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내음이 날 것처럼 푸른 잔디밭으로 꾸며진 무대 위엔 의자에 앉은 한 여자가 있다. 이윽고 뒤편에서 꽃을 든 한 남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돌아보고 남자는 다가선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다. 여자와 남자는 각각 언어를 내뱉지만 실상 그 언어는 대화로 엉키지 못하고 비켜 나가 증발해버린다. 아내와 남편임이 분명한 남녀는 서로를 향하되 마주하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만 남자는 여자를 응시하지 못한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소리치지만 남자는 빈자리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남자의 언어는 독백이다. 여자의 언어는 결국 전해지지 못하는 독백이 된다. 두 독백은 대화처럼 리듬을 타고 서로의 언어에 호환되지만 결국 이는 무대에서 소통되지 못하고 객석으로 흘러 들어간다. 두 사람은 만날 수 없는, 혹은 마주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민들레 바람되어>는 순정적인 남자의 신파다. 본질적으로 눈물을 발생시키기 좋은 자질로 이뤄진 멜로다. 하지만 단순히 최루성 신파로서 기능하는 작품은 아니다. 주인공인 두 부부 외에도 한쌍의 노부부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민들레 바람되어>에서 신파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위트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궁극적으로 <민들레 바람되어>는 신파다. 웃음보다 중요한 건 눈물이다. 다만 그것이 평이한 형태의 신파와 거리를 둔 도발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극 초반 기능적인 트릭을 통해 이야기의 형태를 각인시킴으로써 관객은 그 형태 자체가 이루는 정서가 온전히 흘러갈 것임을 예감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로맨스의 형태는 그리 순탄하게 순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순정의 너머에 감춰진 진실이 한차례 스토리를 흔들고 지나갈 때 관객이 이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실상 <민들레 바람되어>의 바탕이 된 희곡의 스토리가 완벽하게 구성된 작품이라 판단하긴 어렵다. 종종 대화를 위장한 독백은 일관적인 형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절정에 다다르는 내러티브 역시 자연스러운 단계의 전철을 밟기 보단 급작스럽게 삽입되는 인상을 부여한다.
하지만 앵콜작이기도 한 이번 <민들레 바람되어>는 배우들의 열연이 볼만한 연극이다. 남편 안중기 역에 조재현, 안내상, 정웅인이라는 트리플 캐스팅을 채비한 이번 앵콜은 어느 누구라도 궁금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 자체만으로 만족할만한 가능성이 큰 공연이다. 일단 공연을 통해 확인했지만 조재현은 명성에 걸맞게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시종일관 여유롭게 무대를 오르내리며 나이 먹어가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특히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디테일하게 묘사하기도 함으로써 현실적인 느낌을 더한다. 안내상과 정웅인의 연기도 궁금하지만 조재현은 꽤 성실한 연기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노부부를 연기하는 황영희와 김상규의 연기 또한 감칠 맛 난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이승민과 함께 더블 캐스팅 된 이지하는 적절히 제 역할을 잘 꾸려나가는 인상이다.
<연극열전2>의 마지막 라인업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기획자이기도 한 조재현의 공연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공연을 통해 확인한 조재현의 연기는 <연극열전2>라는 기획에 유종의 미를 거둘만한 마침표로서 부족함이 없다. 창작극이 아닌 기존의 인기 작품의 되새김질이란 점에서 비판도 많이 얻었지만 <연극열전2>는 분명 젊은 관객에게 연극의 묘미를 어느 정도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실효를 거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저변의 확대만이 아닌 발전을 위한 고민이 동반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염두에 둘 방향성이 절실하다. <민들레 바람되어> 앵콜 공연장의 객석마저 가득 메운 관객들을 과연 어디로 이끌 것인가는 결국 이 공연 이후의 고민에 달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