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비사와 연관된 이 모든 설정은 연상에 의거하되 직접적으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실재를 가리지 않되 허구로서의 자질을 설득하기 좋은 태도다. <바람의 화원>나 <미인도>가 그랬듯, <쌍화점>역시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유통되던 비사(秘史)를 허구적 양식에 입각해 가공한 뒤 스크린에 유통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비사만큼 흥미로운 소재도 없다. 가공도 자유롭고 관음적 욕망이 소비를 유발한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열어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다. 그 일기의 주인이 많은 관심을 유발할수록 구매욕은 상승하기 마련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수많은 비밀을 잉태했을 왕실의 비사는 이야깃거리로 적절하다. 치명적일수록 매력적이다.
고려 말, 왕의 호위무사 ‘건룡위’가 있었다. <쌍화점>은 그 집단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한다.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고려의 왕실의 정통성에 관여할 정도로 극심했다. 고려왕은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원나라공주를 왕후로 맞아야 했다. 게다가 고려의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원나라에 기대는 외척세력이 많았고 그만큼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왕은 자신을 보위할 건룡위를 조직한다. 건룡위는 왕의 취향을 반영한 어린 미소년들로 이뤄져 집단적으로 육성된다. 건룡위의 수장 홍림(조인성)과 왕(주진모)은 단순한 신하와 군주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호위무사로서 왕의 보위를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라 10년 넘게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반려자에 가깝다. 어려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왕후(송지효)는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는 외부인처럼 껄끄럽다. 그 삼각관계는 실상 고려에 알력을 행세하는 원나라의 외세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시대적 정치와 개인적 욕망이 얽혀 이뤄진 삼각관계는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를 퍼즐처럼 엮으며 복잡한 함수관계로 뻗어나간다. 구도로만 이해하자면 홍림과 왕의 관계는 애정의 합의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권위에 의한 일방적 소유에 가깝다. 홍림은 유년시절부터 스스로를 왕의 남자로 인식하고 왕을 위한 헌신적 충정이 모든 행위의 기반이라 믿는다. 오해가 형성되는 건 이 지점이다. 홍림의 본심은 공적인 업무를 거듭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은 홍림에게 사적인 진심,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연모한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업무에 대한 오해가 형성된다. 홍림이 연모의 대상에 눈뜨게 되는 계기는 감정의 변화도, 변절도 아니다. 자신에게 본래 주어진 수컷의 기질에 눈뜨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사료만 먹던 개가 고기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비단 홍림의 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고려로 건너와 왕후가 됐건만 왕은 왕후를 여성으로 품은 적이 없다. 생식적인 강압에 의한 홍림과 왕후의 동침이 궁극적으로 에로스의 양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설득력은 그로부터 발생한다. 사랑을 얻지 못한 자들이 미숙한 방식으로 사랑을 도모한다. 그 사이에서 권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소유하던 왕은 고립된다. 홍림과 왕후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갈등을 빚는다. 삼각관계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삼각관계를 조절하는 권한은 왕에게 있었고 홍림과 왕후는 그 권한을 충분히 인지한 채 명령에 따른다. 이는 일종의 게임과 같다. 왕의 조종에 따라 홍림과 왕후는 캐릭터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게임 도중에 캐릭터는 자각한다. 스테이지를 구성하던 왕의 권한이 무시되기 시작한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본성을 자각한 인물의 심리가 흔들리다 못해 거침없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반목은 은밀하면서도 섬세하게 이뤄지다 점차 적극적인 행위로 진전된다. 관계의 변화를 짐작한 인물들은 의도와 다른 말을 주고 받으며 오해의 골을 깊게 파내려 간다. 끝내 갈등이 형성되다 애정은 증오로 발전되고 파국이 형성된다. 결국 자신의 본심을 가리지 못한 인물들의 욕망이 거친 구조의 위기 상황을 점진적으로 이루고 부순다. 파격적이라 할만한 정사씬들도 인물의 감정적 파고를 설득력 있게 전시한다. 연기적 테크닉이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도 홍림의 캐릭터는 유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한 조인성의 표정에 어울린다. 특히 섬세한 듯 히스테릭한 왕의 이중적인 심리를 연기하는 주진모는 적절한 위엄을 드러내고 송지효 역시 육체적 발로에 의해 서서히 변모하는 왕후의 심리적 추이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다. 배우들의 연기도, 캐릭터도 적절하다.
정치적 파국으로 빚어진 인물관계의 변화 속에서 사유화된 갈등 양상이 도출된다. 그 지점에서 이야기의 너비가 축소된다. 왕의 권한 아래 안정적으로 결착된 삼각 관계가 흔들리는 건 고려왕실의 후사문제를 빌미로 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대한 위기 때문이다. 퍼즐구조로 뒤엉키는 인물 간의 심리 변화는 결국 그 정치적 발화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알력이 개개인의 심리전 양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배경이 됐던 정치적 위기는 쉽게 무마된다. 실상 시대상과 맞물려 공민왕을 연상시키는 왕의 정치 노선에 얽힌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될 것까진 없지만 시대적 배경을 통한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이 인물 관계의 갈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규모가 협소해지는 양상이다. 극 전체를 주무르던 거대한 정치적 야심이 증발한 가운데 치정극이 거칠게 거듭 반복된다. 사연의 너비가 좁아진 것에 비해 재생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형태가 다를 뿐 비슷한 양상의 갈등이 자가분열하듯 절정에 이르지 못하는 위기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인물의 갈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나아가기 보단 제자리를 도는 양상이다. 정해진 결말에 할애되는 러닝타임이 길다. 구조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가 결말을 거듭 반복하는 인상이다. 2시간 20여분을 넘기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이야기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형태만 변화된 인물간의 갈등 구조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거듭되는 까닭이다. 위기와 절정이 수 차례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한 감상이 권태를 유발한다. 모든 과정엔 명백한 사연이 있으나 지나치게 연속적이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임에도 결말을 망설이는 이야기는 끝내 허무한 마침표를 피로하게 남기고 사라진다. 천산대렵도에 대한 사족마저도 그저 허무를 더할 따름이다. 초반의 공격적 기세가 긴 러닝타임 속에서 오버페이스처럼 무너지는 형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