 보다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둔탁하고 거친 각운의 경험이 남긴 심상의 상흔은 결국 삶의 운율 속에서 보다 깊고 고요한 문체가 되어 삶을 정화시킨다.
<시>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통해 보다 명징한 통증과 수려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도 끝내 그것이 아름답다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시나 다름없는 여인은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시를 흉내내는 속물들의 세상 속에서 시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국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통증의 세상에서 깊게 침전해 내려가는 감성의 운율은 아련하다 못해 시리고 창백해서 아프고 고결해 소중한 것이다. 이창동은 정적이면서도 첨예하게 파고 드는 문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윤정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동원하며 독자적인 운율을 보존한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살아서 만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