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브리지스는 캐릭터를 갈아입으며 배우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분명 실력에 비해서 주목받지 못한 배우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통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세상의 인정 따위는 그저 그럴 수밖에.
저명한 비평가 폴린 카엘은 <위대한 레보스키>(1998)가 개봉할 당시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를 이같이 논했다.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그에 앞서 1992년, 뉴욕 타임즈는 <어게인>의 리뷰에서 브리지스를 "그의 동세대 배우 중 가장 저평가된 훌륭한 배우”라고 평했다. 후에 브리지스는 스스로 말했다. "내가 저평가됐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변화에 순응하는 것인 만큼 열린 마음으로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하나같이 제프 브리지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가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목된 건 벌써 다섯 번째다. 그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데뷔작 <마지막 영화관>(1971)을 통해서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린 브리지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대도적>(1974)으로 또 한 번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 후로 <스타맨>(1984)과 <컨텐더>(2000)를 통해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크레이지 하트>(2009)를 통해 수상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트로피를 움켜쥔 브리지스는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부모님과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무엇보다도 기쁜 건 내가 받은 이 상이 훌륭한 영화 한 편을 다시 주목받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브리지스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자각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후에 고백했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건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1973)를 끝낸 후였을 거다.” 당시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의 촬영을 마친 브리지스는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존 프랑켄하이머가 <아이스맨 코메스>(1973)에 그를 캐스팅하기 원한다는 소식이었다. 로버트 라이언, 리 마빈, 프레드릭 마치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브리지스는 거절했다. 그러자 2시간 후, <라스트 아메리칸 히어로>를 감독한 라몽 존슨이 찾아와 그를 꾸짖었다. “자네가 그러고도 배우인가? 진정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영화계의 이런 거물들과 일할 기회를 차버릴 수 있지?” 결국 브리지스는 <아이스맨 코메스>에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배우를 직업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배우로 살고 있는 브리지스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말했다. “그들과 함께 한 작업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이 일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줄 만큼.” 사실 제프 브리지스는 배우보단 뮤지션을 꿈꿨다. “나는 스스로 배우로서 활동하길 진지하게 결정하기 전에 이미 열 편의 영화를 해버렸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카데미에 두 번째 노미네이트 되고 나서도 여전히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하게 될 거야.’” 일찍이 <사랑의 행로>(1989)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던 브리지스는 <컨텐더>(2000)에서 본격적으로 노래 실력을 뽐냈다. 킴 칸스와 함께 녹음한 쟈니 캐쉬의 명곡 ‘Ring of Fire’이 오프닝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것이다. 같은 해 제프 브리지스는 유명한 아티스트 마이클 맥도날드와 크리스 페노니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램프 레코드’에서 자신의 이름이 찍힌 앨범, <Be Here Soon>을 발매했다. “대단한 작곡가이자 내 오랜 친구인 존 굿윈이 써준 세 곡이 앨범이 수록됐다. 우린 함께 자랐지. 심지어 마이클 맥도날드와 데이비드 크로스비가 내 백업 싱어였다고!” <크레이지 하트>에서 퇴물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를 연기한 브리지스의 선택도 그의 음악적 갈망과 무관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야기는 더없이 훌륭했다. 다만 그 안에 담겨야 할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음악을 찾고자 했다.” 곧 브리지스는 대안을 찾았다. 그에 의하면 <크레이지 하트>는 이미 30년 전부터 준비된 영화였다. <크레이지 하트>에서 음악을 담당한 티 본 버넷과 브리지스가 처음으로 만난 게 30년 전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1980)에 출연할 당시, 함께 연기했던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티 본을 소개시켜줬고, 두 사람은 절친한 관계로 발전한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크레이지 하트>의 대본 중 어디선가 티 본이 보였고, 그도 나에게 대본에 관해 물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설적인 컨트리 가수 조니 캐시의 생애를 다룬 <앙코르>(2005)에서 음악을 만들었던 티 본은 <크레이지 하트>를 위해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브리지스는 티 본을 찾아가 물었다. “어때? 관심 있어?” 티 본이 답했다. “그래, 만약 네가 하겠다면 나도 하지.” 티 본의 참여로 <크레이지 하트>는 비로소 심장을 얻었다. 브리지스는 말한다. “티 본의 가세로 모든 것이 변했다.” 브리지스가 <크레이지 하트>에서 신경 쓴 건 단지 음악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인공 배드의 디테일까지 꼼꼼하게 놓치려 하지 않았다. <크레이지 하트>를 통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제프 브리지스는 오랫동안 배우로서 자리를 지키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할리우드 배우들과 달리 셀레브리티로서 가십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골든글로브 수상 소감에서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결혼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서 사랑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의 정직한 삶은 배우들의 방탕한 삶을 즐기는 대중에게 심심한 사안이었다. 덕분에 제프 브리지스는 철저하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로서 각인될 수 있었다. “어떤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기에 너무 깊게 몰두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을 고수해왔고 큰 성공을 거뒀다.” 브리지스는 자신의 연기 철학을 통해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항상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그것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내겐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브리지스가 애초 배우에 전념하지 못한 건, 어쩌면 즐거운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른 흥미에 흥미가 많았다. 음악과 미술, 그 외에도 내가 진짜 원하던 다른 것들까지.” <스타맨>에서 함께 출연한 카렌 앨렌의 제안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브리지스는 2003년 <Pictures: Photographs by Jeff Bridges>라는 사진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뛰어난 그림 실력을 자랑한다. 브리지스의 개인 홈페이지에는 그가 그린 삽화와 낙서로 가득하다. 현재 브리지스는 존 웨인의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에 참여를 결정했고,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SF영화 <트론>(1982)의 리메이크에 참여한다. 다양한 재능을 지닌 덕분에 다양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배우로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시상식 트로피를 얻는 것 역시 그에게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할 유일한 목표 따위가 아니라는 걸, 브리지스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브리지스는 자신이 터득한 행복의 비결을 당신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 부치지 말아라. 거창한 인생의 과제를 정하지도 마라.” 이보다 확실한 경험담은 없다. (beyond 4월호 Vol.43 'STAR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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