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혈의 누>로 데뷔 후, 2년 만에 영화로 돌아왔다.
드라마도 매력이 있지만 영화 작업이 너무 그리웠었다. 때마침 작품을 만나게 됐고 시나리오를 보고나니 너무나 하고 싶어졌다. 너무 반갑고 즐겁게 촬영했다.
그런데 그 두 편의 영화가 참 묘하게도, 무슨 말할지 이미 아는 표정이다.
내 운명이다. (웃음)
<혈의 누>와 <궁녀>는 국내에서 드문 장르 영화다. 그런데 그 두 편의 영화에 본인의 이름을 올린 것도 묘한 인연이다.
요즘 사람들이 사극에 매력을 느끼나 보더라. 그렇기 때문에 제작하시는 분들도 그 쪽에 관심을 많이 두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런 시대에 태어난 거 같다. 팔자려니. (웃음)
<혈의 누> 당시 오디션이 치열했다던데, 200:1정도? 그 난관을 헤치고 영화에 출연했다.
그래서 많이 기뻤고, 많이 울었다. 가족들과 같이 파티도 했었다. (웃음)
그런데 막상 영화에서 출연 비중이 너무 작아서 실망하진 않았나?
그때는 함께 할 수 있다는 것과 현장을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이 컸다. 김대승 감독님을 비롯해서 차승원, 박용우, 지성, 이런 굉장한 선배님들과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한텐 배움의 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감독님한테 감사해하고 있다.
<궁녀>에서는 출연 비중이 많이 늘었다. 게다가 <궁녀>는 비중의 차이를 떠나서 각각의 캐릭터를 확실히 드러낸다.
<궁녀>를 통해 감독님께서 의도하신 건 폐쇄된 공간 안에서 그녀들이 살아가는 삶을 조명하는 거였다. 역사적인 베일에 싸인 그녀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그래서 굉장히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도 그 캐릭터들마다 갖고 있는 임팩트를 다 살리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제목도 <궁녀>다. 그런 의도를 잘 계산하고 펼쳐낸 것 같아서, 그런 결과를 들었을 땐 참 기분이 좋다.
사실 <혈의 누>가 남성 중심의 영화였다면 <궁녀>는 여성 중심의 영화다. 그런 점에서 전작보다 촬영이 더 편했을 법하다.
되게 즐거웠다. 근데 굳이 여자들의 영화라고 생각 못했던 게 스텝들이 다 남자라서. (웃음) 그리고 사실 난 주로 희빈 처소 안에서 연기했기 때문에 여배우들과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굳이 여자들만의 영화라는 의미보다 내겐 여배우들과 이렇게 대거 출연해서 한 작품을 했다는 의미가 컸다. 회식 자리나 서로 현장에서 스쳐갈 때, 그분들과 얘기하고 사담을 나눌 때 스스럼없이 얘기 나누는 게 그냥 편하고 좋더라. 남자 배우들 같은 경우에는 행여나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고, 보이는 시선이 두려울 수도 있어서 조금 껄끄러웠을 것 같다. 너무나 편하게 얘기하고, 같은 복장으로 같은 공간에서 연기하니까 너무나 좋더라. 편안해서.
동선이 겹치지 않는 몇몇 배우들과는 촬영장에서 거의 못 만났겠다.
맞다. (임)정은 씨랑 (전)혜진 씨는 거의 못 봤다.
그렇게 보기 힘들어서야 경쟁 심리 같은 것도 느끼기 힘들었겠다.
난 정말 경쟁심 같은 건 없었다. 근데 난 누구랑 경쟁을 해야 했지? 중전인가? (웃음)
그런데 <혈의 누>는 적은 출연 분량에 비해서 고생스러운 씬이 많았다.
막 산을 달리면서 도망 다니고, 물에도 빠지고.
그에 반해서 <궁녀>는 촬영 분량은 늘었지만 오히려 편했겠다.
세트 안에서 찍었으니까 숨차거나 그럴 일은 별로 없었지. 그런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내 주위의 상황들이 급변하는 게 많아서 내가 갖고 있어야 할 생각들이 굉장히 많았어야 했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에 좀 버거웠다. 그래서 내게 계산력이 많이 필요했던 거 같다.
<궁녀>의 주인공은 궁녀일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궁녀가 아니었다.
궁녀 출신인데?
그래도 결과적으로 영화상에서는 궁녀가 아니니까.
궁 안의 여인들을 다 궁녀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웃음)
그렇게 따지면 맞겠다. (웃음)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후궁은 요염하거나 색기 있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희빈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약하고 심성이 여리고.
그런 점에서는 전형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희빈이 더 하고 싶었다. 희빈은 표독스럽게 알려져 있는 전형적인 후궁이 아니었고, 극 안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난 그동안 너무 악역을 많이 해서 그런 역할에 굶주려 있기도 했다.
방금 말한 바대로 악역을 많이 했는데 사실 그 캐릭터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는 인물이다.
나름대로 정당성이 좀 있는 거 같다. 내가 많이 고생했을 것 같은 얼굴인가 보지. (웃음) 한도 많고,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보이나 보다. 아마도 <프라하의 연인>에서 그런 걸 많이 부각시켜줘서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론 깊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싶다. 단순히 독해 보인다는 것보단.
이미지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다.
좀 힘들었다. 생활하고 연기는 별개인데, 그때는 그걸 함께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고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뭐,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고 나니까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이젠 연기적인 부분은 동떨어지게 보면서 지금은 나를 막 꾸짖으면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프라하의 연인>이나 <궁녀>에서 보면 나약하거나 신경질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히스테리컬 하고.
그런데 실제 성격은 좀 반대적인 거 같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발랄하다. 많이 털털한 편이다.
그럼 본래 성격과 반대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은 없었나?
사람은 모두 다양한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니까 평소에도 그런 걸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하고 느끼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다. 어쩌면 나한테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좀 두려운데, 진짜 내가 그럴까 봐. 혹시 나도 모르는 내가 있나? (웃음)
희빈은 궁녀들보다 권력에 가까운 여자다. 그런 면에서 가장 권력에 욕심을 낼만한 인물인데 오히려 궁녀들의 권력욕에 휘말리는 느낌이 든다.
희빈은 욕심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 그냥 살아남으려는 인물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심상궁이 많이 찔러댔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궁 밖으로 나가면 넌 비구니 돼서 살아야 된다느니, 희빈은 그래서 그저 살아가기 위한 방법인 줄 알고 따랐는데 그게 어느 순간 너무 과하게 되고 틀어지면서 주위에서 그런 음모가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이 너무 컸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희빈이 더 강해질 수 있었던 거 같다.
희빈을 비롯한 <궁녀>의 여자들이 갈구한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허락되지 않아서 억압된 심리가 공포로 폭발한 것이 아닐까.
주상 하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궁녀들의 삶이 사랑이라면 모자간의 모성애도 사랑이고, 대비마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희빈도 사랑이 부족한 것이고,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애환 같은 게 느껴지던가?
근데 애환이라기보다, 굉장히 치열함을 느꼈다. 내게 그곳은 전쟁터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경쟁 아닌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생과 직결되는 까닭이니까. 중전이 잘되기 시작하면 희빈은 멀어지고 그렇게 잊혀지기 시작하면 그건 곧 죽음이니까. 그렇게 생존과 연결돼있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한 싸움터 같은 느낌으로 내게 와 닿았다. 그 당시에 그런 사랑을 갈구한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서 목말라 한다는 건 그냥 본능적으로 느낄지언정 지금의 시대를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은 아니겠지. 그게 너무나 당연시되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녀들이기 때문에 지금의 잣대로 그때를 바라본다는 건 조금 괴리감이 있는 거 같다.
궁극적으로 남성의 권력욕을 대리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욕망일수도 있다. 하지만 희빈은 소극적이었다.
결국은 조정을 당하는 입장이었지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거짓말을 하다 보니까 계속 쌓여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이었는데 희빈은 그걸 바로잡으려고 노력을 했던 거지. 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난 사랑과 욕구 같은 것들이 딱히 처음으로 떠오르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느끼기에 <궁녀>는 어떤 영화인가?
<궁녀>는 새로운 역사다. 한번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궁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궁녀>는 정말 궁녀가 전부인 거 같다. 치열한 그녀들의 삶을 그린 영화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여성영화란 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항상 사극에서 권력자 얘기만 하다 보니 주체가 왕일 수 밖에 없는데 우리 역사에서 여왕은 거의 없으니까 이야기가 남성 중심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궁녀>는 그 주위에서 그들을 수족처럼 보좌했던 궁녀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정말 새로운 거지. 그래서 여성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힘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비주류를 주류로 끌어올리는 느낌이라 반갑기도 했다.
앞으로 이런 작품이 있을까? 이렇게 여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데. 아, 있구나, 핸드볼!
맞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여성을 주로 한 이야기다.
그럼 우린 이제 축구나 농구 같은 걸로. (웃음)
그 동안 악역을 많이 맡았는데 외모적인 탓도 있을 것 같다.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느낌이랄까.
주변에서 날 예쁘게 꾸며주는 덕분이다. 맨날 머리도 해주시고, 예쁜 옷만 입혀주신 덕분인가보다. (웃음) 근데 난 안 그렇다. 털털하고, 편하게 입는 거 좋아한다. 내가 원래 구두를 많이 신다가 사극하다 보니까 구두를 신을 일이 없어서 운동화만 맨날 신고 다녔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구두를 신으니까 걸을 수가 없더라. (웃음) 편한 걸 좋아한다. 심플한 멋이 나는 스타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쉬폰 드레스나 실크 블라우스 같은 건 나한텐 솔직히 불편하다. 그런데 예쁘니까 자꾸 입게 되는 거 같다. 집에서 입을 일이 없으니까.
그런 외모 때문에 궁녀가 아닌 희빈이 된 것 아닐까?
솔직히 나이 때문인가 보다. (웃음) 궁녀는 좀 파릇파릇한 느낌의 캐스팅을 위주로 했다면 희빈은 좀 산전수전을 겪은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를 찾았나 보다. (웃음)
사실 나이에 비해 데뷔가 늦은 편이다.
늦었다고 얘기들을 좀 하시더라. 아쉬운 점도 있다.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 연기 같은 걸 할 수 없다는 건 참 아쉽다. 내가 만약 교복 입는다면 아마 친구들이 뜯어말리겠지. 감금시킬지도 모른다. (웃음) 그냥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흘러온 대로 그냥 하다 보니까 난 흘러왔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무대에도 설 거다
무대라면 연극?
맞다. 무대는 나이를 두루두루 섭렵할 수 있어서 매력 있다. 노년기 연기도 무난하게 할 수 있다. 약속에 의해서 가기 때문에. 방송은 되게 리얼리티하게 가야 되니까 정말 늙어야 되고 그만큼 분장해야 되고. 근데 무대에서는 서른 중반까지는 괜찮지 않을까. 뭐 별로 후회는 없다.
연극 무대에 대한 계획이 있나 보다.
구체적으로 잡힌 건 없지만 막연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다. 좋은 작품이 있으면 꼭 하고 싶고,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고 싶다.
연극에 대해서 많이 매력을 느끼나 보다.
학교 다닐 때도 했었고, 졸업하고 한 2년간 했었다. 연극 무대 때문에 연기를 시작하게 됐고 그랬기 때문에 하고 싶다.
연극 경력이 있는지는 사실 잘 몰랐다.
나중에 하면 꼭 보러 와라. (웃음)
<궁녀>에서 회초리 맞는 연기도 실제로 몸으로 때웠다고 들었다. 정말 줄이 쫙쫙 가던데. (웃음)
정말 맞았다, 아파서 죽는 줄 알았지. 진짜 뼈가 시리더라. (웃음) 메이크업으로 어떻게 커버해보려 했더니 감독님께서 그냥 가자고 하시더라. 그런데 차라리 그 때 찍길 다행이었지, 이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방 변색이 되더라. 정말 상한 고기처럼, 종아리가. (웃음)
듣는 바로는 감독님이 대신 하려고도 했는데 직접 연기했다고 들었다.
감독님한테 못 맡기겠더라. 나중에 평생 얘기를 들을 거 같아서. (웃음) 그냥 내가 맞고 깔끔하게 끝내야겠다 싶었지. 감독님 보시면 알겠지만 조근조근 말씀하셔도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거. (웃음) 안 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궁녀>에 캐스팅된 게 <혈의 누>의 경력이 어필된 덕분이기도 할 것 같다.
그 때 모습이 좀 강하게 남았다고 그러나, 물에 빠지면서 시작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셨던 거 같다. 후에 그 말씀도 하시더라.
<혈의 누>에서 시체 연기를 하기도 했는데, <궁녀>에서 월령을 연기한 서영희의 시체연기를 봤을 때 감회가 새롭지 않던가? 한편으로 <혈의 누>의 강소연 역할과도 유사하다. 극적인 비밀의 키가 되는 역할이니까.
그게 참 어렵다. 배우로서 죽어있는 연기 자체를 한다는 게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웃음) 그 때 생각이 많이 났다. 그래서 많이 힘들었을 거란 생각도 하면서 대단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사하다고 느끼는 건 단편적인 느낌 같다. 단지 시체의 모습으로 많이 나오니까 전체적인 느낌이 그럴 수도 있지만 (서)영희의 월령은 캐릭터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희빈을 도와주려고 자신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를 선뜻 언니의 아이로 줄 수 없는 거다. 자기 뱃속으로 낳았기 때문에 모성애를 느끼게 되면서 그녀의 변화가 시작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난 충분히 월령이란 캐릭터가 이번 영화에서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월령과 소연은 비교할 캐릭터는 아니라고 본다. 소연이는 진짜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의지하며 쫓겨 다니는 게 전부였다면 영희는 그 두 가지 모습(살아있는 모습과 죽어있는 모습) 중 살아 생전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이는 캐릭터다. 그렇게 스토리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이 다르다.
많은 여배우들과 연기하면서 개인적으로 얻은 점도 많지 않았을까 싶다.
난 두 번째 작품이다. 다른 분들은 굉장히 많은 작품들을 했다. 난 그냥 배울 것 투성이였지. (웃음) 연기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어떻게 자기를 컨트롤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지, 심지어 난 그 분들의 인간성까지도 배울 점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부터 동료 연기자들까지, 그랬던 것 같다.
<궁녀>를 보면서 여자들도 참 무섭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거 다 왕이 시켜서 그런 거다. 왕은 남자잖아. (웃음) 정말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다. 실제로 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우리 영화에서 몇 개 추렸다고 하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은 다 그런 거 같다. 물론 난 여자만 입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사람이 딱 뭉쳐서만 살 수 없잖아. 출패 얻어서 궁궐을 나갔다 오거나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선 그런 과정들이 충분히 필요했다는 거지. 그리고 그런 거 없이 왕조를 지켜내고, 나라를 건국하고, 역사를 만드는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경의로울 것까진 없지만 그런 노력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막 잔인하다고만 볼 일은 아닌 거 같다.
그럼 여자로서 여자가 무섭다고 느껴본 적은 없나?
난 산 사람 별로 안 무서워 한다. (웃음)
그럼 죽은 사람은 무서워하나 보다. 귀신영화 같은 건 잘 못 보나?
못 본다. 근데 참 이상하게 공포물을 하게 된다.
<궁녀>는 어떻게 봤나?
막 이러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봤다. 기쁨 2배, 공포 2배. (웃음)
스크린에서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어떤가? 이제 두 번째 관람인데.
생소하지. 나한테는. 내가 내 모습을 봤을 때 느낌은 마치 내 목소리 녹음해서 들은 거랑 똑같이 어색하다. 아직까지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쩌겠어. 익숙해져야지. (웃음) 그런데 한번보고 두 번 보니까 더 괜찮더라. 세 번 보고 네 번 보면 더 나아지려나? (웃음)
이젠 좀 다른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을 것 같다.
좀 밝고 명랑하고. 수더분하고 그런 여성 정도?
작년 말에 출연한 <얼마나 좋길래>에서는 심한 건 아니지만 좀 망가지기도 했다.
아니다. 좀 심했다. (웃음) 그때 된장녀란 타이틀을 얻었다. 난 된장녀가 싫다. 잠깐, 이 기사 ‘윤세아, 된장녀 싫다’ 이렇게 나오는 거 아냐? (웃음) 어쨌든 그런 껍데기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시대가 요구하는 별명 같은 걸 덮어쓰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 바로 옆집에 살 것 같고 같이 생활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으면 좋겠다. 편안하게.
아직은 조연을 맡고 있지만 주연 배우로서의 욕심은 없나?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물론 비중이란 걸 따지지 않을 수는 없는 거 같다. 좀 더 큰 그릇이 되기 위해서, 좀 더 배포를 넓히기 위해서, 연기자에겐 자신감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활개칠 수 있는 장소가 충분히 마련되어야 하고 그런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나와 맞아떨어져야 된다. 정말 내가 수련이 많이 쌓이고 정말 내가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그런 버거움이 없을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그런데 지금 억지로 욕심을 내면 오히려 평생 연기를 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웃음) 물론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차근차근 한걸음씩 밟아나가는 게 나에게는 순리라고 생각한다. 워낙 또 데뷔가 늦었기 때문에 그런 욕심보단 꾸준히 연기 활동하면서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서 다가가고 싶다.
강한 이미지의 장르 작품에 출연하거나 독한 내면의 캐릭터를 연기한 덕분에 캐스팅 제의도 편중될 것 같다.
내 캐릭터들은 남자를 이용하고,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다가, 거기에 대해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나중엔 반성하다가 끝났다. 그래서 그런 게 겹쳐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많았다. 그래서 <스마일 어게인>할 때는 좀 더 색기를 내보려고도 했다. 다른 면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한계에 부딪히고 한정이 되다 보니까 어려운 거 같더라. 정말 특별한 이유가 다르지 않고 어떤 드라마마다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의 구조적 짜임새가 똑같았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는 연기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어렵다. 배역이 싫다기보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폭이 너무 작아지니까. 그런 게 참 어렵더라.
그렇다면 뭔가 달리 해보고 싶은 역이 있나?
옛날부터 가슴 아픈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웃음) 남자친구랑 아니면 남편이라도. 근데 일일드라마에서 내 상대역이었던 도이성 씨가 나를 많이 예뻐해주는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때 많이 풀렸다. 그런데 그런 발랄하고 귀여운 사랑 말고 가슴 아픈 사랑도 해보고 싶다. 헌신적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 또 한번. (웃음)
가슴 시린 멜로는 여배우들에게 일종의 로망같기도 하다. 여자라면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평소에 이룰 수가 없으니까. (웃음)
내년이면 이십 대의 마지막 해인데 뭔가 특별히 이루고 싶은 건 없나?
연애하고 싶다. (웃음) 솔직히 난 서른이나 서른하나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십 대의 마지막이나 삼십 대의 마지막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난 이십 대 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다 했다. 연애도 해봤고 지금 연기도 하고 있고, 그래서 특별한 소망 같은 건 없고 그냥 또 한편의 영화로 이렇게 홍보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웃음) 항상 하루하루 똑같이 이렇게 연기하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나한테는 전부인 거 같다. 너무 재미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보탠다면 내 옆에 남자친구가 든든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웃음)
이젠 알아보는 사람도 종종 있지 않나?
아무래도 좀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난 워낙에 산책을 좋아해서 평소에 모자 푹 눌러쓰고 잘 걸어 다닌다. 그런데 잘 섞여서 다니면 잘 못 알아본다. 오히려 멋 부리고 선글라스 끼고 일부로 가리려고 하면 더 유심히 보더라. 심지어 모자를 벗겨보려 한 적도 있었다. (웃음) 오히려 그냥 안경 끼고 모자 쓰고 머리 하나로 둘둘 말아서 묶고 편하게 강아지 끌고 다니면 오히려 옆집 사는 사람처럼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 되는 거다. 그런 노하우를 배웠다. 가리지 말자. 나는 지극히 평범하니까. (웃음)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건 그전에 이미 연기자로서의 삶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연기를 맘먹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을 보고 연기라는 게 너무 하고 싶어졌다. 내가 예체능 쪽에 관심이 많긴 했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긴 했는데, 딱히 내가 정말 그렇게 가슴을 설렐 수 있는 일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공연 보고 나서 그런 가슴 떨림과 여운이 너무 짙게 남아서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부탁을 드렸지. 이 길을 걷게 해달라고. 쉽게 허락해주시지는 않았는데 결국엔 나한테 양보하셨다. 처음에는 아는 척도 안 하시더니 지금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고 코치까지 해주신다. (웃음)
처음 <혈의 누>를 통해 카메라 앞에 섰을 때와 지금은 뭔가 달라진 걸 느끼나?
근데 그때나 지금이나 난 카메라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던 거 같다. 안 한 게 아니라 그때는 못했지. (웃음)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 사이즈로 찍는지를 몰랐으니까. 근데 이젠 그건 파악이 되는데 그냥 공간만 의식이 되지, 카메라가 의식이 되거나 이런 건 없었던 거 같다. <혈의 누>할 때는 풀사이즈를 따던지, 뭘 하던지 전혀 상관없이 똑같이 연기했다. (웃음) 너무 멋몰랐었고 그땐 내가 시력이 안 좋아서 중간에 렌즈를 뺐다가 꼈다 이러느라 내 눈 찾기도 바빴다. (웃음)
존경할만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선생님들께서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누구나 노력해서 연기가 발전할 수 있고 잘 될 수 있지만 정말 자신한테 적역인 배역이 있다고. 그니까 어떤 작품의 어떤 분, 그게 다 틀린 거 같다. 그래서 누구 하나를 딱 찍어서 말할 순 없고 대부분의 선생님들께 배울 게 많은 거 같다. 물론 고두심 선생님이나 한혜숙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정말 비슷해 보이는 드라마에서 그렇게 자신만의 연기를 쏟아내시는 거보면 참 존경스럽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루 말할 게 없다. 평생 연기하고 싶어서 그런지 그런 선생님들이 더 친근하고 좋게 느껴지나 보다. 꾸준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